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에 있는 두 국가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땅

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4. "나는 내가 자랑스러워"

첫 날부터 고생을 진탕 해서인지 낯선 곳인데도 아주 깊은 잠을 자고 점심 시간이 다 돼서 겨우 일어났다. 대충 씻고,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와 식량을 사기 위해 근처 마트에 들렀다. 빵과 음료수, 물 등을 가지고 다니면서 요기할 수 있는 음식을 산 후 근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일행들과 앉아 늦은 아침을 먹었다.

한참 먹고 있는데, 노인이 마트에 들어갔다 오더니 담배 한 갑씩을 건넸다. “젊은 친구들한테 자꾸 짐만 되는 것 같아서…” 하시며 한국에서 가져온 졸음 방지용 껌도 하나씩 주셨다.

노인의 바이크 라이딩을 보면 걱정 되는 게 사실이다. 어제처럼 진흙길에서 천천히 가다가 다치지 않고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는 것쯤이야 얼마든 할 수 있지만, 큰 도로에서 빠른 속도로 달릴 때 노인의 라이딩은 너무 위험해보였다.

중앙선을 넘거나 도로 갓길로 빠져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가 달리는 도로는 큰 도시를 잇는 유일한 도로여서 화물차도 굉장히 많은데, 화물차가 옆을 지나쳐갈 때면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렸다. 이러다가 정말 큰일이 나는 건 아닌가 하는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던 터라 불안했다. 그래도 그와 함께하는 라이딩은 즐거웠다.

잠깐 쉴 때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베트남전에 파병 갔던 사진을 보여준다던가, 경찰 시절 선글라스를 쓰고 바이크를 타는 사진을 보여주며 그 때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전남 곡성에 있다는 손수 지은 집 사진과 아들ㆍ딸에 이어 손자ㆍ손녀 사진까지 보여주고, 군대를 다녀온 뒤 경찰 생활을 하다가 결혼하고, 자녀들이 결혼하고 경찰에서 은퇴해 손자ㆍ손녀들 과자라도 사주겠다며 택시 운전을 한 것까지,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때는 한 사람의 인생이 내안으로 차곡차곡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20대인 나도 결심하기 힘든 여행을, 칠순이 넘은 나이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를  존경했다. 내가 저 나이가 된다면, 내 아이들이 중년이 되고 내 손자ㆍ손녀가 성인이 될 때 쯤 나는 어떤 고민을 하고 살고 있을지, 어떤 모습으로 살지 궁금했다. 그의 존재는 지금까지는 해보지 못한 고민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강한 햇빛을 막아주는 나무 그늘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노인이 준  껌을 주머니 깊숙한 곳에 찔러 넣은 뒤 출발했다.

▲ 이동하다가 잠시 쉴 때 찍은 러시아의 길.

러시아의 바이크 라이딩 문화

끝이 없을 것처럼 길게 늘어진 도로를 달렸다. 달리다 가끔 만나는 라이더들이 우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러시아에서 바이크 라이딩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듯 했다. 라이더들은 다른 바이크가 지나갈 때마다 엄지를 세워 서로 인사한다. 시내에서도 바이크를 위험하게 운전하는 걸 본 적이 없고, 자동차 운전자도 뒤에서 바이크가 달려오면 먼저 가라고 손짓하며 양보한다.

한국에선 바이크를 ‘도로 위 천덕꾸러기’ 정도로 여기지만, 러시아에선 ‘멋진 취미생활’로 여기는 듯했다. 바이크나 자동차 운전자한테서 인사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같은 취미를 갖고 있는 라이더로서 인정받는 기분이라, 헬멧 안으로 웃음을 짓기도 했다.

한참을 달리다가 주유를 하기 위해 길가 외딴 주유소에 들렀다. 주유를 하고 나서 주유소 언저리로 나와 잠시 쉬고 있는데, 윗옷을 벗어재낀 트럭 운전자가 차에서 내려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반바지만 걸친 커다란 덩치의 무섭게 생긴 사람이라 조금 겁을 먹고 있었는데, 자신도 라이더라며 반가워했다.

