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에 있는 두 국가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땅

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25. 삶의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를 기억

텐트 안에 다른 생명체가?

아주 좋은 분위기에서 술을 많이 마셨다. 술이 덜 깬 새벽, 텐트 안에서 들리는 낑낑 소리에 잠에서 깼다.

텐트 안에는 나와 일행 한 명이 자고 있었고, 발밑에서 검은색 강아지가 텐트를 긁고 있는 게 보였다. 지난밤 우리 근처에서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렸던 강아지다.

전에 키웠던 말티즈 ‘두부’의 이름을 따서 검은콩 두부라는 뜻의 ‘검부’라고 부르며 먹이와 물을 준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이 강아지가 왜 텐트 안에서 같이 자고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착하게도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낑낑대며 문을 열어달라고 텐트 벽을 긁고 있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텐트 지퍼를 열어 나갈 수 있게 해줬다.

문이 열리자 곧바로 밖으로 튀어나가더니 오줌을 눈다. 텐트 안에서 일을 보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기고 있는데, 강아지가 뒤를 돌아 나를 한 번 힐끔 보더니 저 멀리로 가버린다.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를 기억

강아지 뒷모습을 바라보다 주변을 둘러보니 새벽안개가 짙다. 어제 저녁을 먹기 시작할 때 내린 보슬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는지, 안개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

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황홀할 수가. 한동안 멍하니 밖을 바라보다 아예 밖으로 나왔다. 촉촉하고 쌀쌀한 공기에 손바닥을 비비며 파도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곧 아무도 없는 백사장과 그 너머 바다처럼 일렁이는 바이칼 호수와 마주했다. 물이 얼마나 차가운지는 들어가 보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숙취는 심하지 않지만 술이 조금 덜 깬 상태에서 백사장에 털썩 주저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여행을 떠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긴 시간일 수 있지만, 돌이켜보면 아주 짧게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평범한 일상을 지겨워하며 살지도 모른다. 이 여행이 내게 준 것은 삶의 권태를 느끼는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를 지금의 기억일 수도 있겠지. 눈을 더 크게 뜨고 사진을 찍듯 주변을 바라본 뒤 눈을 감고 녹음하듯 파도소리를 들었고, 그 다음에는 코에 닿는 향기를 머릿속에 새겼다.

알혼에서 두 번째 아침 해가 떠오른다.

알혼에서의 하루

바이칼 호수의 백사장

해는 온 세상을 가득 메운 것 같은 안개를 날려 보내기 시작하고, 꿈을 꾸는 듯 몽롱한 내 시야도 또렷하게 만든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낸 후 텐트로 돌아갔다.

일행들은 아직 텐트에서 나오지 않았다. 지난밤 한곳에 모아둔 술병들을 비닐봉지에 담아두고 나무 밑동에 앉아 코끝에 아리는 시린 공기를 느끼며 일행들이 일어나길 기다린다. 잠시 후 조용하던 텐트에서 ‘아으으’ 하는 신음소리가 나더니 하나둘 밖으로 나온다. 모두 술을 제법 마셔서 머리가 아픈 모양이다.

마트에서 사온 5리터짜리 물통을 통째로 들고 돌아가면서 마신 후 아침으로 라면을 준비했다. 라면을 먹은 후 하루를 보낼 장작을 구하기 위해 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텐트 안에는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이 그대로 있었기에 두 명씩 나눠서 할일을 나눴다. 한 팀은 텐트 주변을 정리하고, 한 팀은 장작을 구해오기로 했다.

나는 일행 한 명과 함께 마트에 들려 장을 보고 나무도 구해오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캠핑 장소에서 마트로 가는 길. 걸어서 이십여분이 걸린다.

느릿하게 아침을 먹고 나니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있다. 마트에서 소시지와 러시아식 만두인 냉동 펠메니, 양파와 마늘 등을 산 후 돌아오는 길에 나무를 하나씩 주워 텐트에 도착했다.

바이칼에 안기다

이틀 동안 씻지 못했더니 몸이 간지럽다. 씻으러 호수로 향했다. 텐트를 돌아가며 지킬까 하다가 ‘별일이야 있겠어?’ 하는 생각에 다 같이 호수로 갔다.

호수에 살고있는 갈매기들

한낮이라 후덥지근했지만 호수는 한겨울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이곳이 아니면 씻을 수 있는 곳이 없고, 바이칼에 왔으면서 몸 한번 담구지 않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 같아 속옷만 입은 채 백사장을 가로질러 호수에 뛰어 들었다.

용기를 내고 뛰어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허억’ 소리가 나며 숨이 막힐 만큼 차갑다. 팔과 다리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흔들어 물의 온도에 적응하려했지만 너무 차가워 밖으로 잠시 피신했다.

바이칼을 만만하게 봤나보다. 햇빛에 달궈진 모래 위에 누워 몸을 굴렸다. 깨 가루를 입힌 강정처럼 될 때까지.

한참 구르다 누워서 햇빛을 맞으니 제법 더워진다.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낼 겸 팔굽혀펴기를 스무 번씩 한 후 다시 호수에 뛰어 들어 온몸을 비비며 몸을 씻어냈다.

호수 밖으로 나와 발에 모래가 묻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개운하다. 양치질할 때 쓰기 위해 빈 물통에 호수 물을 가득 담아 텐트로 돌아왔다.

