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치타를 떠나다
일찍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치타’에서 3일간 쉬었더니 몸 상태가 아주 좋다. 숙소 바닥에 나뒹구는 짐들을 배낭에 차곡차곡 넣고, 바이크 재킷과 바지로 갈아입은 후 체크아웃을 하러 데스크로 향했다.
도난이 걱정돼 바이크에 짐을 두고 올 수 없기에 늘 짐을 싸서 숙소에 들어와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짐이 너무 무거워 고생이다. 여행용 배낭처럼 주머니가 여러 개로 나뉘어 있지 않은 원통형 배낭인데, 고무재질로 방수기능이 있고 가격이 싼 편이라 구입했다.
커다란 원통형 배낭 하나에 작은 배낭 하나, 그리고 카메라 가방과 노트북 가방을 짊어지고 체크아웃을 한 뒤 바이크가 있는 주차장까지 오니 벌써 땀이 흥건하다. 가방을 내려놓은 후 그늘에서 잠시 땀을 식힌 후 짐들을 바이크에 동여맸다. 또 흐른 땀을 식히기 위해 그늘로 들어가 쉬기를 반복했다.
다시 출발하려니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바이크에 올라타 익숙하게 키를 꽂아 돌린 후 부르릉 소리와 함께 치타를 떠난다.
호수의 유혹
도시를 벗어날 때까지는 길이 괜찮았지만, 도로 공사를 해서 좁고 위험한 구간이 많다. 속도를 낮추고 천천히 공사 구간을 통과하니 드넓은 초원이 반겨준다. 치타에 들어올 때처럼 광활하고 밝은 초원 저 멀리서 풀을 뜯고 있는 소와 양도 보이기 시작한다.
올 때와 비슷한 풍경이지만, 길이 조금 더 좁고 꼬불꼬불하다. 직진 길이 더 편하긴 하지만, 코너링을 할 수 있는 곡선 길은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 짐이 너무 무거워 바이크를 마음껏 눕히며 코너를 돌 수는 없지만, 직진보다는 훨씬 더 재밌게 탈 수 있다.
그런데 기분이 너무 좋아지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핸드폰을 바이크 핸들에 있는 거치대에 놓고 이어폰을 연결해 음악을 듣다가 시원한 바람을 더 많이 맞고 싶어 일어난 순간, 이어폰 줄이 당겨져 핸드폰이 바이크에서 떨어져나갔다.
깜짝 놀라 왼손으로 날아가는 핸드폰을 잡긴 했는데,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갑자기 한 손을 들었더니 순간 중심을 잃을 뻔했다.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핸드폰을 다시 제자리에 놓기 위해 곧바로 길가에 멈췄다. 핸드폰을 다시 거치대에 고정하고 운전에 집중하기 위해 이어폰을 빼고 다시 출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넓게 펼쳐진 초원 저 멀리에 호수가 보인다. 푸른 초원 한가운데 있는 호수는 그림같이 아름답고, 호수 한 쪽 끝에는 자작나무숲이 펼쳐져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일행들에게 ‘호수에 들어가자’고 손짓하며 길에서 벗어나 호수를 향했다.
사면초가
처음에는 달릴 만했다. 오프로드긴 해도 돌이 많지 않았고, 풀들도 낮게 깔려 있어 조금만 주의하면 괜찮은 길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풀이 우거지기 시작하더니 논두렁 같은 움푹 파인 곳이 나왔다. 호수는 멀지 않아 보였다.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한번 들어가 보자고 마음먹고 앞을 향해 달렸다.
브레이크를 천천히 잡으며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곧이어 우거진 풀에 가려 보이지 않던 늪이 나와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땅을 딛고 일어나보니 펄이 섞인 물이 올라와 순식간에 부츠를 다 적시고 발목 위까지 차올랐다. 온 힘을 다해 바이크를 일으켜 세웠는데, 따라온 일행 중 한 명도 덩달아 내 옆에서 넘어져버렸다.
