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에 있는 두 국가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땅

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22. 평화의 소녀상과 함께 한 여행

화물택배로 부친 바이크를 찾다

바이크를 찾는 날이다. 치타에서 화물로 바이크를 보낼 때 썼던 서류를 하나하나 꼼꼼히 챙기고 화물회사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호스텔 주인에게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홍차와 빵으로 간단하게 요기하는 사이 숙소 앞에 택시가 도착했다. 우리는 호스텔 주인에게 우리 목적지를 설명했고, 주인은 그걸 택시기사에게 전달했다. 

택시를 타기위해 숙소 앞에 나갔을 때 만난 강아지들. 숙소 앞에서 매일 볼 수 있었는데, 나중에는 친해져서 '일스키', '이스키', '삼스키'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가는 기분이다. 바이크로 하는 여행이니만큼 바이크는 내게 매우 소중하다. 설레는 가슴으로 이르쿠츠크 시내를 가로질러 도시 외곽에 있는 화물회사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자 바로 앞에 마켓이 있어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먹으며 ‘지금까지도 잘 해왔는데, 별 문제야 있겠어’ 하며 언어의 두려움을 떨치고 회사로 들어갔다.

1층에 있는 큰 물류창고 직원들에게 물어 3층으로 올라갔다. 우리나라 은행 창구처럼 직원들이 앉아있고, 그 뒤로 몇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 잠시 후 내 차례다. 아는 러시아 말이라고는 열 개도 안 되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기에, 가지고온 서류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모또찌끌(모터사이클)’을 찾으러왔다고 온몸으로 설명했다.

그 몸짓으로 딱딱하고 정적뿐이던 대기실에 한바탕 웃음이 피어났다. 나도 웃음이 나왔고, 내 설명을 듣는 직원도 웃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서류만으로도 충분히 내가 어떤 물건을 찾으러왔는지 알 텐데, 그 직원이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한 것 같기도 하다.

내 뜻을 겨우 알아챈 직원은 내가 준 서류를 몇 장 가져가 도장을 찍고는 1층으로 내려가라고 안내했다.

1층 화물창고로 가서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서류를 내밀었더니, 창고 한쪽에 있는 사무실을 가리켰다. 사무실에 가서 서류를 줬더니 잠시 기다리란다. 잠시 후 나무틀로 포장된 바이크를 지게차에 싣고 나왔다.

화물회사에서 며칠 만에 만난 내 바이크. 안에서 넘어졌는지 비닐 밖으로 핸들과 사이드미러 부분이 꺾여 튀어나와있었다.

며칠 만에 보는 내 바이크. 나무틀 안에 비닐로 꽁꽁 싸매져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앞으로  나가 확인해보니, 나무틀 안에서 흔들렸는지 한쪽으로 넘어져 핸들과 사이드미러가 꺾여있다. 빨리 포장을 벗기고 끌고나와 확인해보니 다행히 기능에는 지장이 없다.

바람을 막아주는 윈드가드 등 화물 배송을 위해 탈거했던 부품을 모두 껴 맞추고 시동을 걸어봤다. 기적처럼 고장이 고쳐져 있기를 바랐지만 여전히 고장 난 상태. 일행과 함께 아주 천천히 숙소로 돌아와 지하주차장에 주차해뒀다.

지겨워진 일상, 알혼으로 떠나다
 
바이크를 찾았지만 고칠 부품은 없다. 지난 밤 결심했던 대로 한껏 게으른 생활을 시작 할 차례다. 방에서 누워 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어느새 밤이다.

배가 고파 일행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저녁은 라면과 과자, 술이다. 컵라면에 물을 받아 앞마당으로 나왔다. 노트북도 가지고. 한여름인데도 이르쿠츠크 기온은 20도도 채 되지 않는 시원한 밤이다. 라면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방으로 들어와 수다를 떨다가 잠들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쵸르니 차이와 빵으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고 밖으로 나가 무작정 걷다가 안가라 강변에 누워 시간을 때웠다. 배가 고프면 식당에서 샤슬릭이나 라그만을 사먹고 해가 질 때쯤이면 마켓에서 이것저것 사서 숙소로 들어와 영화를 보거나 수다를 떨며 술을 마셨다.

