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에 있는 두 국가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땅

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10. 러시아 말 몰라요. 나는 까레이스키!

텐트 옆에 곰 발자국?

잠을 자다가 배가 아파 새벽에 일어났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볼일을 보고 있는데 주변이 너무 캄캄해 무섭다. 일행과 우스갯소리로 ‘곰이 나오면 어떻게 하냐?’고 농담한 게 생각난다. 진짜로 곰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땅을 향해 뒀다가 곰이 나타나면 눈이 부시게 얼굴에 비추고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볼일을 후다닥 마치고 텐트로 돌아와 다시 잠들었다.

눈을 뜨니 환한 아침이다. 아침을 먹으려고 버너에 불을 붙이고 쉬고 있는데 한 러시아인이 다가왔다. 그는 몸짓으로 ‘여기서 캠핑을 한 것이냐’고 물었고,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이곳은 곰이 나오는 지역’이라며 내 텐트 옆 땅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큰 발자국이 찍혀있다. 아마 어떤 동물이 물을 먹기 위해 강가로 내려오는 길에 생긴 듯했는데 그 크기가 소나 곰 발자국 정도는 돼 보인다. 그 발자국이 곰 발자국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정말 큰일이 날 뻔 했다. 곰이 우리 텐트로 들어왔으면 어찌했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인터넷이나 SNS에선 러시아를 ‘불곰국’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중국을 ‘대륙’, 미국을 ‘천조국’ 등으로 부르는 것처럼 장난으로 부르는 건데, 그만큼 곰이 많아서이기도 하다. 한번은 유투브에서 곰이 마을로 내려와 쓰레기통을 뒤지며 놀고 있는 러시아 뉴스 영상을 보기도 했고, 산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곰에게 쫒기는 영상을 보기도 했다. ‘설마 곰을 만날 일이야 있겠어?’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막상 러시아인이 발자국을 가리키자 등골이 오싹해진다.

강가에서 돌멩이에 돌멩이로 쓴 글

우리는 앞으로 산에서 캠핑할 때는 조심해야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라면죽으로 아침을 때우고 강에서 샤워를 했다. 아침이라 그런지 강물은 전날보다 더 차갑다. 발끝만 담갔는데도 온몸이 쭈뼛거리는 느낌이다. 머리에 이미 샴푸를 발랐기에 나오지도 못하고 덜덜 떨며 씻었다.

윈도우 배경화면 속으로

출발하기 전 다리 밑에서 찍은 사진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옷을 입었지만 체온이 쉽게 올라가지 않아 강가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며 몸을 덥혔다. 잠시 후 추위가 가시고 나서 짐을 정리하고 길을 나섰다. 날씨가 아주 좋다. 기온도 적당하고, 하늘은 말 그대로 하늘색을 띄고 있다.

치타를 향하던 길. 그림 같은 초원이 펼쳐졌다

산길을 벗어나 어느 정도 달리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우 운영체제에서 기본으로 나오는 배경화면처럼 그림 같은 초원이 펼쳐진다. 길에는 소가 그려져 있는 ‘소 조심’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했고, 초원에는 방목하는 소와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여러 색의 집들이 초원 한가운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에 조금 달리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일행들도 마찬가지여서 달리다 말고 멈춰 연신 사진을 찍는다.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들

마을에 가까워지자 소들이 도로 위를 돌아다니는 것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로드킬’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저러나. 나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차들도 속도를 줄여 소가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소들도 차가 멈춘다는 것을 아는지 차가 달려오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고 도로 위를 지나가고, 차 앞에 서서 배변하기도 한다. 소가 지나가서 길에 멈춰있으니 내게 다가와 냄새를 맡다가 이내 꼬리를 흔들며 길을 지나갈 정도로 사람이나 차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내 냄새를 맡더니 느적느적 걸어서 길을 건너던 녀석. 사람이나 차가 다가와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림 같은 풍경 속을 한참 달린다. 길을 가다 멈추길 반복하다 주유소에 딸려있는 마켓에서 빵을 사서 먹었다. 화덕으로 구운 듯 거칠고 딱딱한 식감의 꽃 모양 빵 위에 설탕가루를 뿌려 팔고 있는데, 처음 먹었을 때 딱히 맛있지는 않았지만 씹을수록 고소함이 배어나온다. 하지만 너무 퍽퍽한 탓에 물 대신 산 탄산수와 함께 먹었다.

