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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월미도의 빵집 중 대청과자점은 삼영제과와 광고를 나란히 냈고 최종적으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월미도 유일의 빵집이 됐다.그러나 1930년대가 되면 월미도 대청과자점은 내륙의 인천정으로 주소지를 옮긴다. 인기 많은 관광지 월미도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대청과자점은 왜 자리를 옮겼을까. 여기에 대한 의문은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한 기나긴 중일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기 전부터 일본은 끊임없이 중국을 자극하며 전쟁을 벌여 승전국으로서 대륙진출 꿈을 달성하고 싶었다. 1931년 9월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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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언 작가
2024.04.2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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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64년 전인 1960년 4월 26일 독재자 이승만이 4.19 혁명의 여파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하야 성명서를 발표했다.당시 이승만은 죽산 조봉암(1898~1959, 향년 60세)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사법살인을 저질렀고(진보당사건) 1952년 '발췌개헌(이승만이 자신의 재선을 위해 직선제로 헌법을 고쳐 강압적으로 통과시킨 개헌)'과 1954년 '사사오입개헌(정족수 미달 된 헌법개정안을 통과 시킨 사건)' 등으로 민주주의를 훼손하며 독재를 계속했다.이어서 이승만은 1960년 3월 15일 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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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26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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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01년 전인 1923년 4월 25일 일제강점기 조선인 백정들이 신분해방을 외치며 ‘형평운동’을 시작했다.형평운동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들이 여전히 차별적인 신분제를 타파할 것을 주창하며 전개한 계급투쟁, 계급 해방 성격의 운동이다.당시 구한말·일제강점기 시기 시대적 상황은 여전히 백정을 향한 차별이 존재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됐으나, 표면적일 뿐이었다. 실질적으론 여전히 계급사회였으며, 백정을 향한 의식이나 사회적 대우는 차별적이었다.백정은 자신의 신분을 호적상 도한(屠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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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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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33년 전인 1991년 4월 24일 최초의 남북단일팀 ‘코리아’가 1991년 일본 치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달성했다.1991년 남북단일팀을 구성하기까지 과정은 매우 길었다. 1963년 남북은 스위스 로잔에서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을 처음 열었다.그 계기는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당시, 분단국가였던 서독과 동독의 올림픽 단일팀 구성이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분단국가였던 남측과 북측에도 단일팀을 제안했다.남북은 단일팀 논의를 위해 회담을 열긴 했지만,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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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2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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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76년 전인 1948년 4월 23일 남북 주요 인사인 김구(1876~1949, 향년 72세)와 김규식(1881~1950, 향년 69세), 김일성(1912~1994, 향년 82세), 김두봉(1889~사망연도 미상)이 남북연석회의 결의문을 발표했다.남북연석회의란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참여해 남북 분단과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등의 문제를 논의하던 의사 결정 협의체다. 회의는 북측이 제안해 1948년 4월 19일~23일 평양에서 열렸다. 남측 김구와 김규식 선생은 분단 만큼은 막아야 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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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2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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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07년 전인 1917년 4월 22일 대한제국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헤이그에 보낸 고종의 특사 중 한 명 이던 독립운동가 이상설(1871~1917, 향년 46세) 선생이 순국했다.이상설 열사는 헤이그특사[1907,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해 을사조약(1905)의 부당함을 폭로하고자 한 외교활동]로 파견된 적이 있으며, 연해주에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1914)해 정통령(正統領)에 취임하는 등 일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힘썼다. 또한, 그는 한국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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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22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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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21년 전인 1903년 4월 21일 러시아가 압록강 하구 용암포를 점령하며 포대를 설치하는 등 압록강 하구 인근 지역을 군사기지화 해 대한제국에 조차(타국에 일시적으로 빌린 영토의 일부)를 요구한 용암포 사건을 일으켰다.1903년 대한제국은 상황은 일제가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을 일으키자 고종이 아관파천(1896,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을 하면서 조정 내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진 상황이었다.