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에 있는 두 국가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땅

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24. 시베리아 꿈의 섬 '알혼'

알혼섬에서 첫 아침

밤새 침낭 안에서 추위에 떨며 자다가 눈을 뜨니 따스한 햇살이 비춘다. 6년 전 친구들과 인천에서 해남까지 자전거여행을 할 때 샀던 5만원짜리 싸구려 텐트는 습기와 햇살을 전혀 막지 못해 눈이 부시고, 텐트 안은 비라도 내린 것처럼 물이 흥건하다.

더운데다 습도도 높아 짜증이 조금 난다. 잠시 앉아 잠을 깨고 텐트 밖으로 나가기 위해 지퍼를 열자, 눈앞에 초록색 초원과 파란 하늘, 초원 너머로 보이는 바다 같은 호수가 펼쳐져 있다.

텐트의 지퍼를 열고 마주한 아침 풍경

지난 밤 모랫길에서 고생하다가 바로 옆 초원으로 피신해 텐트를 쳤을 뿐인데 세상에 둘도 없는 멋진 장소였다.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매번 이런 놀라운 광경을 선사하는 러시아가 고마울 따름이다. 일행들도 뒤이어 텐트에서 나와 나처럼 입을 벌리고 알혼섬의 장관을 만끽한다.

차가운 공기는 햇살에 자취를 감췄고 선선한 바람 속에서 아침을 준비했다. 메뉴는 질리게도 먹은 컵라면과 쌀. 지난밤 짜장밥을 해먹은 코펠을 물로 한번 헹군 후 휴지로 대충 닦은 뒤 쌀과 물을 넣고 죽을 먼저 끓인다. 

쌀이 익는 동안 텐트를 말리기 위해 안에 있는 짐을 정리해 뒤집어 놓은 후 배낭에서 라면 두개를 꺼내왔다.

그걸 잘게 부숴 끓고 있는 죽에 스프와 함께 넣는다. 물을 조금 더 붓고 숟가락으로 휘적휘적 저으면 맛있는 라면죽 완성.

영양가는 별로 없겠지만 간단하게 해먹을 수 있고 재료 보관이 쉬워 장기 여행, 그것도 캠핑 여행족들에겐 최고의 식량이다. 황홀한 풍경을 보며 라면죽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혀의 감각보다는 눈과 귀, 피부에 닿는 바람의 촉감이 더 커서 맛을 느낄 틈도 없이 아침식사를 마쳤다.

바이칼에서만 사는 생선 오믈

짐을 정리하고 일주일간 머물 캠핑 포인트를 찾기 위해 바이크에 올랐다. 사실 섬 전체가 캠핑 포인트라 가장 좋은 장소를 찾기 위해 움직인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한낮에는 빛이 강하기에 그늘이 적당히 있는 호수 근처로 자리를 잡기 위해 이동했다.

모랫길 위에서 휘청거리는 바이크를 꽉 붙잡고 천천히 이동했다. 길을 따라 가다가 언덕이 보여 위로 올라가보면 어김없이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바이칼을 볼 수 있다.

캠핑포인트를 찾기위해 이동하다가 올라간 언덕

한참을 이동하다 점심 쯤 돼서 후지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작은 마을이기는 하지만 관광객들을 위한 마켓도 있어 술과 음식 등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았고, 근처에는 괜찮아 보이는 식당도 있었다.

마을에 가까워지자 나무로 만든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점심을 먹기로 하고 바로 앞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메뉴는 바이칼 호수에서만 난다는 생선인 오믈.

이르쿠츠크 시장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이 생선은 좀 작은 연어 비슷하게 생겼는데, 어류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에겐 그냥 다 똑같은 생선인 것처럼 보여 별로 특별하진 않다. 하지만 여행을 온 이후로 생선을 먹은 적이 거의 없고, 이곳에서만 나는 생선이라니 호기심이 더해져 생선구이와 흰 밥을 주문했다.

점심으로 오믈구이와 쌀밥을 먹었다.

