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 호수, 별장 그리고 술과 사람들
호숫가 별장으로
루슬란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됐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근처에 있는 호숫가에 친구의 별장이 있다며 그곳에서 파티를 하자고 했다.
호숫가 별장에서 파티라니. 바이크가 고장 난 지금 할 것도 없는 나는 당연히 신나서 그들을 따랐다. 인원이 금세 차 두 대로 움직여야 할 만큼 모였다. 팀을 나눠 술과 안주를 사고 다시 루슬란의 집 앞에서 만나 호숫가로 이동했다.
샤샤의 차는 독일 브랜드로 연식은 조금 오래돼 보였지만 고급이었고, 다른 차 한 대는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별장 주인 로만의 차였다.
오래된 중고차를 사서 꾸미며 타는 게 이쪽 청년들의 유행인 것 같았다. 그 오래된 차는 요즘 차처럼 날렵한 곡선이 아니라 각 져 있었는데, 디자인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조금씩 튜닝을 한데다 베이지색으로 깔끔하게 도색까지 해놓았다.
나와 일행은 둘 다 그 차가 타보고 싶었기에 갈 때와 돌아올 때 한 번씩 그 차를 타보기로 했고, 내가 먼저 샤샤의 차를 타고 호수로 향했다.
루슬란은 금방 도착하니까 가서 샤슬릭도 해먹고 러시아식 사우나인 바냐도 하자며 한껏 들뜬 듯 말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록 도착할 생각을 안 했고, 슬슬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짐이 다 루슬란의 집에 있는데 어떡하지? 이들이 지금 나를 납치해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호주머니 안에 넣어둔 단도에 손이 갔다.
컴컴한 어둠속을 두 시간 반 정도 달리고 나서야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마을 입구에는 바리게이트가 쳐져있었고, 경찰들이 차량을 검문하기 시작했다.
샤샤는 내게 “걱정하지 마.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경찰들에게 보이지 않게 얼굴을 가리고 있어”라고 말했다. 아마 외국인인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라고 예상한 듯했다.
다행히 검문은 차량등록증 등을 확인하고 금방 끝났고, 마을 안에 있는 숲속 별장에 도착했다.
정돈되지 않은 숲 속 나무집
로만의 부모님이 사는 집 옆에 딸린 별장이다. 그의 친척이나 친구들이 가끔씩 놀러올 때를 제외하면 쓰지 않는 곳이라고 했는데, 낡은 나무집이었지만 침대에 이불, 스피커도 준비돼있었다. 집 옆에는 통나무로 된 바냐도 따로 있었다.
루슬란의 친구 타샤가 프라이팬에 버섯을 굽는 동안 루슬란은 밖에 나가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로만은 닭다리에 칼집을 내고 양념을 뿌린 후 석쇠에 올려놓았다.
타샤는 루슬란과 비슷한 또래인 이십대 초반의 여자였는데, 루슬란과 계속 붙어있는 데다 스킨십을 하는 것을 보니 연인으로 발전하기 직전으로 보였다. ‘예전에 만났을 때 루슬란은 소치에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는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짐과 먹거리 정리를 마친 친구들이 하나둘씩 앞마당으로 나와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잘 자른 자작나무들이 잔뜩 있어서 불은 금세 활활 타올랐고, 그 불을 조명삼아, 난로 삼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과격하지만 순수한 사람들
집 안에서 마당 쪽으로 돌려놓은 스피커에서는 그들이 좋아하는 음악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슬란이 제안한 게임도 했는데, 맥주를 병째 들고 돌아가면서 1초씩 더 오래 마시는 게임이다.
첫 번째 사람이 1초 동안 마시면, 두 번째 사람은 2초 동안, 세 번째 사람은 3초 동안 마시는 단순한 게임이었는데, 몇 바퀴 돌고나니 내 순서에는 페트병 하나를 원 샷 해야 할 정도다. 그래도 지기는 싫어 꾸역꾸역 마셨고, 다음 차례인 로만이 포기하고 말았다. 벌칙은 벽을 짚고 엎드려 발차기를 맞는 것이다. 과격하다.
게임이 끝나고 다들 술에 조금씩 취하니 서로 때리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루슬란은 가만히 서있는 친구의 허벅지에 발차기를 날리기도 했고, 그 친구는 루슬란의 배에 주먹질을 하기도 했다.
온힘을 다해 때리는 모습에 ‘조금 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쯤이면, 다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맥주를 마신다. 과격하지만 아이같이 순수하다.
불씨가 잦아들자 로만이 아까 준비했던 양념 닭다리를 석쇠에 끼워 들고 왔다. 닭다리는 금세 노릇하게 익었다.
석쇠에서 꺼낸 닭다리를 바가지 같은 큰 그릇에 다 담고는 각자 하나씩 쥐고 먹기 시작한다. 엄청 뜨거워 잡기조차 힘들었지만, 맛은 최고였다. 껍데기는 바삭하고 속살은 쫄깃쫄깃하다. 살 안쪽까지 양념이 잘 배어서 싱겁지 않고, 숯불의 향기도 은은하게 퍼진다.