이로 인해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1897년 고종이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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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21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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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1923년 월미도에 빵집이 여러 곳 들어섰으며 그중 한 곳인 도제과소는 이미 인천 내륙에 개업 중인 상태에서 출장소를 개설했다.(사진 1924년 월미도매점 광고)또한 조선신문 1924년 1월 5일 신년광고를 보면 월미도 말고 내륙 인천에서 도제과소와 또 다른 과자점 국수당 두 곳이 전국신문에 광고를 냈다.(사진 인천궁정 주소의 국수당)이전과 달리 월미도 관광단지가 만들어지자 경성과 인천을 잇는 당일 여가생활 문화권이 형성된 덕택에 인천역을 중심으로 관광객이 몰리면서 인천의 상업시설들이 중앙 일간지 홍보를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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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언 작가
2024.04.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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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58년 전인 1866년 4월 20일 흥선대원군 이하응((이하응, 1821~1898, 향년 77세)이 민비(1851~1895, 향년 43세, 이자영)를 고종(1852~1919, 향년 향년 66세)의 왕비로 들였다. 그때 민비 나이는 16세였다.흥선대원군은 민비를 선택한 후 자신이 직접 민비에게 왕의 신부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직접 가르쳤다. 이는 조선 개국 이후부터 꾸준히 문제가 됐던 외척의 득세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민비는 ‘조선의 국모’라고 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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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2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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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64년 전 1960년 4월 19일 이승만(1875~1965, 향년 90세)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민주화를 요구한 범국민적 시민운동 4.19 혁명이 일어났다.'갈 때까지 간' 이승만 독재정권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그는 1952년 '발췌개헌(이승만이 자신의 재선을 위해 직선제로 헌법을 고쳐 강압적으로 통과시킨 개헌)'과 1954년 '사사오입개헌(정족수 미달 된 헌법개정안을 통과 시킨 사건)' 등으로 장기집권 발판을 마련했다.먼저 이승만은 발췌개헌 과정에서 부산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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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1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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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081년 전인 943년 4월 18일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황제의 나라라며 스스로 황제를 칭한 고려 4대 임금 광종(925~975, 향년 50세)이 즉위했다.광종 왕소는 고려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4대왕으로 943년 스물 다섯에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그는 먼저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광덕’과 ‘준풍’ 등 독자적인 고려 연호를 사용해 왕실의 권위를 높였다. 이와 함께 수도였던 개경(개성)을 황제의 도읍이라는 뜻을 담아 ‘황도’라고 칭했다. 광종이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 것은 고려가 '황제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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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18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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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27년 전인 1997년 4월 17일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한 독재자이자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나선 당시 시민을 학살한 반란군 수괴 전두환(1931~2021, 향년 90세)과 그를 따라 내란에 가담한 노태우(1932~2021, 향년 88세)가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을 확정 받았다.당시 대법원은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반란과 내란 수괴 등 죄를 물어 전두환에게 무기 징역, 노태우에게 징역 17년을 선고했다.전두환과 노태우는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세력들과 함께 이른바 12.12 군사반란을 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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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1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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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0년 전인 2014년 4월 16일 오전 전날 저녁 인천항에서 출항한 청해진해운 카페리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병풍도 인근 해역에서 침몰하는 참사가 발생했다.당시 세월호는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학생들을 비롯해 탑승객 476명을 태우고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15일 저녁 출발해 제주항 연안여객터미널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과적과 고박 불량, 불법 선박개조, 부실한 초기 구조대응으로 탑승객 476명 중 172명만 구조되고 나머지 304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10년 전 그날의 참상을 되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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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1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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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05년 전인 1919년 4월 15일 일제가 3.1대한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보복 조치로 수원 제암리에서 학살을 저질렀다.