고향이 강원도 산골인지라 어려서 생선을 많이 먹어보지 않아서인지 생선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회나 초밥은 굉장히 좋아하지만 구이나 훈제 등은 그냥 있으면 먹는 정도지 굳이 사먹은 적은 거의 없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 오믈은 생각보다 맛있다. 갈치구이와 연어구이의 중간쯤 되는 식감과 맛이다. 밥까지 더해져 오랜만에 배불리 제대로 먹었다.

호수가 보이는 넓은 솔밭

밥을 먹으며 주변을 둘러보다 이 마을 근처에서 캠핑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보니 바로 근처에 호숫가가 있다. 

호수 근처로 가서 캠핑할 만한 곳이 있는지 먼저 확인했다. 집 사이로 나있는 모랫길을 달려 조금 더 들어가자 넓은 솔밭과 그 뒤로 호수가 보인다. 딱히 의견을 나누지 않고도 이곳이 우리가 있을 곳이라고 생각했다.

후지르 마을 근처 솔밭

 대충 자리를 봐둔 뒤 먹거리를 사기 위해 마트로 바이크 핸들을 돌렸다. 마켓 앞에 주차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필요한 물품은 거의 다 팔고 있다. 술과 라면은 물론 냉동된 만두와 고기도 있다. 저녁에는 제대로 된 샤슬릭을 해먹자며 닭다리와 돼지고기, 양념과 꼬치까지 잔뜩 샀다. 며칠 동안 머무를 계획이었기에 물과 술도 잔뜩 사서 솔밭으로 돌아왔다.

캠핑하기 적당한 장소를 찾다가 돌로 화로대를 만들어 놓은 곳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소들이 풀을 뜯고 있고, 다양한 크기의 들개들이 나무에 올라가는 다람쥐를 잡으려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동물들을 피해 자리를 잡고 땅바닥을 정리한 뒤 텐트를 쳤다.

캠핑하기에 적당한 자리를 찾아서 텐트를 치려는데, 이 소가 자기 자리라는 듯 다가와 풀을 뜯었다. 결국 조금 옆으로 이동해서 텐트를 쳤다.

여행하는 동안 한 번도 꺼내지 않은 일행의 타프(=방수 처리된 그늘막)도 꺼내 설치하고, 내 텐트의 플라이도 꺼내 설치하고 나니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가 나왔다. 지금까지는 밤을 보내기 위해 최소한의 장비로만 캠핑했지만, 알혼섬에서는 며칠 동안 머무를 예정이었기에 있는 장비를 모두 꺼낸 것이다.

어느덧 저녁이 되고 있다. 나와 일행 한 명은 더 늦기 전에 불을 피울만한 장작을 구하러 갔고, 다른 일행 두 명은 텐트를 마저 치고 불을 지필 준비를 했다.

다행히 주변이 솔밭이라 그런지 솔방울이 많고 나뭇가지들도 쉽게 구할 수 있다. 금세 땔감을 잔뜩 구해 도끼로 불 지피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누군가 버리고 간 화로대도 주워왔다.

알혼섬의 첫 만찬

불 지필 준비를 마치니 알혼섬에서 두 번째 밤이 찾아온다. 해가 어스름하게 넘어갈 때부터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나뭇잎과 마른 풀을 모아 장작 아래 깔고 불을 붙였다. 

샤슬릭을 준비하기 위해 이르쿠츠크에서 산 도끼로 돼지고기를 알맞게 자른 뒤 비닐봉지에 샤슬릭 가루와 고기를 넣고 흔들어 양념이 골고루 묻게 했다.

불을 피우고 저녁으로 샤슬릭을 준비했다.

대지의 습기 때문에 젖은 나무에는 불이 쉽게 붙지 않아 고생했지만, 고기를 굽기 위해선  휘발유를 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젠 휘발유를 뿌리지 않아도 불을 붙일 정도로 우리의 캠핑 실력은 좋아졌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한참동안 입으로 바람을 불자 불길이 서서히 올라오더니 곧 타닥타닥 소리를 나며 활활 타오른다. 

그동안 샤슬릭 준비를 마저 했다. 모고차를 벗어나 치타를 가던 길에 강가에서 나뭇가지에 꽂아 고기를 굽다가 실패하고 결국 코펠에 볶아 먹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물론 그때 고기 맛은 최고였지만 샤슬릭이라기엔 부족한 게 많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한 만큼 진짜 샤슬릭을 먹기 위해 숯이 만들어질 때까지 술을 마시며 기다리기로 했다.

