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에 있는 두 국가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땅

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23. 시베리아의 푸른 눈 ‘바이칼 호수’

텐덤으로 300km

이르쿠츠크의 여유로운 나날들을 뒤로하고 바이칼 호수 안에 있는 섬 ‘알혼’으로 떠난다. 어디론가 떠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이번에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떠난다는 게 아쉽지도 않고 마냥 좋다.

내가 같이 타고갈 일행의 짐을 최소화 해 다른 일행들에게 나눠싣고 가기로 했다. 텐덤(한 바이크에 두 명이 타는 것)으로 이르쿠츠크에서 알혼까지 가게 될 줄이야. 거리는 300km가 조금 안 되는데, 그동안 매일 수백km씩 이동했더니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안 그래도 자리가 좁은 바이크에 가방을 매고 뒤에 타는 게 불편하긴 했지만, 길도 잘 포장된 도로고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없었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 호수로 향하는 길에 펼쳐진 초원.

알혼을 가는 길에서 본 러시아는 지금까지 봐온 모습과는 또 다르다. 가장 재밌는 건 방목하고 있는 가축들이다. 이전에도 소나 양들을 보긴 했지만, 그건 몇몇 집에서 앞마당에 풀어 둔 느낌이었다. 그런데 알혼을 가는 길에선 유목민족의 마을인 것처럼 건물은 보이지도 않는데 소, 염소, 양, 닭, 돼지 등 온갖 가축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바이크 뒷자리에 타고 가니 운전하는 재미는 없지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길가 식당 앞마당에서 뛰노는 고양이까지 볼 수 있을 정도다.

길가에서 만난 고양이.

와! 바이칼

한동안은 길 주변으로 우거진 숲이 나오더니 어느 순간 넓은 초원이 나온다. 초원을 따라 직진하다가 우회전해 다시 숲을 뚫고 나간다. 언덕이 나오는가 하더니 잠시 후 길게 이어진 내리막길 저 멀리로 작은 마을이 있고, 그 끝에 바다처럼 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다. 바로 바이칼이다.

언덕 위에서 바라본 바이칼 호수.

‘와’ 하는 탄성이 헬멧 안에서 흘러나온다. 이르쿠츠크로 오는 기차 안에서 봤던 바이칼의 모습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답다. 엄지발가락부터 정수리까지 온몸이 저릿하다.

마치 철퇴를 들고 말을 타는 병사들처럼 우리는 바이크 위에서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질러댔다. ‘아마 죽는 날까지 이 순간을 잊지 못하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분이라도 더 빨리 알혼에 가고 싶었기에 선착장을 향해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린다.
호수가 보이는 내리막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다가 호수 바로 앞에서 길을 꺾어 언덕을 오른다. 주변으로 인적이 보이지 않는 길. 산에 길을 낸 듯 오르막과 커브가 연달아 나온다.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달려 산 정상 부근에서 잠시 바이크를 세웠다. 8월 중순인데도 날씨가 제법 쌀쌀해 재킷을 꺼내 입고 길가로 가보니, 가지가 앙상하게 남아있는 나무에 고향 강원도의 서낭당에서 봤던 것 같은 색색의 헝겊들이 묶여 있고 돌탑도 있다.

바이칼 호수 주변 산 위에서 우리나라 서낭당과 비슷한 곳을 만났다.

우리 민족의 기원이 바이칼 호수라는 설이 있다. 구석기시대 바이칼 호수 인근에서 머물던 사람들이 해빙기에 홍수가 나자 남하해 한반도 일원까지 왔다는 것이다.

이쪽 지역과 몽골에 살고 있는 부랴트인, 그리고 한민족이 유전적으로 거의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생김새 또한 서로 굉장히 비슷하다. 어쩌면 아주 오랜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살았을 땅을 바라보다 알혼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 위해 이동했다.

러시아의 바이크 배려

잠시 후 선착장에 도착했다. 승선하려는 사람들과 자동차가 길게 늘어져있다. 오늘 안에 배를 타지 못할 정도로 사람이 많다. 여름휴가 기간과 겹쳐서인가 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에게 차들이 서있는 갓길로 나오라고 손짓한다. 바이크는 대기를 안 해도 된단다. 그냥 갓길로 가서 맨 앞에 서서 바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편리할 수가. 자동차 한 대 들어갈 자리에 바이크 두세 대가 들어가기에 먼저 보내주는 것이다. 스쳐지나가는 자동차 안에서도 우리가 먼저 가는 게 당연하다는 듯 손을 흔든다. 한국에선 받아본 적 없는 바이크에 대한 배려다.

사실 한국에서 바이크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심지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게 바이크의 고속도로 진입을 전면 제한하고 있다.

우리나라 도로교통법엔 ‘자동차(이륜자동차는 긴급자동차만 해당한다) 외의 차마 운전자 또는 보행자는 고속도로 등을 통행하거나 횡단해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돼있다. 이뿐만 아니라 국도 곳곳에도 ‘자동차 전용도로’라며 바이크 진입을 금지하고 있다.

자동차처럼 보험에 가입하고 세금을 내고 타는데 이게 무슨 비상식적 법이란 말인가. 부당한 차별이지만 바이크를 타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이 ‘바이크는 위험해, 바이크 때문에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해’ 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바이크를 타는 사람들이 교통법규를 지키고 안전하게 운전해야하지만, 일부가 그렇지 않다고 해서 무작정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도로 진입을 아예 제한하는 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과 같다. 

