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에 있는 두 국가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땅

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뭔가를 해야만 해? 게을러지자

싱싱한 야채와 과일이 준 행복

체리 가게 아줌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은 채 장을 봐서 숙소에 돌아왔다.

생김새부터 완전히 다른 타국인에게 공짜로 체리를 준 고마운 아줌마에게 루슬란(나쁜 놈)이 잘못 알려준 욕을 해버렸으니 마음이 영 편치 않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제대로 해명하고 사과할 수도 없는 일. 나중에 루슬란에게 연락해 욕을 잔뜩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저녁 준비를 하는데 숙소에 손님이 많지 않아 우리 말고는 주방을 쓰는 사람이 없다. 시장에서 사온 야채를 다듬고 썰어 샐러드를 만든다. 드레싱은 마트에서 산 요거트로 대체하고, 통 식빵도 먹기 좋게 썰고, 훈제 햄도 썰어 접시 위에 올렸더니 그럴듯한 한 끼 식사가 완성됐다.

오랜만에 먹은 샐러드와 과일은 인간이 육식과 채식을 다 할수 있다는게 감사할 정도의 맛이었다.

우선 맥주를 따서 건배를 하고는 빵 위에 훈제 햄, 파프리카, 샐러드, 체리를 차곡차곡 올려 한 입에 털어 넣는다.

아삭한 야채와 과일의 식감에 소름이 돋는다. 씹을 때마다 과즙이 잔뜩 흘러나오지만 함께 먹는 식빵이 순식간에 흡수한다. 훈제 햄의 향기도 한몫 거들어 입안에서 파티가 열리는 기분이다. 인간이 육식과 채식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그동안 과일이나 채소를 잘 먹지 못했기에 더욱 맛있다. ‘와~’ 하는 감탄사 말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큰 접시 두 개에 담은 샐러드를 다 먹어 치우고 나서야 저녁식사가 끝났다.

식사를 마친 후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고 거실 소파에 누워 과일과 채소의 맛있음을 얘기하고 있는데, 위층 객실에서 한 아저씨와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소년이 내려온다.

중국에서 온 왕 아저씨와 아들

중국에서 온 여행객이라고 소개한 왕 아저씨와 그의 아들이다. 왕 아저씨는 더 넓은 세상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여행을 하고 있단다. 우리가 한국에서 온 바이크 여행자들이라고 소개하자, 그는 굉장히 관심을 보이면서 서툰 영어로 이것저것 묻고, 우리도 영어로 대답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중국에서 아들과 함께 여행온 왕 아저씨

대화를 계속 하는 동안 핸드폰 게임에 몰두하고 있던 아들이 방으로 올라가려하자, 왕 아저씨는 화를 내며 억지로 잡아두려 한다. 실랑이 끝에 아들은 방으로 올라가 버린다. 왕 아저씨는 ‘매일 게임만 하고 있어서 걱정’이라며 아들이 우리처럼 더 넓은 세상을 봤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한다.

부모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생각이 아들을 더 괴롭힐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지금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고 응원해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번역기를 써가며 내 생각을 전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꽤 오랫동안 진지한 대화를 이어갔다. 아저씨는 ‘아들을 믿어보겠다’며 “이번 여행 동안 아들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대화를 마치니 피곤함이 몰려온다. 일행들과 과자와 맥주를 들고 방으로 갔다. 맥주를 마시며 가져온 노트북으로 영화를 한 편 보고 잠자리에 누웠다. 

시베리아의 파리

주방에서 러시아 홍차인 쵸르니 차이 한 잔을 타서 식빵을 들고 앞마당으로 나왔다. 오늘도 역시 동네를 돌아봐야지. 별 생각 없이 이곳에 왔지만, 이르쿠츠크는 알면 알수록 재밌는 도시다.

오늘은 바이크 수리점을 찾아보고 전날 갔던 시장 방향이 아닌 반대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우선 와이파이가 잡히는 숙소에서 바이크 수리점과 가볼만한 장소를 검색해둔 다음 간단하게 씻고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좋다. 큰 건물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걷는다. 시장과는 굉장히 다른 분위기의 동네가 나온다.

쇼핑센터에 한 건물. 안에는 명품 브랜드의 매장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큰 백화점이 몇 개씩이나 있고, 아주 익숙한 유명 브랜드 매장과 명품 매장도 있는 쇼핑센터가 나온다. 보도나 계단도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이다. 기타나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버스커들이 도시를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고, 예쁜 카페나 레스토랑들도 보인다.

첫날 만났던 이르쿠츠크와는 또 다른 느낌. 러시아 전체에서도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대도시 이르쿠츠크. 이것저것 검색해보니 문화예술이 굉장히 발전해 있어서 ‘시베리아의 파리’라고도 불린다. 도시 곳곳에는 크고 작은 광장들이 있고, 사람들도 모두 여유로워 보인다. 

아코디언 연주 소리가 들리는 거리는 왜 이르쿠츠크가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지 이해하게 했다.

거리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여유를 부리다가 모자 하나와 간단히 입을 티 몇 장, 그리고 손도끼 하나를 샀다. 이전부터 조금 더 큰 칼이나 도끼 등을 사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고 비싸기도 해서 참고 있었는데, 우연히 만난 사냥용품점에서 눈에 딱 띄는 도끼를 찾았다.

그동안 위험이 있을 때마다 단도 하나로는 별 위협을 주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사용할 일이 없는 게 가장 좋겠지만,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정도의 호신 물품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종종했다.

물론 도끼를 사용해야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내가 이것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못하겠지만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시켜주는 부적 같은 개념이다. 캠핑할 때도 도끼의 필요성은 두말 할 것 없었다. 특히 장작을 팰 때 가장 필요했다.