▲ 주유소에서 만난 러시아 라이더. 효도르 같은 얼굴에, 옷도 제대로 안 입고 있는 그가 다가올 때는 나도 모르게 움츠러 들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단어는 세 가지뿐이었다. 까레이스키(한국인), 모또찌끌(모터사이클), 뚜리스뜨(여행자)’. 이 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는 우리의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그리고 자신의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바이크는 일본제 크루져 바이크였는데, 사진으로 보기에도 10년은 족히 돼보였다. 그 바이크를 처음부터 탔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애정이 담겨 있을까. 그에게 바이크는 이동수단 이상의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참 얘기한 그를 보내고 다시 길을 달렸다. 맑은 날씨와 뜨거운 햇빛, 바이크의 진동과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나오는 잔잔한 음악. 바이크 위에선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보낼 수 있었다.

달리고 있으면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지난 시간들이 갑자기 기억나기도 하고, 불확실한 앞으로 삶이 걱정되기도 한다.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둬야 하는 것일까, 하는 답이 없는 고민들을 계속 하고, 그러다 ‘이 여행이 답을 줄 거야. 곧 답을 찾을 수 있겠지’ 하며 생각 멈추기를 반복했다.

▲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의 길과 소녀상

오후가 되자 잠이 쏟아졌다. 잠에서 깨기 위해 대중가요뿐만 아니라 민중가요, 군가 등을 소리 높여 불러보지만, 그래도 한번 쏟아지기 시작한 잠은 달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바이크를 세우고 잠시 쉬기로 했다. 갓길에 바이크를 세워두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음료수와 아침에 사둔 빵을 먹고, 주머니 깊은 곳에 넣어둔 졸음 방지용 껌도 씹었다.

다시 만난 오프로드

잠을 쫓고 나서 바이크에 다시 올랐다. 계속해서 달리다보니 어느덧 풍경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경까지 왔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멍하니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도로가 없어지더니 오프로드가 나왔다. 최고 속도로 달리지는 않았지만 속도가 제법 있었던 터라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비틀거리며 속도를 겨우 줄이고 있는데, 내 뒤를 따라오던 노인이 빠른 속도로 나를 지나쳐 갔다. 순간 ‘아 큰일 났다’ 하는 생각을 했는데, ABS(Anti-lock Brake System) 시스템을 갖춘 그의 고급 바이크는 안정감 있게 속도가 줄어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시속 20~30Km를 유지하며 천천히 달렸다. 전날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어서 겁을 먹었지만, 길이 다 말라있어서 별문제 없이 오프로드를 빠져 나왔다. 도로가 나오자 다시 속도를 올려, 한참을 달리다 오후가 돼서 하바롭스크에 도착했다.

▲ 오프로드를 빠져나와 계속 달리다가 하바롭스크 레닌광장에 도착했다.

여행에서의 첫 캠핑

하바롭스크는 러시아 동부에서 제법 규모가 큰 도시다. 도시 중앙에는 넓은 공원과 레닌광장도 있다. 한참을 빠르게 달려온 우리는 공원에서 잠시 멈췄다. 한 낮 온기가 조금 남아있는 시간, 연못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는 리트리버와 산책을 나온 가족들을 보며 잠깐의 여유를 즐겼다.

잠시 쉬고 있을 때 일행 중 한 명이 전날 헤어진 중년의 형님들과 연락이 닿았다. 노인과 함께 한 우리가 천천히 달려왔기 때문인지, 그들은 벌써 하바롭스크에서 숙소를 잡고 있다고 했다.

좌표를 받아 그들이 있는 숙소로 이동했다. 30분 쯤 달려 좌표가 표시하는 곳까지 왔는데, 낡은 아파트 단지가 있을 뿐 숙소는 보이지 않았다. 형님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만남을 포기하고 시내로 나와 게스트하우스를 찾기 시작했다.

