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에 있는 두 국가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땅

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49. 알마티와 기억의 습작

예전의 내가 아니다

‘이곳은 어디인가, 이건 무슨 상황인가’ 생각을 차분히 정리했다. 이곳은 카자흐스탄 발하쉬 호숫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 낮에 본 발하쉬 호수에 반한 우리는 호숫가에서 캠핑을 하겠다며 겨우 이곳을 찾아 들어와 텐트를 쳤다.

짐을 정리하고 텐트 안에 들어갔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 나가보니 술에 취한 남성 한 명이 내 바이크를 건드리고 있다. 바이크가 넘어질까 봐 급하게 그를 바이크에서 떼어냈고, 그는 기분이 상했는지 언성을 높이며 나를 밀치는 등, 과격해진다.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진정시켜보려 했지만, 그는 우리가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더욱 난동을 부린다. 여행 초반, 벨로고르스크에서 러시아 부랑자들에게 둘러싸였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이번에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나를 위협한다. 텐트를 치고 짐까지 다 풀어놓은지라 도망가는 것도 여의치 않다. 하지만 그 때의 내가 아니다. 여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 쯤 지났을 때는 겁을 먹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여행 석 달 차에 접어든 베테랑 여행자가 된 나는 머리를 빠르게 굴려 주변을 파악했다.

캠핑할 장소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을 때 어두워서 잘 보지는 못했지만 주변에는 집이 한두 채 있긴 했지만 사람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나를 위협하는 이 사람은 아마 근처에 집이 있지만 무리지어 살지는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술에 잔뜩 취한 중년. 20대 남자 두 명이 제압하지 못할 리 없다.

겁먹은 모습을 더 이상 보이면 안 될 것 같다. 나보다 텐트와 더 가까이 있는 친구에게 작은 목소리로 “야, 여차하면 도끼 잡아”라고 말한 뒤, 나도 허리춤에 있는 단도를 꺼낼 준비를 했다. 자신감이 생기니 별로 무섭지 않다. 큰 소리로 욕하며 그를 뒤로 밀쳐냈다. 처음에는 몸도 잘 가누지 못하면서 저항하던 그는 우리가 계속 몰아내자 끝내 발걸음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제야 긴장을 풀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강한 척하며 밀쳐내긴 했지만 내심 겁이 났다.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지만 잠시 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시 오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설마 그런 일이야 있겠어’ 하는 마음으로 애써 진정하고 코펠을 꺼내 라면을 끓였다. 별빛과 달빛으로 잔잔한 발하쉬 호수가 빛난다. 신선한 공기를 가득 마시며 라면과 함께 맥주를 먹은 후 텐트에 들어가 잠들었다.

기억의 습작

캠핑한 다음날 아침.
물과 풀을 먹고 있는 말들

다음날 아침, 텐트에서 나와 주변을 보니 아름다운 발하쉬 호수가 반긴다. 다행히 전날 몰아낸 취객이 다시 찾아오진 않았다. 텐트 주변으로는 갈대밭이 있다. 어두워 길이 잘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잡은 자리치고는 아주 괜찮다. 주변에서 물을 먹는 말을 보며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짐을 챙긴 후 다시 알마티를 향해 바이크를 몰았다.

소련 시절 이후 한 번도 정비하지 않은 것 같은 도로.
바퀴가 고장 나 버려진 차.

한동안은 좋지 않은 도로가 반복됐다. 망가진 자동차도 보일 정도로 도로 상태가 굉장히 좋지 않다. 운전에 집중해 포트홀을 피해 달린다. 날씨는 굉장히 맑다. 새파란 하늘과 내가 가는 방향의 지평선 부근에 구름이 띠를 두르고 있다. 그 풍경이 생소하고 신기했지만 시선을 오래 둘 수 없다. 포트홀을 피해 운전하기 바빠 이내 별 생각 없이 달린다.

이어폰을 꼽고 노래를 들으며 달리는 것에만 집중한다. 좋지 않은 도로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무슨 노래를 듣고 있는지도 모르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어느덧 상태가 양호해진 길을 달리다가 언덕을 하나 넘었는데 낮게 깔려있던 구름의 실체를 알았다. 구름일 거라고 생각한 그것은 바로 산이다.

알마티를 둘러싼 자일리스키 아리타우 산맥.
자일리스키 아리타우 산맥.

눈이 쌓인 산. 말로만 듣던 자일리스키 아리타우 산맥이다. 갑자기 정신이 확 든다. 때마침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이 흘러나온다.

감당하지 못할 커다란 감정이 홍수처럼 밀려와 눈가에 고인다. 바이크를 세우고 헬멧을 벗지도, 바이크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앞을 바라본다. 친구도 설산을 봤는지 별다른 말이 없다. 아스타나 술집에서 파티를 할 때 현지인들에게 들은 것처럼 알마티의 자연은 경이롭고 아름답다.

