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 여행정보 48. 카자흐스탄의 발하쉬 호수
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48. 발하쉬 호수와 소금사막
‘카라간다’로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에 있는 일본대사관에서 소녀상과 피켓을 들은 뒤 다시 남쪽을 향한다. 대략적 목적지는 약 300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카라간다라는 도시지만, 여의치 않으면 캠핑할 생각으로 출발한다.
부슬비가 조금씩 내리는 바람에 우비를 껴입었는데 곧 날씨가 맑아진다. 맑고 춥지 않은 날씨, 바이크를 타기에 최고다.
아스타나 일대 도로는 정말 깨끗하더니 조금 달려 나오자 곳곳이 깨진 도로가 이어진다. 옛 소비에트연방 이후에 도로 정비를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일부 도로는 아예 진흙길이다.
별안간 다시 야생으로 내몰린 기분이다. 내몰린 게 아니라 내가 뛰어 들어왔지만. 진흙이 신발에 튀고, 포트홀[냄비(Pot)처럼 생긴 구멍(Hole)이 파인 곳] 을 밝아 ‘쿵’ 하는 진동이 핸들을 통해 손목에 전달된다. 불편하고 위험하지만 조금만 더 견디면 그 불편함이 새로운 자극이 되고, 위험이 스릴이 된다.
강한 바람과 맞서 한참을 달려 카라간다에 도착했다. 카자흐스탄 중부에 위치한 카라간다는 국제공항도 있을 만큼 규모가 큰 도시다.
여유 있게 도시를 관광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시간이 너무 늦었다. 미리 찾아둔 호스텔에 들어가 짐을 풀고 숙소 앞 마켓에서 맥주와 소시지 등을 사와서 먹은 후 곧바로 잠들었다.
또 바이크 고장
어제 일찍 자서인지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났다. 밀린 일기를 쓰며 친구가 일어나길 기다려 함께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그러나 평화로운 출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친구 바이크 타이어에 공기가 빠진다. 물을 뿌리며 펑크 난 곳을 확인해보니 무언가를 밟아서 뚫린 게 아니라 휠이 충격을 받아 안으로 휘어지며 타이어와 이격이 생겼다.
펑크가 났다면 때우면 되지만, 이런 경우엔 직접 수리하기 어렵다. 결국 지도를 보고 가장 가까운 마을인 발하쉬로 향했다.
발하쉬 마을에 겨우 도착했지만 괜히 운전하다가 아직 멀쩡한 타이어까지 망가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친구에게 한 곳에서 기다리라고 한 후 내가 수리점을 찾아 나섰다. 몇 군데를 찾아 친구 바이크를 천천히 끌고 들어갔지만 모두 자동차 수리점이라 바이크는 수리하지 않는단다. 이 마을에서 수리하지 못하면 더 이상 갈 수 없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가로수 그늘 아래에서 고민하다가 다시 다른 수리점 찾기를 반복했다. 결국 바이크 수리점이 아니라 타이어 수리점을 찾아 들어갔다. 청년 수리공은 처음에는 자동차 타이어만 수리한다며 거부했지만, 절박한 우리의 청원에 결국 수리 해주기로 했다.
휠을 교체해야하는 상황인데 맞는 휠이 없단다. 대신 바이크 용품점이 있다며 지도를 그려준다. 내 바이크에 친구와 함께 타고 그가 그려준 지도를 따라 용품점에 갔다. 그러나 친구의 바이크에 맞는 부품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휘어진 휠을 망치로 때려가며 수리했다. 다행히 한동안은 괜찮을 정도가 됐다.
작은 일이지만 여행을 더 이상 하지 못할 수도 있을만한 사건이 잊을 만하면 벌어진다. 대부분 생각보다 쉽게 해결된 게 다행이다.
큰일을 치른 기념으로 발하쉬에서 하루를 더 보내기로 했다. 둘이 쓸 수 있는 적당한 가격의 숙소를 잡은 후 카자흐스탄 코냑(cognac)으로 힘든 하루를 마무리했다.
발하쉬 호수
다음날, 잠이 약간 덜 깬 상태로 바이크를 한참 운전하다 보니 옆으로 큰 호수가 보인다. 바이칼을 처음 봤을 때처럼 호수가 아니라 바다로 착각할 정도로 크다. 바로 카자흐스탄 제1의 호수인 발하쉬(валхаш) 호수다.