러시아에서 이런 배려를 받으니 그동안 한국에서 바이크를 타며 불편을 겪은 것들이 더 억울하게 다가온다.

바이칼을 건너 알혼으로

선착장 맨 앞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배가 들어온다. 일행들과 함께 바이크를 싣고 갑판 위로 올랐다. 알혼은 배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육안으로도 보인다.

‘그냥 잠깐 가면 되겠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뱃고동 소리와 함께 배가 출발하니  마음이 설렌다. 동해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배를 타고 가던 그 순간처럼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잔잔하고 한없이 깊어 보이는 푸른 호수에 붉은 노을이 비친다. 여행하며 본 모든 곳이 새롭고 신기하고 아름다웠지만 바이칼 호수는 정말 최고로 아름답다.

선착장에서 알혼으로 들어가는 배 위에서 본 바이칼 호수. 노을이 비치는 바이칼 호수는 매우 아름다웠다.

배는 곧 알혼에 다다랐고 탈 때처럼 바이크 먼저 내리게 해줘 가장 먼저 알혼 땅을 밟았다. 이르쿠츠크에서 선착장에 올 때까지는 모두 포장도로여서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알혼 은 모두 비포장도로다. 텐덤을 하고 오프로드를 가야하는데 어둑해지기 시작한다. 선착장에서 얼른 벗어나 호숫가로 가기로 했다.

선착장에서 출방한 배는 곧 알혼섬에 다다랐다.

선착장 주변 길은 오프로드긴 하지만 단단해서 진동이 심할 뿐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니 모랫길이다. 바이크가 미끄러지며 좌우로 휘청거린다. 앞서 나가던 일행은 중심을 못 잡고 넘어지기도 했다. 다행히 바닥이 푹신해 크게 다치진 않았다.

하지만 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해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하고 초원으로 들어가서 텐트를 쳤다. 짐을 정리하고 나니 허기가 몰려온다. 아침에 숙소에서 빵을 먹고 나온 것 말고는 음식을 별로 먹지 못했다.

소똥은 훌륭한 땔감이다

랜턴을 켜 주변을 보니 나무 한 그루 없는 초원이다. 땔감을 구할 수 없어 그냥 버너로 밥만 해먹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소똥이 보인다.

잘 마른 소똥은 연료로 쓰인다고 했다. 그늘이 없는 초원이어서인지 굳은 진흙처럼 잘 말랐다. 불을 한번 붙여봤더니 생각보다 훨씬 더 잘 탄다. 이거다 싶어 소똥을 모으기로 했다. 잠시 후 소똥을 몇 덩어리씩 들고 자리에 모여 마른 풀과 함께 불을 붙였다.

나무조각 하나 찾기 힘든 드넓은 초원에는 잘 마른 소똥이 곳곳에 있었다.

풀이 먼저 ‘화르륵’ 타오르고 이내 은은하게 소똥에 불이 붙는다. 마치 숯에 불을 피운 것처럼 냄새도 별로 나지 않는다. 약초 타는 것 같은 냄새가 날 뿐 전혀 역하지 않다.

불이 완전히 붙을 때까지 옆에서 바람을 불어주다가 배낭에서 쌀과 물, 코펠을 꺼내 밥을 짓기 시작했다. 숯불처럼 은은하게 타오르는 소똥불은 밥을 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코펠을 불 위에 받쳐 둘 돌이 없다. 처음엔 장갑을 끼고 코펠을 들고 있었지만 너무 뜨거워 오래 들고 있을 수 없었다.

주변 소똥을 모아 피운 불.

아쉽지만 버너를 꺼내 밥을 짓고, 짜장 가루를 뿌려 짜장밥을 만들었다. 채소도 고기도 들어가지 않은 짜장 가루와 밥만 있는 짜장밥이었지만 캄캄한 밤, 드넓은 초원, 따뜻한 소똥불 옆에서 먹는 그 맛은 엄지를 자동으로 추켜세우게 했다. 

배가 고파 코펠에 가득 차도록 짜장밥을 만들어 먹었다.

날씨가 맑아 하늘에는 은하수가 떠있다. 밥을 다 먹고 음악을 잔잔하게 틀어 놓은 후 초원에 드러누워 한참동안 은하수를 보다가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에 텐트로 들어가 침낭 속에서 스르르 잠들었다.

자투리 여행정보 23 - 바이칼 호수

 

시베리아 남동쪽에 있는 바이칼 호수는 2500만년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이며, 수심 1742m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다. 저수량은 2만 2000㎦로 전 세계 담수호 가운데 최대 규모로, 세계의 얼지 않는 담수량의 20%, 러시아 전체 담수량의 90%를 차지한다.

이밖에도 면적 3만 1500㎢, 남북 길이 636km, 최장 너비 79km, 최단 너비 27km, 둘레 2200km에 이르는 거대한 호수다. 물이 맑아 물밑 가시거리가 최고 40.5m에 이른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와 고립된 위치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고 다양한 담수 동물상을 보여주는데, 식물 1080여종과 동물 1550여종이 살고, 이 가운데 80% 이상은 이곳에만 있는 고유종이라고 한다.

각종 ‘세계 제일’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바이칼 호수는 내가 다녀본 여행지 중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시베리아의 푸른 눈’, ‘시베리아의 진주’ 등 여러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한데, 직접 본다면 그 아름다운 광경에 흠뻑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천투데이 김강현기자

 

김강현은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현장실습으로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인천대학교에 입학해 2015년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2016년 7월부터 2017년 5월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지금은 <인천투데이>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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