숙소 창 밖으로 보이는 노을이 아름다웠던 어떤 날. 매일 노을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며칠 동안 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이제는 동네 샛길도 알았고, 밤에 돌아다녀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춤에 도끼를 찬 나를 이르쿠츠크 주민들이 더 무서워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아주 편하고 즐겁기만 했던 일상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일행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배송 조회를 해보니 바이크 부품이 도착하려면 아직 일주일도 더 넘게 걸릴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쉬고 여행을 마저 하자’고 일행들과 얘기했다. 고민 끝에 내 바이크는 숙소에 맡겨두고 일행의 바이크를 같이 타고 바이칼 호수에 가기로 했다. 얽매일 것 없는 몸이었기에 밤에 결정하고 다음날 아침에 바로 떠나기로 했다.

내가 뒷자리에 타는 대신 일행의 짐을 분산해 다른 일행들의 바이크에 싣고 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바이칼 호수 안에 있는 섬 알혼이다. 이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곳 중 한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와 그 안에 있는 자연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섬. 아침에 일어나 호스텔  주인에게 알혼에 다녀오겠다고, 혹시 택배가 오면 잘 받아달라고, 내 바이크를 잘 지켜달라고 이야기하고 알혼으로 떠났다.

 

평화의 소녀상과 함께 한 여행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앞에서 준비해간 현수막을 펼쳐보였다. 현수막에는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공식사과와 법적배상을 요구합니다'라는 한글과 영어 문구, 소녀상의 사진을 넣었다.

여행하는 꿈을 한창 키우고 있던 2015년 겨울, 박근혜 정부는 일본 정부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타결했다. 한일 정부당국은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으로 종결됐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배상인지, 보상인지, 합의금인지 성격이 불분명한 10억엔(약 110억원)을 주겠다고 했고, 일본 외교부 장관과 일본 언론은 서울에 있는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치워야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밝혀지기 시작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성적 욕구 해소를 위해 여성들을 납치, 매수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모아 조직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했다.

입에 담기도 힘든 참혹한 증언과 어린 나이에 그 고통을 당하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밝혀진 이 문제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사건 중 하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해결했다”고 표현하며 일본 정부와 단숨에 합의해버렸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피해자들이 전혀 동의하지 않은 합의, “합의했으니 받아들여”라는 식의 정부의 일방적 행위는 누구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 이후 나는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향하는 일이 많아졌다. 지금까지 알고도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반성하고 소녀상의 철거를 막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서였다.

광화문에 있는 세월호 농성장과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앞에서 밤을 새기도 했다. 살을 에는 바람이 새벽 내내 불어오는데, 소녀상을 지키겠다고 전국에서 모인 청년들의 잠자리는 천막도 아닌 비닐이 전부였다. 경찰이 천막을 치지 못하게 해서였다.

화가 울컥 치밀기도 했고, 눈물이 날 만큼 속상하기도 했던 겨울을 그렇게 보냈다. 여행을 준비하는 내내 그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뉴스를 보면 그런 마음이 더 커졌다. 소녀상을 지키겠다고 그 앞에서 추운 겨울을 보냈던 청년들에게 국가는 죄를 묻기까지 했다.

속상한 마음은 커지고 커져 여행을 한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고, 적어도 잊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며 내 여행을 소녀상과 함께 하기로 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몽골 울란바토르,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키르기스스탄 비쉬켁의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

누군가 소녀상을 치우려 해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고, 더 나아가 한국에서 아무리 소리쳐도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가는 나라에 있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소녀상과 함께 일본의 책임을 묻겠다고 다짐했다.

몽골과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영국, 프랑스의 일본대사관 앞에서 소녀상과 준비해간 현수막을 들었다. 솔직히 굉장히 무섭고 두려웠다. 이런 내용으로 키르기스스탄 한인 신문과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내 여행을 소개하기도 했다.

여행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 아쉽게도 더 많은 나라의 일본대사관을 찾지는 못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내 목적을 알렸는지도 잘 모르겠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너무 힘들어 다른 일들을 생각하지 못한 날들이 더 많기도 했다.

왼쪽부터 영국 런던의 일본대사관과 프랑스 파리에 있는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

처음 계획처럼 세계인들에게 이 문제를 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녀상이 있어서 스스로 한 번이라도 더 기억하고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는 8월 14일은 세계 각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세계 위안부 기림일’이다. 고 김학순 할머니가 피해 사실을 처음 증언한 1991년 8월 14일이 계기가 돼, 2012년 대만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기림일을 지정했다.

국내에선 지난해 법안을 발의해 올해 처음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날을 기려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인천투데이 김강현기자

 

김강현은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현장실습으로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인천대학교에 입학해 2015년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2016년 7월부터 2017년 5월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지금은 <인천투데이> 기자로 활동 중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