자투리 여행정보 54. 고산병

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에 있는 두 국가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땅

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54. 그래서 못 이룬 꿈이 아니라, 그럼에도 이겨낸 현실이 되길

드디어, 파미르를 향해

키르기스스탄 오시의 게스트하우스 ‘TES’에서 파미르를 향한 준비를 한다. 새벽마다 쥐가 내 빵을 훔쳐 먹긴 하지만 이 정도면 깔끔한 숙소다. 아침식사도 제공된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짐을 뒤져보니 내 빵 봉지 안에 쥐가 들어가서 빵을 훔쳐먹고 있었다.

사실 준비랄 것도 없다. 초코바와 부탄가스 등을 산 것 말고는 마음의 준비와 동네 산책 정도가 하루 일정이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우연히 찾은 식당에서 오븐에 구운 닭 반 마리를 약 3000원에 파는데, 숙소에서 준 아침을 배부르게 먹고 늦은 오후에 점심 겸 저녁으로 그 식당에서 닭을 사먹곤 한다. 저녁은 대부분 맥주다.

저녁 시간을 숙소에 있는 야외테이블에서주로 보내는데, 그곳에 사는 고양이와 친해져 품안에 고양이를 안고 사진을 정리하거나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낸다.

TES게스트하우스에서 친해진 고양이 '무르카'와

알타이 일리나에서 만난 고양이 이름을 따서 ‘무르카’라는 이름을 붙여줬는데 애교가 엄청 많아 내 무릎 위로 잘도 올라오지만 방 안에 쥐가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사냥에는 영 재능이 없는 듯하다.

이제 드디어 파미르로 향하는 날이다. 바이크에 잔뜩 올린 짐을 단단히 묶은 후 몇 번 흔들어서 다시 확인한 후 ‘이제 진짜 파미르로 가보자!’라고 기합을 넣고 바이크에 오른다.

출발을 앞두고.

우선 국경을 가야하기에 국경 근처에 있는 마을 ‘사리-타쉬’(sary-tash)를 목적지로 잡는다. 거리는 200km가 채 안 된다. 사리타쉬에 빨리 도착하면 오늘 안에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국경을 넘고, 늦게 도착하면 다음날 국경을 넘을 생각이다.

눈발이 조금씩 날린다. 내복에 우비까지 단단히 껴입고 장갑 두 겹과 방수용으로 가져온 부츠커버까지, 입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입었는데도 춥다. 흐린 하늘과 추운 날씨 때문에 비장함이 더 느껴진다.

출발하고 한동안은 특별한 것 없는 중앙아시아의 길이 이어진다. 말이나 양, 소 떼가 도로 위로 지나가는 바람에 몇 번 멈췄다가 다시 달리길 반복한다.

도로를 가로막고 지나가는 말들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 몇 개를 지나고 나니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도로가에 눈이 쌓여 있다.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바이크에서 내려 마음을 다잡기 위해 호흡을 깊이 하고 출발한다.

오르막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길옆으로 낭떠러지가 보이고 그 밑으로 보이는 세상이 점점 하얀색으로 변한다.

고도가 높아지며 보이는 풍경. 눈 덮힌 산이 구름을 뚫고 솟아있다.

해발 3400미터

두려움 때문인지, 산소가 부족해서인지 숨이 가쁘다. 헬멧 안에 쓴 마스크를 내리고 깊게 호흡했지만 머리가 아프다.

고도계가 해발 3400미터를 알린다.

길모퉁이에 쌓인 눈은 오르막길을 오를수록 점점 나를 옥죈다. 해발 3400미터가 되자 눈에 보이는 세상은 모두 얼어붙었다.

두 발을 바이크에서 떼 땅을 딛고 천천히 걷는 속도로 앞으로 나간다. 그러나 그도 얼마 가지 못하고, 바이크 뒷바퀴가 눈에 미끄러지며 헛돌기 시작한다.

내리막길을 이용해 조금 뒤로 갔다가 다시 앞으로 가길 반복하지만 딱 어느 선에 멈춰서 그 이상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몇 번을 반복하다가 속도를 조금 더 붙여 한 번에 통과할 생각으로 스로틀을 강하게 감았다. 속도가 붙은 바이크는 계속 미끄러지던 지점을 겨우 벗어났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며 곧바로 넘어지고 말았다. 가파른 오르막길은 처음 있던 곳으로 나를 다시 돌려보낸다.

겨우 조금 올라가다가 넘어지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온다.

한숨을 쉬고 바이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힘을 주는데 머리가 깨질 듯 아프더니 순간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눈앞이 어두워진다. 정신을 잡고 천천히 바닥에 앉아 깊게 호흡했다.

시간이 잠깐 지나자 몸 상태가 조금 돌아오는 것 같다. 가방에서 초코바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당을 섭취하니 고산병이 조금 완화된다. 살얼음이 얼기 시작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일어나 바이크를 일으켜 세웠다. 또 힘을 써서인지 머리가 아프다.

눈앞이 흐리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온통 얼어붙은 땅은 그 경계가 어디인지 구분이 가질 않고, 이곳에 숨 쉬는 존재는 나 하나뿐이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다.

내리는 것인지 날리는 것인지 모를 눈보라가 강한 바람과 함께 휘몰아치는 키르기스스탄의 해발 3400미터 어느 곳. 깨질 듯한 머리와 손끝, 발끝부터 올라오는 추위에 신음하며 무릎을 짚고 숨을 깊게 쉰다. 세상에 나만 남은 기분이다.