텐트와 물건들은 그대로 있다. 주워온 장작을 손도끼로 작게 자르기 시작했다. 이르쿠츠크에서 산 손도끼는 칼 대신 사용하기에는 적당하지만, 나무를 자르기에는 날이 너무 얇고 가볍다. 여러 번 내리친 후 발로 밟아야했다. 

그 때, 내가 고생하는 것을 한참 보고 있던 러시아 소년이 도끼를 들고 나타났다. 십대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장작 패기에 딱 좋은 도끼로 장작들을 정리해줬다. 

지마, 그리고 미야

그 소년의 이름은 지마. 열여섯 살이란다. 고맙다며 한국에서 가져온 라이터를 선물로 줬고, 그는 자신이 차고있던 팔찌를 내게 줬다. 그 때부터 그는 우리 텐트에 자주 놀러왔다. 

지마에게 받은 팔찌

같이 가만히 앉아서 하늘을 보며 ‘하라쇼’(=좋다)라고 말하며 서로 보고 웃기도 했고, 돌멩이와 나무 등을 러시아말과 한국말로 번갈아 알려주곤 했다.

해가 저물어 불을 피울 때가 되자, 그는 ‘미야’라는 자신의 누나와 함께 우리 텐트에 오기도 했다. 누나는 나랑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나뭇가지로 땅에 내 나이를 써서 알려주고 나이를 묻자, 동갑이란다. 그녀는 머리를 레게 스타일로 땋아 머리핀 등을 여러 개 꼽고, 아버지  옷을 입은 아이처럼 헐렁한 옷을 입고 다녔는데, 굉장히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지마가 먼저 자리를 떠나고, 잠시 후 그녀가 차를 구해오겠다며 가더니 약초 같은 풀을 잔뜩 뜯어왔다. 그걸 뜨거운 물에 우려내 마시니 민트향이 났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불을 피우고 그녀에게 한국 노래를 들려주겠다며 블루투스 스피커로 우리가 듣던 노래를 하나씩 들려줬고, 그녀는 가사도 알아듣지 못할 노래를 함께 흥얼거렸다. 밤이 깊어지자, 그녀는 자러 가겠다며 일어났고, 우리도 맥주를 조금 더 마시다 텐트로 들어가 잠들었다.

같은 하루, 매일 다른 풍경의 알혼

다음날 아침, 무언가가 텐트를 뒤집으려하는 것 같은 흔들림에 잠에서 깼다. 깜짝 놀라 밖을 보니, 소 한 마리가 텐트 아래 풀을 뜯으려 머리로 텐트를 밀고 있던 것이었다. 재빨리 풀을 뜯어 소를 유인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한 후 일행들과 하루를 시작했다.

바이칼에서 가장 많이 본 풍경은 누워서 본 잔디밭인것 같다.

별다른 일정은 없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장작을 구하러 다녔고, 저녁거리를 사러 마트에 갔다. 몸을 씻기 위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이칼 호수에 몸을 담갔고, 낮에는 매트와 침낭을 텐트 밖으로 끌고나와 하늘을 바라보며 낮잠을 잤다.

날씨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화로대에 장작을 쌓아 불을 피우고, 그 앞에서 노래를 듣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고 잠드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언덕에 올라서 본 바이칼의 모습

매일 봐도 바이칼은 늘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반겼고, 그 아름다움은 질리지 않고 매번 나를 흔들었다. 하루는 비바람에 잔뜩 성난 바이칼을 보기도 했고, 하루는 짙은 구름 사이로 갈라진 빛이 내리는 바이칼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알혼에서 일주일이 꿈처럼 흘러갔다.

바이칼을 향해 구름을 뚫은 빛이 내리고 있다.

 

자투리 여행정보 25 - 바이칼의 전설 ‘앙가라와 예니세이’의 다른 이야기

지난번에 말했듯 바이칼에는 물줄기 300여개가 흘러들지만 흘러나가는 곳은 앙가라 강밖에 없다. 이와 관련한 전설이 전 편과 비슷하지만 다른 게 하나 더 있다.

바이칼이라는 신에게는 아들 300여명과 함께 앙가라라는 딸이 있었다. 바이칼은 앙가라를 너무나 사랑했고, 앙가라가 원하면 하늘의 푸른 별을 따다 주기도 했다. 바이칼 호수가 푸른색인 것은 그 별로 인해서다.

그런 아버지가 고마운 앙가라는 날마다 운명 같은 사랑을 찾길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새들로부터 드넓은 북극해를 만나러가는 예니세이(=러시아 중부를 가로질러 북극해로 향하는 강) 왕자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앙가라는 예니세이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예니세이와 함께 북극 바다에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북극 바다는 너무 멀어 아버지를 만나러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고민에 휩싸인다.

그 고민은 예니세이를 향한 마음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앙가라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남기고 떠난다.

앙가라의 편지를 본 바이칼은 딸이 추운 북극해로 가는 것을 걱정하며 자신의 심장을 꺼내 딸이 가는 길에 놓아둔다. 그 심장은 앙가라 강이 시작하는 지점에 있는 샤먼바위가 됐다.

샤먼바위 주변은 물살이 빨라 시베리아의 혹한에도 얼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전설에서는 딸을 위한 바이칼의 심장 때문이라고 한다.

앙가라 강은 바이칼의 심장이라는 샤먼바위에서 시작해 예니세이 강을 만나 북극해로 흐른다.

인천투데이 김강현 기자

 

김강현은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현장실습으로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인천대학교에 입학해 2015년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2016년 7월부터 2017년 5월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지금은 <인천투데이> 기자로 활동 중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