바이크를 돌려 나가기엔 펄과 풀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일단은 바이크에 타지 않고 스로틀을 살살 당겨 언덕을 넘어가려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펄이 섞인 땅 위에서 무거운 바이크의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아 몇 번을 넘어졌다.
옷까지 다 젖은 상태, 더 이상 무언가를 할 방법이 없었기에 그냥 바이크에 올라 액셀을 힘껏 당겼다. 바이크는 펄과 풀잎을 휘날리며 언덕을 올라갔지만, 앞바퀴가 조금 떠오르는 순간 또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땅이 거칠지는 않아 크게 다치진 않았다. 뒤를 돌아 일행에게 그냥 속도를 올려 넘어오라고 말하고는 바이크를 겨우 일으켜 세웠다. 숨을 조금 고르고 뒤를 돌아보니 다른 일행들은 뒤쳐졌는지, 같이 늪에 빠졌던 일행 한 명만 나를 따라오고 있다.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언덕을 겨우 올라온 일행과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멈춰 이야기했다.
크게 빙 둘러서 나가면 언덕이 높지 않은 곳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고생한 게 아까워서라도 호수를 봐야겠다는 오기가 생겼고, 그건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떨어진 일행들과는 다음에 연락해 도시에서 만나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우리는 전진하기로 했다.
늪과의 기나긴 사투
두렁을 간신히 지나니 풀이 바이크를 탄 내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게 자라 있었고, 땅은 늪처럼 바퀴를 잡아당겼다. 넘어질 번한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기고 겨우 호수가 보이는 곳까지 왔는데, 깊은 늪에 뒷바퀴가 빠져 버렸다. 중심을 잃고 또 넘어지고 말았다.
바이크를 일으켜 세우려는데 힘이 부족했다. 체력이 고갈된 것이다. 옆에 있던 일행이 도와줘 겨우 바이크를 일으켜 세우고 나니 뒷바퀴가 30센티미터 정도 펄에 잠긴다. 무성한 풀 덕분인지 더는 빠지지 않아,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온몸이 땀인지 물인지 모를 것들로 범벅이다. 넘어지면서 헬멧 안까지 젖었다.
일단은 호수를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까이 가 보니 호수가 아니다. 평평하고 드넓은 초원에 빗물이 고여 만들어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넓은 물웅덩이다. 자작나무 숲은 호수와 바로 붙어 있는 게 아니라 저 멀리 뒤쪽에 있다. 물이 흥건한 늪지대여서 도저히 캠핑할 수 없다. 벗어나야하는 상황이다.
챙겨온 물을 마시며 늪에 털썩 주저 않았다. 허리춤까지 물이 젖어들었지만 이미 다 젖고 힘이 빠져버렸기에 될 대로 되겠지 하는 심정이다. 아침에 빵 몇 조각을 먹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더니 배도 고프다.
그늘도 없는 곳에서 뜨거운 햇볕은 현기증을 유발한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났다. 가방 안에서 수건 한 장을 꺼내 땀과 물을 대충 닦아내고 머리에 썼다. 헬멧을 쓰기엔 너무 덥고 찝찝해 헬멧 대신 햇빛을 막기 위해서다.
다행히 일행의 바이크는 안정적으로 서 있었고, 내 바이크만 빼내면 된다. 내가 바이크에 올라 타 시동을 걸고 스로틀을 당기면, 일행이 뒤에서 밀어주기로 했다. 핸들을 잡고 바이크를 들어 올리듯 힘을 주며 스로틀을 당겼다. 하지만 늪은 뒷바퀴를 단단히 잡고 놓아 줄 생각을 안 했다. 바퀴는 꿈쩍도 않고, 아무것도 없는 초원 한가운데서 엔진소리만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엔진이 과열되지 않게 쉬었다가 다시 시동을 걸고, 힘을 쓰며 한 시간이 넘게 바이크를 꺼내기 위해 씨름했다. 땅이 미끄럽고 질척해 힘을 제대로 주기도 어려운데, 바이크는 꿈쩍도 않는다.
