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에 있는 두 국가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땅

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20. 쁘리비엣(안녕)! 이르쿠츠크

러시아 홍차 ‘쵸르니 차이’로 맞는 아침

고려인 김안드레아 할머니가 주신 술을 병째 들고 홀짝홀짝 마시며 숙소로 돌아왔다. 주황색 낡은 전구가 매달려있는 숙소는 굉장히 따뜻하고 안락한 느낌이다. 거실을 우리에게 내어준 숙소 주인은 집에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소파에 앉아 지지직거리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러시아 드라마를 보며 남은 술을 마저 마신다.

조용히 쉬는 게 꽤 오랜만이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은 금세 노곤해진다. 다른 손님들은 이미 2층에 방으로 다 들어간 상태. 거실 구석에 자리를 피고 배낭에서 침낭을 꺼낸 후 바이크 재킷을 베개 삼아 누웠다.

오랜만에 느낀 따뜻한 기분에 금세 잠들었나 보다. 사람들이 내려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이른 아침이다. 다른 일행들은 아직 방에서 더 자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주방에서 홍차와 식빵 한 조각을 들고 앞마당으로 나왔다.

숙소 앞마당. 직접 만든 벤치가 있다.

러시아어로는 ‘쵸르니 차이’라고 부르는 이 홍차는 러시아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살 정도로 많이 마시는 차다. 식당에 가면 음식과 함께 주문하고, 게스트하우스에서도, 캠핑장에서도 모두 들고 다니며 마신다.

그냥 뜨거운 물에 티백을 담구고 설탕을 잔뜩 넣어 먹기도 하고, 우유를 넣고 끓여 먹기도 한다.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연유를 넣어 먹기도 한다.

한국에서 먹는 홍차보다 맛이 상당히 진하고 향도 좋다. 큰 머그컵에 티백 하나를 넣어 우려내도 맛이 연해지지 않을 정도다.

숙소 앞마당 벤치에 않아 새 소리를 들으며 식빵과 홍차로 아침을 대신한다. 8월, 한여름이긴 하지만 러시아의 기온은 한국보다 낮다. 낮에는 꽤 덥지만 밤이나 이른 아침에는 쌀쌀할 정도여서, 따뜻한 홍차를 두 손으로 감싸고 마신다. 

잠시 후 일행들이 방에서 내려왔다. 그들도 곧장 주방으로 가 식빵을 들고 나왔다. 딱 네 명이 앉기 좋은 테이블은 마치 우리를 위해 만들어놓은 듯하다.

이슬이 맺힌 잔디 위에서 식사를 마치고 오늘 하루는 무엇을 하면서 보낼지 고민했다. 일단, 바이크는 이틀은 더 있어야 화물회사에 도착한다. 지금 당장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이다. 주변을 돌아다니며 지난밤에 보지 못한 시장을 가보기로 했다.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숙소 주인이 들어오더니 위층에 자리가 났다며 안내해주겠단다. 따라 위로 올라가니 4인실 두 개와 2인실 하나, 화장실 겸 욕실이 있다. 러시아에서 묵었던 숙소 중 가장 깔끔해 보인다.

일행들이 쓰고 있는 4인실에 자리 두 개가 나서 그 방을 몰아서 함께 쓰기로 했다. 이층침대 두 개가 있는 작은 방 하나를 통째로 쓰는 것이다. 게스트하우스 가격으로 네 명이 독립된 공간을 쓴다는 게 큰 장점이다.

샤슬릭과 뽈룹, 1만원의 행복

1층에서 잘 때 사람들이 신경 쓰여 꽁꽁 묶어뒀던 짐을 다 풀고 간단하게 샤워한 후 밖으로 나왔다. 해가 쨍하지만 그다지 덥지는 않다. 바람도 선선하고 습기도 없어서 그늘 아래 있으면 조금 흐른 땀도 금방 마른다.

현금이 다 떨어져 우선 은행에 들러 현금을 찾았다. 그리고 곧장 전날 갔던 시장 쪽을 향했다. 시장은 옷이나 군화 등을 파는 곳부터 잡화를 파는 곳, 채소나 고기 등 식품들을 파는 곳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넓다.

이르쿠츠크 시장에서 옷을 팔고있는 상점

한국에서 신고 온 부츠가 벌써 너덜너덜해졌기에 튼튼하고 편한 부츠를 하나 살까 싶어, 옷을 파는 곳으로 먼저 갔다. 각종 브랜드 상표가 붙은 옷들도 팔고 있었는데, 디자인이 별로여서 살만한 게 없다.

대신 군복 등 군용품들은 쓸 만한 게 굉장히 많은데, 군용 텐트, 워커, 모포 등 캠핑할 때나 여행하면서 사용할만한 물건이 많다. 군용품이라 그런지 재질도 튼튼해 오래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남은 돈을 생각하며 참기로 했다.

옷가게들을 지나니 사거리가 있는 도로가 나왔다. 길 건너편에는 분수대가 있는 그리 넓지 않은 광장이 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

광장 쪽으로 길을 건너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한 쪽에서 화로를 밖에 꺼내두고 샤슬릭을 굽고 있다. 길이가 2미터는 족히 돼 보이는 얇고 긴 화로에는 자작나무 숯이 가득하고, 그 위로 닭고기, 소고기, 양고기 등이 노릇하게 익고 있다.