마켓에서 사먹은 빵

일행과 떨어지다

물을 사려고 러시아어로 ‘바다(물)’를 달라고 하면 탄산수를 주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인들은 물 대신 탄산수를 먹는 경우가 많단다. 탄산수를 ‘가스 바다’라고 하는데, 그냥 물을 달라고 해도 탄산수를 주는 경우가 많아 매번 곤욕스러웠는데 이제는 탄산수도 제법 입에 맞는다.

빵과 탄산수로 허기를 달래고 계속 달린다. 잠을 잘 자고 아침에 강에서 몸을 씻어 개운한데다 좋은 날씨에 멋진 풍경이 펼쳐지자 모든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 음악을 들으며 오랜만에 실컷 속도를 올려 달리다보니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캠핑을 할까 고민하다가 GPS를 보니 조금만 더 가면 ‘치타’라는 큰 도시가 나오기에 어두워진 길을 더 달린다.

조금만 멀게 떨어지면 서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참을 달리다 일행이 둘씩 떨어지게 됐다. 나와 한 친구는 떨어진 일행들을 찾으려 한참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아서 먼저 지나갔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속도를 올려 치타를 향했다.

그 친구가 앞에 가고 내가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는데, 큰 길에서 도시로 들어가는 좌회전 길에서 그 친구가 계속 직진한다. 속도를 높여 따라가려하지만 비슷한 성능의 바이크여서 따라잡기 쉽지 않다. 라이트를 깜빡거리고 경적을 울려 불렀지만 그다지 밝지 않은 라이트와 크지 않은 경적 소리는 그에게 닿지 않고, 결국 그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경찰? 산적?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잠시 멈춰있는데, 도로 옆에 있던 경찰서에서 차가 나오더니 나를 잡는다. 경찰은 내게 차선을 넘었고 경적을 울렸다며 벌금 1만 루블(약 17만원)을 내란다. 여행 오기 전 걱정한 일 중 하나다.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의 경찰들은 부패가 심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도 안 되는 벌금을 물리며 돈을 갈취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내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 

그는 계산기를 두드려 숫자를 보여주고 차선을 넘었기에 벌금을 내야한다고 몸짓으로 설명했고, 나는 그 말을 이해했지만 모른 척하며 “까레이스키, 뚜리스트”만을 연발한다.

그가 무전을 하니 잠시 후 경찰서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 그는 영어를 서툴게 할 줄 알았는데, 나는 영어도 모르는 척하며 순진한 표정으로 곤란하다는 쓴 웃음을 지으며 “몰라요, 못 알아들어요. 나는 까레이스키! 여행 중입니다”라는 말을 반복한다.

내 수중에 남은 돈을 생각하면 17만원은 어마어마한 돈이기에 줄 수 없다. 계속 못 알아듣는 척하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앞서갔던 일행이 되돌아오는 게 보인다.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오려 하자, 나는 눈짓으로 먼저 도시 쪽으로 가있으라고 하고는 일행이 아닌 척했다.

한참을 실랑이 한 끝에 그들은 내게 여권과 지갑을 보여 달라며 내 몸을 뒤졌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안 쓰는 카드가 몇 개 들어있는 ‘가짜 지갑’을 꺼내 보여줬다. 지갑에 현금이 없는 것을 본 그들은 한숨을 쉬더니 이제 지쳤다는 표정으로 내게 손짓으로 그냥 가라고 했다.

지금까지 계속 말을 못 알아듣는 척했는데 가라는 말을 한 번에 알아들으면 안 될 것 같아 한참을 못 알아듣는 척 하다가 ‘아~’ 하는 표정을 지으며 감사할 것도 없는데 ‘스뻐씨버’를 외치고 바이크에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도망쳤다.

큰일 날 뻔했다. 17만원이면 남은 돈의 5분의 1 정도다. 안 그래도 가난한 여행을 하는지라 돈 걱정을 많이 하는데, 내 진짜 지갑을 들켜 그 돈을 뺏겼다면 여행이 더 힘들어질 뻔했다.