감정을 추스르고 난 뒤 친구와 그 감정을 나눈다. 친구도 나와 다르지 않은 감동을 느꼈다. 우리는 그 감동을 에너지로 전환해 마음껏 소리를 지르며 멀리 보이는 설산을 향해 달렸다.

아리타우 산맥은 가까워질수록 더욱 선명해지고 거대해진다. 깨진 곳이 거의 없는 깨끗한 도로가 나올 때쯤에는 내가 보는 세상의 절반은 산인 것처럼 엄청나게 크고 장엄하다. 초원지대에 있을 때보다 공기가 차갑다. 훨씬 더 맑고 깨끗한 느낌이다.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이자 여전히 제1의 도시인 알마티. 현 수도인 아스타나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아스타나가 깔끔하고 깨끗한 이미지라면, 알마티는 고귀하고 장엄하다. 산맥이 있어서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겠지만, 도시 분위기가 오랜 역사를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천년의 도시 알마티

숙소를 먼저 잡고 짐을 푼 후 가벼운 옷차림으로 밖으로 나왔다. 숙소 바로 옆에 있는 공원에서 파는 샌드위치를 사서 벤치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었다.

아스타나가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도시였다면, 알마티는 푸른 나뭇잎과 떼가 탄 오래된 건물의 무채색이 어우러진 느낌이다. 그리고 어디를 보더라도 설산이 병풍처럼 서있다.

첫 날은 일찍 숙소에 들어가 쉬고, 다음날부터 알마티 여행에 나섰다. 아침 일찍 카메라를 챙겨 알마티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가볼만한 곳을 미리 검색하거나 알아보지 않았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골목골목을 누볐다.

알마티의 길.
알마티의 가로수 길

화려하다기보다는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알마티의 도로에 마음을 뺏긴다. 한참동안 걷다가 어딘가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발견하고 올라가보니 서울의 남산처럼 산 위에 공원이 있다. ‘콕토베’라는 이름의 공원에는 관람차와 카페, 식당, 기념품점, 동물원 등 관광거리가 다양하게 있다. 기차처럼 생긴 놀이기구도 있는데, 엄청난 경사를 내려가는 놀이기구 치고는 안전장비가 굉장히 허술해 보여 타보지는 않았다.

콕토베의 관람차.
콕토베에서 바라본 알마티 전경.
놀이기구. 엄청난 경사를 내려가는데, 자동차 안전벨트 하나만 있다.

높은 곳에 올라오니 설산이 더욱 가까이 보인다. 날씨도 맑고 공기도 좋아 더욱 선명하다. 눈이 쌓여 하얗고 거대한 산맥은 웅장하고 아름답지만, ‘다음 내 여행의 목적지인 파미르고원을 가기 위해서는 저런 산맥을 넘어야하는데’ 하는 걱정도 함께 하게 한다.

파미르고원을 둘러싼 산맥은 해발 3000~4000m가 보통이다. 파미르고원에 있는 레닌봉은 7100m가 넘는다. 내 바이크로 저 설산 안에 들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이내 걱정을 털어버리고 콕토베를 내려와 다시 도시를 거닌다. 

카페에서 여유롭게 머피 한 잔을 마셨다.
우연히 만난 한인마트.

카페에 들어가 여유롭게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한인 마트를 만났다. 이게 웬 횡재냐 하며 마트에 있는 물건을 전부 사버릴 작정으로 들어갔다. 직원은 한국인이 아니었지만, 한국 사람이 반가웠는지 비타민 음료를 하나씩 준다.

청양고추와 두부, 인스턴트 된장국 등을 사서 숙소로 돌아와 된장찌개를 끓였다. 공동 주방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는 게 눈치가 보여 다른 손님들이 식사를 다 마친 후 창문을 활짝 열고 끓여 먹은 된장찌개는 정말 ‘와~’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맛있다.

한국에서는 쳐다보지도 않을 인스턴트 된장찌개 한 그릇에 행복해하며 카자흐스탄 맥주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했다.

숙소에서 해 먹은 된장찌개.

자투리 여행정보 49. 알마티

알마티를 상징하는 사과 동상.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 수도를 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는 알마티는 수도가 바뀐 후에도 여전히 카자흐스탄 경제ㆍ문화 등의 중심지다. 

알마티는 카자흐어로 ‘사과의 머리’ 또는 ‘사과의 아버지’라는 뜻인데, 사과 등 과일이 많이 열려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도시는 해발 600~900m에 있으며,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공기가 청정하다. 산도 굉장히 아름답다. 물가도 저렴하다. 기회가 된다면 바이크가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가서 실컷 관광하고 산악 트래킹을 해보고 싶은 도시다.

인천투데이 김강현기자

김강현은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현장실습으로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인천대학교에 입학해 2015년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2016년 7월부터 2017년 5월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지금은 <인천투데이>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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