숙박업소를 안내해주는 어플리케이션으로 좌표를 확인하고 이동했는데, 빈 건물만 덩그러니 있다. 다른 숙소를 급하게 찾아봤지만, 어플리케이션에 있는 정보가 계속 맞지 않아 몇 곳을 더 찾다가 해가 저물었다. 이대로 도시를 벗어나 캠핑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먼저 숙소를 잡고 있던 형님들과 연락이 닿아, 다시 그곳으로 이동했다.

어두운 밤이어서 한참을 헤매다 마중 나온 형님들과 만났다. 방을 잡으려했는데, 남은 방이 없단다. 열시가 가까운 시간에 다른 방을 구할 수도 없을 것 같아 캠핑하기로 했다.

숙소 건물 옆에 있는 숲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그라피티(graffiti)가 마구 그려져 있는 시멘트 담벼락이 나왔다. 담벼락 위로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는데, 아마 사유지인 듯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판이 붙어있었다. 바닥에 술병과 담배꽁초, 쓰레기가 어지럽게 나뒹구는 곳이어서 불안했지만,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볼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너무 힘들기도 해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 그라피티와 술병, 담배꽁초가 가득한 곳에서 한 첫 캠핑. '라면죽'과 보드카가 함께 했다.

바이크를 숙소에 딸린 주차장에 안전하게 세워두고 캠핑 장비를 짊어지고 와 텐트를 쳤다. 텐트 안에 짐 가방을 넣은 후 버너와 코펠을 꺼내 내가 가져온 쌀을 넣고 ‘라면죽’을 끓였다. 노인은 아침에 마트에서 사온 보드카를 꺼내 한 잔씩 건넸다.

노인은 다음날 왔던 길을 따라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체력이 너무 떨어져 남은 여행을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아 내린 결정이라고 덧붙였다. 큰 사고가 나기 전에 돌아가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여행을 결심하며 어떤 걱정을 했고 어떤 설렘이 있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아쉬움도 컸다.

노인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우리는 한국에 돌아가면 꼭 연락을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하고 그의 술잔을 받았다. 노인은 술을 한 잔씩 따라주며 말했다.

“이 나이 먹고 내 발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게 어디야. 나는 내가 자랑스러워”
(다음호에 계속)
 

자투리 여행정보 - 04 : 하바롭스크

▲ 러시아 정교회 <사진출처 픽사베이>


하바롭스크는 극동러시아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다. ‘만주’로 불리는 중국 북동지역과 맞닿아있어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영토분쟁이 많았던 지역이기도 하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가로수길ㆍ레닌광장ㆍ중앙시장ㆍ명예광장ㆍ콤소몰광장ㆍ하바롭스크 향토박물관ㆍ아무르강 등 관광지도 많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한 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하바롭스크까지 가는 관광객이 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횡단열차를 타면 12시간 정도 걸리는데, 침대가 있는 열차를 운행하고  있어 편히 쉬면서 갈 수 있다. 열차 가격은 환율 등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한화 1만원 후반 대부터 시작한다.

하바롭스크에 있는 아무르강 근처에는 조선의 여성 사회주의운동가인 김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1885~1918)의 처형 장소가 있다. 함경도 출신인 그녀의 부모가 극동시베리아로 이주했고, 그녀는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뜻을 같이하며 볼셰비키당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으로 활동하다 이동휘ㆍ김립 등 조선의 독립운동가들과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동맹을 만들었다. 이후 레닌과 대립하던 멘셰비키파와 일본군에 잡혀 아무르강에서 처형됐는데, 처형당하기 전 한반도의 열세 개 도(道)를 상징하는 열세 발자국 걸었다고 전해진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 <인천투데이> 김강현 기자

김강현은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현장실습으로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인천대학교에 입학해 2015년 총학생회장을 역임했다. 2016년 7월부터 2017년 5월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지금은 <인천투데이>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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