바이칼의 투명한 색과는 다르게 발하쉬는 군 입대 전 제주도 여행에서 본 에메랄드 색이다. 카라간다는 관광하지 못했지만, 이런 멋진 호수를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면 여행자가 아니다. 바이크를 샛길로 몰아 호숫가로 향했다.
가까이서 본 호수는 더없이 아름답다. 익숙한 바다 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우고 파도소리까지 더해지니 이곳이 바다인지 호수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하도 실감나지 않아 호수 물을 떠먹어 본 후에야 바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바다가 없는 카자흐스탄이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가 있어서 별로 아쉽지는 않을 것 같다.
이곳에서 캠핑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지만 출발한 지 50km도 안 돼 자리를 잡기에는 조금 이르다. 지도를 보니 어차피 앞으로도 한참동안 발하쉬 호수 옆으로 이동해야한다. 조금 더 가서 캠핑하기로 하고 출발했다.
낙타와 소금사막
호수를 끼고 한참을 가니 다시 초원으로 이어진다. 있으나 마나 한 정도로 다 깨진 아스팔트 옆으로 펼쳐진 초원은 몽골의 모습과 비슷하다. 잠시 쉬며 몽골에 가지 않았던 친구에게 ‘몽골에 가면 도로 빼고 딱 이 느낌’이라고 설명해주고 다시 출발했는데, 멀리서 낙타 무리가 보인다. 몽골에서 본 쌍봉낙타다.
몽골에서 하도 많이 봐서 감흥이 별로였지만, 친구는 난리가 났다. 야생 낙타를 처음 본 것이니 그럴 만도 하다. 바이크를 급하게 멈추고 사진 찍기 바쁘다. 기왕 멈춘 김에 미리 사둔 빵과 음료 등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조금 더 쉬다 다시 출발했다.
어느덧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발하쉬 호수에서 캠핑하겠다고 호수 근처로 향했지만 이상하게 길은 호수가 아닌 초원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그래도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가보자는 생각으로 앞으로 나가고 있는데, 옆으로 하얀 초원이 펼쳐진다.
춥지도 않은데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얀 초원. 바이크를 멈추고 가까이서 보니 정말 판타지 세계에 들어온 것처럼 하얀 초원이 노을을 받아 붉게 반짝이는 초원이 펼쳐져 있다.
반짝이는 흰색 결정들. 손가락 끝으로 조금 찍어 먹어보니 짠 맛이 난다. 하얀 결정의 정체는 소금이다.
왜 이곳이 소금사막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먼 옛날 발하쉬 호수가 바다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바다가 없는 카자흐스탄에서 이렇게 소금을 구할 수 있으니, 발하쉬 호수는 카자흐스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자원이다.
어느덧 지평선 아래로 해가 숨기 시작한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지도를 보니 조금만 더 가면 호수 옆에 마을이 있다.
또 위험!
50km 정도를 달려 마을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다. 마을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호수 옆에 텐트를 쳤다. 밤이라 호수가 보이진 않지만 파도 소리가 들리고 수많은 별이 떠 있는 아름다운 곳이 오늘의 캠핑 장소다.
텐트를 치고 안으로 들어가니 밖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나가보니 술에 잔뜩 취한 중년 남성이 우리에게 말을 걸며 내 바이크를 타려한다. 바이크를 건들지 못하게 급하게 떼어냈는데, 그게 그를 자극했는지 목소리가 높아지며 나를 밀친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처음 온 곳,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한 호숫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할 것 같다. 러시아에서 부랑자들에게 둘러싸였을 때와 같은 두려움이 피어오른다.
자투리 여행정보 48. 카자흐스탄의 발하쉬 호수
발하쉬 호수는 현지 발음으로 발카쉬와 발하쉬의 중간 정도 된다. 하지만 ‘발카쉬’라고 발음하는 게 현지인들에게 더 잘 통한다.
세계에서 15번째로 큰 호수로 면적이 1만 6400㎢나 된다. 카자흐스탄 동부에 위치해있으며 유라시아대륙의 정중앙 부근이다.
신기하게도 호수의 서쪽은 담수, 동쪽은 염수가 모여 있어서 이곳에 서식하는 생물이 굉장히 다양하단다.
카자흐스탄에 정말 보물 같은 호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여행하면서 호수 주변 공장 등에서 나오는 매연 등을 보니 안타깝기도 했다. 이 아름다운 호수가 바이칼처럼 잘 보존돼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제 모습 그대로이길 바란다.
김강현은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현장실습으로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인천대학교에 입학해 2015년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2016년 7월부터 2017년 5월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지금은 <인천투데이>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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