새로운 라이더와의 만남

안도의 숨을 내쉬며 5분쯤 달리자 눈짓으로 먼저 보낸 일행이 보인다. 그에게 “산적 같은 경찰들을 만났어” 하고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데, 바로 옆으로 차 한 대가 멈추더니 말을 걸어왔다.

러시아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지만 방금 전 그런 일을 겪은 데다 캄캄한 밤이어서 조금 경계했다. 삼십대쯤 돼 보이는 그는 우리에게 와서 악수를 건네며 자신도 라이더라고 하더니 우리에게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라이더라는 말에 긴장이 풀린 우리는 한국에서 온 여행자라고 웃으며 대답했고, 그는 우리보고 대단하다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비로비잔~하바롭스크~잔나~모고차’라고 우리가 지나온 도시 이름을 말하며 지도를 보여줬고, 그는 ‘무슨 이런 놈들이 다 있어’ 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또 다시 엄지를 치켜운다.

우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던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우리에게 오늘 묵을 숙소가 있냐고 물었다. 우리는 아직 숙소를 못 구했고, 떨어진 일행 두 명을 먼저 찾아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숙소로 안내해주겠다며 와이파이도 되니 일행들을 부르면 될 거라고 했다.

더 이상 가면 위험하다

그를 따라가 볼까 고민하다가 숙소 가격을 알아보기 위해 “돈이 없어서 아주 저렴한 방을 찾고 있다”고 했고, 그는 알겠다고 말한 뒤 자신의 차를 따라오라고 손짓하고 차에 올랐다. 우리는 일단 숙소를 잡고 일행들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를 따라가기로 했다.

이제 제법 가까운 곳에 도시의 불빛이 보여서 긴장을 풀고 따라가고 있는데, 도로를 따라가던 그의 차가 갑자기 숲 속 오솔길로 들어간다. 숙소가 조금 외진 곳에 있나 하며 일단 따라 들어갔는데 물웅덩이가 있는 오프로드가 이어졌고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들어갔다.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라이더라고는 하나 ‘오늘 처음 본 이름도 모르는 외국인인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하며 일이 생기면 재빨리 뒤돌아갈 생각에 조금씩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일행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나와 속도를 맞추며 그의 차와 거리를 벌린다. 조금씩 속도를 낮추다보니 코너가 나왔다. 그의 차가 사라지면 바로 뒤돌아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는 코너 앞에서 그가 갑자기 차를 멈추고 내리더니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자투리 여행정보 10 - 곰을 만났을 때 대처법

불곰 (사진ㆍpixabay)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여행 중 곰을 만난 적이 없거나 곰을 만났어도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앞으로 나올 여행기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히 얘기하진 않겠다. 하지만 곰을 만났을 때 대처법을 숙지하고 있다면 두려움을 조금은 떨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상식 중 한 가지는 곰을 만났을 때 죽은 척 하는 것이다. 곰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죽은 동물을 먹는 곰도 있고,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시체인지 확인하기 위해 툭툭 치거나 들어서 던질 수도 있단다. 곰의 거친 발바닥과 날카로운 발톱, 강한 힘을 생각했을 때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곰은 사람보다 훨씬 나무를 잘 타고, 나무를 자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종도 있어 영역 침범으로 곰을 더 화나게 할 수도 있다. 도망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곰의 달리기 속도는 최대 시속 60Km다.


가장 좋은 방법은 곰을 만나지 않는 것이다. 곰이 나오는 지역에서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은 4인 이상 떼를 지어 다니며 벨을 울리거나 큰 소리로 떠들면서 걷는단다. 하지만 직접 마주했을 때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오히려 곰을 자극할 수 있다. 막대기를 휘두르거나 소리를 지르고, 어깨를 피고 위협하는 행동도 곰을 더 자극할 수 있다.


두 번째 방법은 우산 등을 펼치고 뒤로 숨는 것이다. 큰 우산을 펼치면 곰이 도망가거나 자리를 피한다. 우산을 장애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곰이 조금 멀리 떨어졌을 때 뒤돌아 달려서 도망가면 안 되고, 시선을 맞추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해야 공격당할 가능성이 줄어든다. 절대 등을 보여선 안 된다.

인천투데이 김강현기자

 

 

김강현은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현장실습으로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인천대학교에 입학해 2015년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2016년 7월부터 2017년 5월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지금은 <인천투데이>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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