살고 싶다, 살아야한다

다시 바이크에 올라 시동을 걸고 스로틀을 감았다. ‘밤이 되면 나는 여기서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또 넘어졌다. 몽골에서 넘어지며 바이크에 깔려 다친 발목이 또 깔렸다. 다리를 빼내고 다시 숨을 몰아쉰다. 앉아만 있어도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오르막길에 앉아 고개를 들어 위를 본다.

이 오르막이 어디까지 이어질까. 저 앞에 보이는 곳까지 가면 이 오르막이 끝나긴 할까. 그럼 내려갈 때는 괜찮을까? 오시를 오는 길에 넘어온 산에서만 해도 내려갈 때가 더 위험했는데, 여기는 길옆이 바로 낭떠러지인데. 눈길에 미끄러져 그 밑으로 떨어진다면 아마 살아남을 수 없겠지. 이런 저런 생각에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숨이 찬다.

살고 싶다, 살아야겠다. 온통 하얀 이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해가 질 것 같다. 해가 지면 더 위험하겠지. 걱정과 두려움이 꼬리를 물며 이곳을 빠져나가야한다는 생각만 가득 찬다.

내려가는 길. 눈이 없는 땅이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바이크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방향을 돌렸다. 돌리면서도 한 번 넘어졌지만 저 앞에서 맹수가 쫒아오기라도 하는 듯한 급한 마음으로 다시 일으켜 세워 왔던 길을 허겁지겁 다시 내려간다.

내리막길에서 몇 번을 더 넘어지고 나서야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참을 더 내려와 갓길에 바이크를 세웠다.

얼어붙은 바이크.
추워서 덧 입은 우비와 부츠커버도 모두 얼었다.

바이크는 프론트 펜더부터 엔진, 기어, 체인, 리어 펜더까지 모두 얼어붙었다. 짐과 바지까지 전부 얼었다. 마스크와 수염에는 입김인지 콧물인지 모를 얼음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숨을 몰아쉬며 바지에 붙어있는 얼음을 떼어 낸 후 빠져나온 산을 뒤돌아본다. 한참을 달려왔는데도 산은 여전히 나를 덮칠 듯하다. 거대한 존재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 몰려온다.

가만히 있는 산이 쫒아오기라도 할까봐 급히 오시로 되돌아간다. ‘도망치는 것도 배우는 거야’라고 위로하며.

그럼에도 이겨낸 현실이 되길

한참을 달려 해가 지고 나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주인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맞아준다. 그 눈길에 마음이 조금 놓인다.

짐을 풀고 내가 쓰던 침대로 가서 누웠다. 전날까지만 해도 4인실 방을 혼자 썼는데, 이번에는 독일인 여성이 내 옆 침대에 들어와 둘이 쓰게 됐다.

혼자 쓰는 것보다 불편하지만 다인실 게스트하우스에선 어쩔 수 없는 일.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자, 독일인 여성이 숙소 주인에게 내 이야기를 들었는지 파미르에 대해 묻는다. 찍은 사진 몇 개를 보여주며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침대에 누웠다.

다음날 새벽, 악몽을 꾸다가 바람이 창을 때리는 소리에 깼다. 밖은 아직 어둡다. 악몽 때문에 흘린 식은땀에 쌀쌀한 공기가 닿아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전날 과정을 다시 떠올린다.

여전히 무섭고 두렵다. 다시 그곳을 갈 수 있을까. 파미르는 여기보다 고도가 더 높아 위험할 탠데 괜찮을까.

게다가 도망쳐 나왔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럽다. 중간에 도망치거나 하던 일을 끝내지 못하고 그만 두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하는’ 성격 탓에 이등병 때 조기전역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1년 10개월의 군 생활을 꾸역꾸역 버텨냈고, 총학생회장을 하면서도 이 성격 때문에 고생을 자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엄청난 자연 앞에서 내 생각과 신념 등 모든 것을 뒤덮을 만큼 큰 두려움을 느꼈고, 살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였다. 처음의 다짐이나 목표 따위는 어디에도 없고, 이곳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그리고 ‘도망치는 것도 배우는 거야’라며 합리화했다.

도망친 덕에 따뜻한 이불 속에서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밤을 맞이했거나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면 이런 배부른 생각을 하지도 못하겠지. 이 부끄러운 감정도 여행의 한 부분일 것이다. 내가 보고 싶어 한 내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진짜 모습을 본 것에 만족하고 끝내면 안 된다. 이를 딛고 나아가야한다. 창밖이 밝아진다. 만용일지도 모를 용기가 되살아난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 모습과 내가 느낀 감정을 공책에 적는다. 다시 파미르를 향하기로 결심하고, 그 다짐을 한 자 한 자 눌러 적는다.

‘그래서 못 이룬 꿈이 아니라, 그럼에도 이겨낸 현실이 되길.’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자투리 여행정보 54. 고산병

해발 2000~3000미터 이상의 고지대로 이동했을 때 산소가 희박해지면서 신체에 나타나는 급성 반응을 고산병이라 한다. 심각한 경우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뇌나 폐에 물이 차는 등 여러 합병을 일으켜 사망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아세타졸아미드(Acetazoleamide)와 같은 약을 준비해 높은 곳에 오르기 전에 복용하는 것이 좋다. 또, 고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오를 때 천천히 오르는 것이 중요하고, 증상이 나타나면 하산하거나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한다.

하지만 나는 약을 준비하지 못했고, 바이크로 이동하는 탓에 걷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이 때문에 고산병을 여러 차례 겪었고, 당분이 풍부한 초코바와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는 것으로 버텼다.

인천투데이 김강현기자

김강현은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현장실습으로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인천대학교에 입학해 2015년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2016년 7월부터 2017년 5월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지금은 <인천투데이> 기자로 활동 중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