루슬란에게 이걸 어떻게 만든 거냐고 물어보니, 마트에서 파는 샤슬릭 가루양념으로 간을 한 것이라고 했다. 다음에 샤슬릭을 해먹을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그 가루양념을 꼭 사야겠다. 타샤가 프라이팬에 볶아온 버섯도 먹었다. 처음 보는 버섯이었는데, 굉장히 맛있다.
“러시아 바냐!”
술을 한참 마시다 얼큰하게 취할 때쯤 루슬란과 타샤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남은 친구들은 바냐를 하러 가자고 했다. 바로 옆에 통나무로 된 건물로 향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내부 온도를 높이고, 사우나실 한 쪽에는 뜨겁게 달군 돌을 쌓아둔다. 그 돌에 물을 뿌려 나오는 수증기를 쐬는 방식이다. 사우나는 한국의 문화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국의 사우나와 비슷한 모습에 놀랐다. 술 먹고 사우나를 해도 되냐고 물으니, 원래 바냐는 술 먹고 하는 거란다.
옷을 다 벗고 그들이 준 모자를 쓰고 바냐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내심 ‘뜨거운 건 한국이 최고지’라고 생각하며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들어가는 순간 끼친 열기는 눈알이 뜨거울 정도였다.
숨을 겨우겨우 내쉬며 안에 들어가 앉았는데, 뜨겁기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정도였다. 그들 중 털보친구만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는데,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면서 신이 난 듯 달궈진 돌에 물을 끼얹었다.
‘치익’ 하는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엄청나게 뜨거운 수증기가 바냐 안으로 번진다. 정말 살이 다 익는 줄 알았다. 하지만 괜한 자존심에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버텼다.
털보친구는 더 신이 난 듯 “러시아 바냐!”라고 외치며 다시 한 번 돌에 물을 들이 부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찬 공기를 맞으며 다 벗은 상태로 풀밭에 누웠다. 온몸에서 김이 펄펄 난다. 샤샤가 따라 나와 괜찮으냐고 물으며 시원한 맥주를 건넸다. 사우나 후에 먹는 맥주는 몸에 해로운 만큼 맛있다.
슬슬 다른 친구들도 나와 맥주를 한 모금씩 마시고는 다시 바냐 안으로 들어가길 반복했다. 온몸이 다 익었겠다 싶을 때쯤, 그들은 호수에 다이빙하러 가자고 했다.
보이지도 않는 한밤중에 술까지 마신 상태로 그 깊은 호수에 다이빙이라니? 정말 이 친구들이 제정신인가 싶었지만, 여행 온 이상 나도 한번 미쳐보기로 하고 옷을 입고 그들을 따라 나섰다.
아레이호수
맥주 한 병씩을 들고 호수로 향했다. 호수가 가까워지자 파도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호수 주변 집들은 정말 크고 세련된 별장 느낌이었는데, 친구들의 말로는 치타에서 가장 부자들이 사는 집이라고 했다. 우리가 안주를 사러 갔던 대형마트 사장의 집도 있었다.
호수가 정말 바다 같은 느낌이다.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파도도 높다. 당장 호수에 뛰어들겠다며 옷을 벗는, 취한 안톤을 말리고 해안가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철썩거리는 호수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가만히 앉아서 술을 마시니 취기가 제법 올라왔다. 피곤하고 추워지기까지해서 친구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와서도 바로 잠들지 못했다. 숙소에 오니 루슬란과 타샤가 입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은 신이 나서 환호하며 그들을 놀렸는데, 루슬란과 타샤는 웃으며 계속 입을 맞췄다.
다시 달아오른 분위기에 술을 더 마시기 시작했다. 맥주를 한 병씩 들고 춤을 추며 술을 마시다가 창밖으로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때쯤 잠들었다.
자투리 여행정보 16 러시아 사우나 ‘바냐’
러시아식 사우나인 바냐(영어: Banya, banja, 러시아어: ба?ня)는 보통 목조주택 형태로 이루어져있으며, 샤워를 할 수 있는 곳과 사우나를 하는 곳으로 나뉘어 있다.
주로 강이나 호수와 가까운 곳에 만든다는데, 한겨울에 강이나 호수에 얼음을 깨놓은 뒤, 바냐를 하다가 나와서 바로 얼음물에 뛰어들곤 한단다.
사우나실은 전체가 나무로 만들어져있으며, 한쪽에 뜨겁게 달궈진 돌에 물을 부어 수증기를만든다. 몸을 한참 달군 후에는 자작나무가지와 편백나무, 참나무 등으로 만든 빗자루 같이 생긴 베니크(веник)라는 목욕 도구로 온몸을 톡톡 두드린다.
러시아 친구들은 이 바냐 덕에 한겨울에도 감기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산다고 생각한다. 바냐를 해야 술이 깬다며 술을 한참 먹다가 바냐를 하고, 술이 깼으니 다시 술을 먹자고 하는 친구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분명한 것은 한국의 사우나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이다. 머리가 핑핑 돌기도 하고, 돌에서 나온 수증기가 너무 뜨거워 살이 익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만큼 개운하기도 하다. 여행을 하며 쌓인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김강현은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현장실습으로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인천대학교에 입학해 2015년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2016년 7월부터 2017년 5월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지금은 <인천투데이>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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