사냥용품점에서 새로 산 호신ㆍ캠핑용 도끼

새로 산 도끼는 나무로 된 손잡이에 날이 아주 얇고 예리한 투척용이다. 장작을 패기에는 조금 불편해보이긴 하지만,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아 허리춤에 차고 다니기 좋다.

허리춤에 도끼를 차고 쇼핑센터를 돌아다니니 사람들이 힐긋힐긋 쳐다본다. 아이들도 있어서 너무 무서워 보이거나 괜한 시비가 생길까봐 케이스에 넣어 잘 가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부품이 없어서 고치지 못한단다

내일은 내 바이크를 화물회사에서 찾는 날이다. 수리점을 미리 찾아보기 위해 숙소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장소를 검색한 후 다른 일행의 바이크를 같이 타고 나갔다.

겨우 찾은 수리점에서 내 바이크의 사진과 필요한 부품 사진을 보여주며 고칠 수 있냐고 물어보니, 부품이 없어서 고치지 못한단다. 몇 군데 더 돌아다녔지만 결과는 같다.

이 도시에서도 바이크를 고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울 따름이다. 일행들의 바이크도 상태가 좋지 않아서 수리해야 하는 상황인데 부품이 없단다.

도시에서는 바이크를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산산이 깨져버렸다. 막막하다. 바이크를 고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서 바이크를 버리고 히치하이킹으로 횡단해야 하나? 자전거를 한 대 사서 여행을 계속 할까? 해가 조금씩 저물어 가는 오후. 걱정이 점점 더 커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는 법. 밥 먹고 힘을 내자며 숙소 근처에 봐뒀던 식당으로 이동해 만두와 볶음 면인 라그만을 주문해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었다.

만두와 러시아ㆍ중앙아시아ㆍ중국 일부 지역의 전통음식인 라그만

조금 느끼하긴 하지만 만두는 한국에서 먹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매콤달달한 소스에 면과 각종 야채, 소고기를 볶은 라그만도 처음 먹어보는 맛이지만 먹을 만하다.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나니 기운이 조금 난다. 숙소로 들어와 음악을 들으며 샤워를 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검색으로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에 산다는 바이크 수리점 직원을 알게 됐다. 러시아 전역에 바이크 부품 총판업을 하고 있는 그는 영어도 할 줄 알고 SNS에 전화번호까지 있다.

냉큼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SNS 메시지를 보내놓고 다른 것을 찾던 중 답변이 왔다. 내 상황을 설명하고 부품을 찾는다고 말하니, 아마 구하기 힘들 거라며 해외에서 직접 구입해서 택배로 받는 게 빠를 거라고 설명해준다.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아 우체국 EMS 국제특송으로 한국에서 부품을 받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국의 친구에게 연락해 내가 필요한 부품을 말하고 구입과 특송을 부탁했다. 일행 한 명도 함께 부품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가볍게 해결되지 않는다. 러시아는 ‘배달 지연 국가’라 물품 검사와 통관에 시간이 한참 걸리는 데다, 이르쿠츠크 공항이 아닌 모스크바 공항으로 모든 물건이 도착해 거기에서 다시 육로로 배송된단다.

물건을 받기까지는 2주에서 3주까지도 걸린다.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고 있어도 숙박비가 드는데, 배송비와 수리비 등 이것저것 생각하면 들어갈 돈이 만만치 않다. 걱정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일단 친구에게 부탁해 숙소 주소를 알려준 후 물건을 받기로 했다.

게을러지기로 했다

최소 2주. 하루 숙박비가 1만 2000원에서 1만 3000원 정도에 하루 식비도 그 정도 들어간다고 치면 2주간 돈을 아무리 아껴도 남는 게 간당간당하다. 하지만 미리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는 상황.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오늘 하루를 보내고 싶진 않다.

일단 쓰고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일행들과 돈을 모아 마트에 가서 가장 싼 보드카 한 병을 샀다. 4000~5000원이면 넷이 먹어도 다 먹지 못할 만큼 독하고 싼 보드카를 구입할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이다.

숙소 주방에 비치돼있는 비스킷을 안주로 보드카를 홀짝거리며 이르쿠츠크에서 몇 주 동안 할 것들을 얘기한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한참을 고민하던 중 일행 한 명이 “꼭 뭔가를 해야만 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온 여행이다. 

그 말 한마디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게을러 보일 만큼, 이곳에서 편하게 쉬고 부는 바람과 따스한 햇살을 맞으리라. 안가라 강에서 뛰노는 어린 아이들을 보며 하루를 보내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투리 여행정보 21. 라그만

라그만은 우리나라 잔치국수처럼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신장 지역, 러시아 등에서 가장 많이 먹는 음식 중 하나다. 라면과 비슷한 발음의 면 요리인 데다 가격도 비싸지 않아 자주 사먹었다. 

일각에서는 라그만은 인류 최초의 면요리라고 말하기도 한단다. 약 2500년 전, 이란 지역과 카스피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등지로 이동해 터를 잡고 살아가면서 만들어낸 음식이라는 설이 있다.

피망, 토마토, 감자, 양배추, 당근 등과 함께 양고기나 소고기를 넣고 볶아 물과 면을 넣고 국물이 자작하게 해서 먹는다. 면 굵기는 보통 우동 면과 비슷하다.

식당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라그만과 빵을 함께 먹는다. 아마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배부르게 먹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 같다. 조금 느끼하긴 하지만, 고기도 큼직하고 각종 야채도 있어서 여행하며 자주 먹은 음식 중 하나다.

인천투데이 김강현기자

 

김강현은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현장실습으로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인천대학교에 입학해 2015년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2016년 7월부터 2017년 5월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지금은 <인천투데이> 기자로 활동 중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