조금 더 가까이 가보니 고기에서 떨어지는 기름으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아침에 식빵을 먹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먹음직한 모습에 홀린 듯 식당으로 들어갔다.

규모가 꽤 큰 식당인데, 음식을 주문하고 밖으로 나와 분수대가 보이는 곳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음식을 잔뜩 시키고, 콜라를 큰 거로 한 병 사서 밖으로 나와 자리를 잡았다. 작은 분수대에서 물을 뿌리고 있고, 파라솔 그늘이 있기에 그리 덥지 않다. 바닥에는 비둘기들이 빵조각을 먹기 위해 분주하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닭고기, 양고기, 소고기 샤슬릭과 러시아 볶음밥인 뽈룹이  테이블 위에 잔뜩 펼쳐졌다.

샤슬릭은 정말 몇 번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다. 자작나무 숯 향이 은은하게 배어있는 샤슬릭을 입안에 한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오후, 와글거리는 낯선 언어의 웅성거림과 분수대의 물소리, 선선한 바람, 그리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사람들.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 밀려온다.

네 명이서 1만원이 채 안 되는 돈으로 점심식사를 끝냈다. 러시아의 물가가 저렴해서 이런 사치를 부려도 부담되지 않는다. 입가심으로 시원한 콜라까지 한잔 들이키고 잠시 앉아서 쉬다가 줄을 서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얼른 자리를 비켜줬다.

광장과 동상들, 그리고 ‘영원의 불꽃’

방향과 목적이 없는 여행이기에, 식당을 나와서는 그냥 정처 없이 길을 걸었다. 도시 곳곳에 광장이 있고 각종 동상이 있다.

이르쿠츠크의 상징인 전설의 동물 바브르

족제비같이 생긴 동물 동상도 몇 개 있었는데, 이르쿠츠크의 상징인 전설의 동물 ‘바브르’라고 한다. 몇 세기 전 근처에 서식하던 호랑이를 상징하려했으나 실수로 비버의 꼬리를 그리면서 탄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단다.

점점 도시에 흥미가 생긴다. 지난밤에 봤던 도시가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었다면, 중심부로 올수록 세련되고 깨끗한 느낌이다.

이르쿠츠크 중앙을 지나는 안가라강을 따라 펼쳐진 산책로

조금 더 걸으니 안가라 강이다. 강줄기 수십 개가 흘러드는 바이칼 호수에서 유일하게 뻗어 나온다는 강. 강 주위로는 산책로가 잘 돼있고, 광장과 음식을 파는 트럭, 아이들의 놀이시설 등도 있다.

광장에 있는 사람들은 치타에서처럼 흘러나오는 노래에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춤을 추기도 한다. 원래 아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함께 춤을 추는 듯하다. 한참 춤을 추고 있던 젊은 여성은 지나가던 아저씨 손을 이끌고 함께 춤을 추다가 가벼운 인사를 하고는 또 다른 사람과 춤을 추기도 한다.

안가라강가에 있는 광장의 모습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강가에 앉아 먹었다. 주변으로 조금 더 이동하니 ‘영원의 불꽃’도 있고, 성당 등 건물도 많이 보인다.

체리 가게 아줌마 죄송해요

도시를 돌아보고 나서 숙소로 가던 중, 채소 등 먹거리를 파는 시장에 들렀다. 여행하면서 먹은 음식은 대부분 라면과 햄 등 인스턴트 가공식품이었고, 가끔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육류 위주로 먹었기 때문에,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시장에서 과일을 팔고있는 상인들. 신선하고 먹음직한 과일들이 잔뜩 쌓여있어서 근처를 지나가면 싱그럽고 달콤한 냄새가 난다.

체리를 팔고 있는 아줌마에게 다가가 한 개만 먹어봐도 되냐고 허락을 받은 후 하나를 입에 넣었는데, 이렇게 맛있을 수는 없다. 춤이 절로 나올 정도다. ‘최고로 좋다’를 러시아 친구 루슬란이 가르쳐준 러시아 말로 아무머니에게 건네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그런데 우리를 보고 웃던 아줌마 표정이 싹 굳어버렸다. 순간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았다. 루슬란이 우리에게 욕을 알려준 것이다.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러시아 말을 하지 못하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자리를 황급히 떠났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러시아에서 가장 심한 욕 중 하나로, 특히 여성에게 절대로 쓰면 안 된다는 욕이다. 루슬란 이 나쁜 놈!

잠시 진정한 후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시장을 더 돌아다녔다. 오늘은 과일과 채소를 듬뿍 먹기로 하고 샐러드 재료와 빵, 훈제 햄을 사서 숙소로 들어갔다.

자투리 여행정보 20. 영원의 불꽃

이르쿠츠크 영원의 불꽃

‘영원의 불꽃’은 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러시아 곳곳에 설치한 불꽃인데, 꺼트리지 않는다.

이르쿠츠크까지 오면서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치타 등 조금 규모가 있는 도시에는 모두 설치돼있는 것을 봤다.

별 모양으로 된 구조물 가운데 가스 불꽃이 타오른다. 가끔 관리 실수로 꺼지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비가 오거나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꺼트리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이 노력한단다.

전쟁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러시아의 정책과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내는 조형물인 듯하다. 

인천투데이 김강현기자

 

김강현은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현장실습으로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인천대학교에 입학해 2015년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2016년 7월부터 2017년 5월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지금은 <인천투데이>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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