바이크에 실려 있는 짐을 하나씩 내리기 시작했다. 무거운 알루미늄 사이드백도 나사를 돌려 전부 다 탈거했다. 가벼워진 바이크를 둘이 들어 올려 겨우 뒷바퀴를 빼냈다. 둘 다 바이크 뒤쪽을 들어 올리느라 바이크가 또 중심을 잃고 넘어졌지만,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아침에 출발해 점심 무렵에 이 늪에 들어왔는데, 해는 어느덧 내 그림자가 아주 길게 늘어질 만큼 저물어 있다. 바이크를 세우고 다시 짐을 하나씩 올려 다 묶는 데만 수십 분이 걸렸다. 어지럽고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기도 힘든 지경이다.
하지만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한다. 이 늪에서 밤을 날 수는 없다. 비라도 온다면 맨몸으로라도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 잔뜩 열이 오른 바이크를 식힐 겸 잠시 시동을 껐다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바이크에 올라 시동을 걸고 늪지대를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풀이 최대한 없는 곳으로, 웅덩이를 피해 천천히 달려 나갔다. 다행히 두렁에 다다를 때까지는 넘어지지 않았다.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해 바이크를 세워두고 걸어서 두렁 밑으로 내려갔다. 발목 위까지 푹푹 빠지는 늪을 따라서 옆으로 5분쯤 걸으니 그나마 언덕도 낮고 늪도 발등이 겨우 잠기는 곳이 나왔다.
한 명은 바이크를 끌고 한 명은 뒤에서 밀어주는 방법으로 언덕을 넘었다. 천천히 나머지 초원을 빠져나와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로 나오자 깜깜한 밤이 됐다. 살아나왔다는 환희에 소리를 지르며 서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홀로 남겨진 위험한 밤
일행이 먼저 앞으로 치고 나갔다. 나도 속도를 올리려고 스로틀을 감았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일행은 이미 내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는데, 내 바이크는 속도가 20킬로미터도 안 나오고, 스로틀을 당겨도 엔진소리만 요란하다.
고장이다. 수차례 넘어지면서 물을 먹어서인지, 엔진이 과열돼서인지 모르지만 고장이 분명하다. 엔진소리도 이상하다. 멈춰 서서 일행을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제법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혼자 남겨진 러시아의 어두운 밤. 앞으로 나가지 않는 바이크와 서있기만 해도 후들거리는 다리, 잔뜩 젖어 차갑게 식어버린 몸. 이번 여행에서 가장 위험한 밤이 깊어가고 있다.
자투리 여행정보 13. 방수 배낭
바이크 여행뿐만 아니라, 자전거 여행이나 배낭이 필요한 장기 여행을 한다면 방수기능이 있는 배낭은 필수다. 방수기능이 없는 배낭을 가지고 여행을 하다가 장대비를 만나면 옷 등이 물에 젖는 것은 물론, 카메라나 핸드폰, 노트북 등 전자기기가 고장 날 수 있다.
방수커버를 씌우는 방법도 있지만, 비가 많이 내리거나 장시간 내리면 방수커버 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그런데 편히 멜 수 있고 방수기능까지 있는 배낭은 굉장히 비싸다. 용량이 좀 크고 방수가 되는 배낭은 수 십 만원을 하고, 100만원이 넘기도 한다. 배낭을 메고 다니는 여행이 아니었기에, 나는 고무재질로 된 커다란 원통형 배낭을 선택했다. 20만원 대로 구입했는데, 고무재질의 배낭은 방수기능은 좋다.
바이크나 자전거 여행 등 외부에서 장시간 있어야하고, 비를 피할 수 없는 여행을 할 땐 가격 대비 쓸 만하다. 하지만 주머니나 칸이 나뉘어있지 않고 중심을 잘 잡아주지 못해 메고 다니기엔 불편하다.
김강현은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현장실습으로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인천대학교에 입학해 2015년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2016년 7월부터 2017년 5월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지금은 <인천투데이>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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