낮에 구름이 많다 싶더니 부슬비가 조금씩 내린다. 다행히 불은 타프 아래에 있었기에 비를 맞지는 않는다.

조금씩 내리는 비와 얇은 다운패딩을 입어야할 만큼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불 앞에서 마시는 보드카는 세상 어떤 술보다 맛있다. 소시지를 꼬치에 끼워 하나씩 잡고 구우면서 술을 마신다.

숲 바깥쪽에선 바이칼 호수의 파도소리가 들린다. 행복감이 밀려온다. 5000원쯤 되는 보드카와 1000원도 안 되는 소시지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밤이다.

숯이 완성되고 샤슬릭을 굽기 시작했다. 화로대와 닭다리를 굽는 저 석쇠도 주워왔다.

아직 하이라이트가 남았다. 바로 샤슬릭. 술을 마시다보니 불은 금방 사그라져 숯을 만들었고, 그 위에에 타지 않게 조심해가며 샤슬릭을 구웠다. 잔잔한 숯불 위로 고기 기름이 뚝뚝 떨어지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자,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소시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 굽는 고기 냄새를 맡으니 안주가 따로 필요 없을 지경이다. 언제 먹을 수 있을까. 기다리다 꼬치를 하나 꺼내 고기를 칼로 갈라 익은 것을 확인한 뒤 꼬치 한 개씩을 들고 뜯어 먹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사먹은 그 샤슬릭 맛이다. 내 손으로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러시아 특유의 샤슬릭 맛이난다. 저녁을 제대로 먹지 않았던 터라 배가 고팠는지, 아니면 샤슬릭이 너무 맛있었는지, 우리는 구운 샤슬릭을 삽시간에 다 먹어치웠다. 그리고 남은 고기로 꼬치 두 개를 만들어 술안주로 삼고 알혼에서 두 번째 밤을 보냈다.

샤슬릭을 다 굽고난 후 다시 불을 피웠다.

 

자투리 여행정보 24 - 바이칼의 전설, 앙가라와 예니세이

바이칼 호수는 2500만년의 역사만큼이나 무수한 전설이 있다. 바이칼 호수에는 물줄기 300여 개가 흘러들어오지만 바이칼 호수에서 나가는 물줄기는 앙가라(안가라)강 한 곳뿐이란다. 이와 관련된 전설 한 가지가 내려온다. 

먼 옛날 바이칼이라는 신에게는 300여명의 수많은 아들과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의 이름이 앙가라다. 바이칼은 딸을 너무 아낀 나머지 호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겼다. 이 때문에 앙가라는 세상과 단절된 채 매일 눈물을 흘렸고, 그래서 호수는 푸른색이 됐다.

앙가라의 친구는 호수의 물고기들과 하늘의 새들뿐이었는데, 어느 날 앙가라는 새들한테서  매일 북극의 아름다운 바다를 보러 간다는 예니세이(러시아 중부를 가로지러서 북극해로 들어가는 큰 강의 이름)라는 남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앙가라와 예니세이는 앙가라의 아버지 바이칼에게 결혼을 허락받고자 했으나, 바이칼은 불같이 화를 내며 반대했다.

앙가라는 바이칼을 피해 예니세이에게로 달아나려했지만, 딸이 자신의 명을 어긴 것을 안 바이칼은 단단히 화가 난 나머지 달아나는 딸에게 바위를 던졌다.

바이칼이 던진 바위는 알혼섬의 ‘샤먼바위’로, 앙가라 강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다. 바위에 쓰러진 앙가라가 예니세이를 그리워하며 흘린 눈물이 앙가라 강이 됐고, 앙가라 강은 바이칼에서 나와 이르쿠츠크를 거쳐 예니세이 강과 만났다. 그리고 예니세이 강은 앙가라 강의 물을 만나 함께 북극해로 흐른다. 

인천투데이 김강현기자

 

김강현은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현장실습으로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인천대학교에 입학해 2015년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2016년 7월부터 2017년 5월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지금은 <인천투데이>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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