일제가 저지른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은 1919년 민족의 거족적 운동인 3.1독립만세운동을 향한 보복 행위다. 당시 일제 군경이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 사는 민간인 20여명을 학살하고 민가 30여호를 불태웠다.1919년 3.1운동은 거족적 독립운동으로 국내 곳곳에서 독립을 향한 열망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1919년 3월 31일 수원 제암리 인근 발안 장터(경기 화성시 향남읍 위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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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15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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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520년 전인 1504년 4월 14일 조선의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1476~1506, 향년 29세)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갑자사화는 1504년 당시 조선 임금 연산군이 자신의 친어머니 폐비 윤씨(1455~1482, 향년 27세)의 죽음을 알게 되면서 관련자들을 대규모로 숙청한 사건이다.앞서 폐비 윤씨는 1482년 연산군의 부왕 성종(1457~1495, 향년 37세)이 즉위하던 시절, 성종의 후궁 귀인 정씨(출생연도 미상~1504)와 귀인 엄씨(출생연도 미상~1504)의 모함을 받아 성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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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1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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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인천의 작은 섬 월미도에 빵집이 처음 개장한 시기는 1923년이라 교통이 불편한 시절을 고려하면 의외로 빠르다.수심이 깊지 않은 서해안 항구로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대형선박 출입 가능토록 소월미도를 잇는 갑문을 만든 인천항은 수도권 관문이 됐다.갑문 건설 전에도 1898년 경인선 철도 개설로 물류가 원활한 이점이 있던 인천항 앞 월미도엔 증기선을 위한 일본과 러시아 석탄기지가 있던 열강의 관심지였다.월미도에 사는 주민은 소수였지만 1904년 러일전쟁으로 군사용 보급과 군대 편의를 위해 일찍부터 부교가 건설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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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언 작가
2024.04.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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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37년 전인 1987년 4월 13일 당시 12대 대통령이었던 ‘독재자’ 전두환(1931~2021, 향년 90세)이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4.13 호헌조치는 ‘헌법을 보호해 지킨다’는 뜻으로, 대통령을 통일추제국민회의 구성원이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만든 당시 현행 헌법을 변경하지 않고 계속 유지하겠다는 전두환의 조치였다.1987년 12월에 실시할 예정이었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86년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향한 요구가 강하게 나왔다.그 중심에는 신한민주당(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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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13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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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427년 전인 1597년 4월 12일 한국사 최고 명장이자 조선을 구해낸 불세출 영웅, 충무공 이순신(1545~1598, 향년 53세) 장군이 암군 선조(1552~1608, 향년 55세)와 무능한 장군 원균(1540~1597, 향년 57세)의 모함을 받아 파직됐다.당시 암군 선조는 무능으로 조선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조일전쟁 고통에 빠트렸다. 선조는 백성과 수도 한양을 버리고 명나라까지 망명을 고려할 정도로 무능했다.그러한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곧, 가토기요마사가 이끄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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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1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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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401년 전인 1623년 4월 11일 조선 능양군(인조, 1595~1649, 향년 53세)이 광해군(1575~1641, 향년 66세)을 몰아내고 왕권을 차지한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조선 왕조의 쿠데타였다.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과 능양군의 명분은 광해군이 영창대군(1606~1614, 향년 7세)을 살해했다는 것과 인목대비(1584~1632, 향년 47세)를 대비에서 폐하고 서궁(덕수궁)에 유폐시킨 사건, 그리고 명·청 교체기 명나라와 신의를 저버리며 중립외교(명과 청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친 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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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민 기자
2024.04.1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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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74년 전인 1950년 4월 10일 대한민국 해군 최초 전투함인 ‘PC-701 백두산함’이 실전배치 됐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가재정 상황은 여유롭지 못했다. 당연히 대한민국 해군은 군함을 구입할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다. 해군은 자체적으로 군함을 구입하고자 했다. 그리고 해군 장병들은 자신의 월급에서 5~10% 거출해 군함 구입비에 보탰다. 당시 해군 신임 장교(소위) 월급은 1만원이었다.여기에 해군부인회에서는 뜨개질을 한 수예품을 모아 팔고 삯바느질에 의복 세탁까지 해가며
인문학
현동민 기자
2024.04.10 2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