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조계지 일대 탐방(14)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운동장 ‘웃터골 운동장’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일대는 1879년 이후에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하는 화도진도(花島鎭圖)에 상기동(上基洞)으로 표시돼있고, 병사들의 막사에 해당되는 파수직소(把守直所)가 있었다.

상기동은 한자표기로 우리말로는 웃터골이다. ‘위 터에 자리 잡은 마을’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이곳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천연분지였으며 러일전쟁(1904~1905) 당시에 철도감부(지금의 철도청)의 합숙소로 사용됐다가 인천부 소유가 된다.

웃터골 공설운동장에서 행사하는 광경. 뒤로 인천측후소 본관 건물이 보인다.(인천도시역사관 전시)
웃터골 공설운동장에서 행사하는 광경. 뒤로 인천측후소 본관 건물이 보인다.(인천도시역사관 전시)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본군들은 시위하는 군중들을 무력진압과 보복학살을 함으로써 오히려 만세 운동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 되고 국제여론도 악화된다. 이에 곤욕을 치른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꾼다.

언론 출판과 집회 결사를 허가하고 헌병제도를 개편해 경찰제도로 변경하는 등 많은 유화정책을 꾀했지만 실제로는 고도의 정치적 의도가 숨겨진 기만정책으로 민족분열 통치였다.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당시 관청 등 각 기관마다 체육구락부가 만들어져 스포츠가 활성화되자 인천부는 조선체육협회와 용산철도 야구부의 협조로 웃터골 확장 설계를 실시해, 1920년 11월 1일 웃터골 분지에 2300평(7603㎡) 이상의 그라운드 형태를 갖춘 공설운동장을 준공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운동장인 ‘웃터골 운동장’이다. 또 1926년에는 확장공사를 실시해 6450평(2만1322.31㎡)으로 넓힌다.

‘웃터골 운동장’의 규모는 컸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시설을 설치했던 것은 아니다. 웃터골 자체가 삼태기 모양의 분지였기에 자연적으로 운동장을 둘러싼 삼면이 관중석 역할을 했다. 다만 천막들을 칠 수 있을 정도로 평탄작업을 했으며 그렇지 않은 부분은 관중들이 그냥 서거나 앉아서 경기를 관람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설운동장이지만 수도시설과 화장실 외에 별다른 시설은 설치하지 않았다.

인천 체육의 산실 ‘웃터골 운동장’

웃터골 운동장 인천 각 학교 연합대운동회 엽서(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손환 소장)
웃터골 운동장 인천 각 학교 연합대운동회 엽서(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손환 소장)

인천은 우리나라에 축구와 야구를 최초로 도입한 도시였다. 근대 축구가 한국에 전파된 것은 1882년 6월(고종 19) 인천항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피쉬호의 승무원들을 통해서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야구는 일반적으로 1905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한국에 ‘황성 YMCA 야구단’을 조직하면서 시작됐다고 알려졌지만, 1899년에 인천 영어야학회(인천고 전신) 일본인 학생 후지야마 후지사와의 일기장에 '베이스볼'이란 공치기를 했다는 기록을 살펴볼 때 야구경기 또한 인천에서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웃터골 운동장’에선 축구와 야구 경기만 열린 것이 아니라 자전거 경주 대회, 육상대회, 봄가을로 열리는 인천 각 학교연합대운동회 등 각종 대회가 끊임없이 열렸다. 이때마다 인천 시민들은 ‘웃터골 운동장’에 나와 경기를 관람하며 나라를 잃은 울분을 대회를 통해서 해소했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장으로도 활용했다. 이런 까닭에 일제는 다양한 이유를 대며 연합운동회를 제지하기도 했다.

14년 동안 인천 체육의 산실 역할을 했던 ‘웃터골 운동장’은 1934년 이곳에 인천부립중학교(현 제물포고)를 세우며 학교에 자리를 내줬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도쿄올림픽을 겨냥해 같은 해 6월 30일 도원동에 1만5623평(5만1556㎡)의 부지를 마련해 이전하며 육상장과 야구장, 2면의 정구장을 설치한 종합운동장을 건설한다.

인천 최초의 조선학생 야구팀 ‘한용단’

한용단 선수들 모습.(인천도시역사관 전시)
한용단 선수들 모습.(인천도시역사관 전시)

1919년 11월 인천에서 서울로 기차로 통학하는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소속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용단(漢勇團)’이 창립된다. 매일신보(1919.11.13.) 기사 “인천 내리에서 젊은 청년들이 운동단을 조직하여 이름을 한용단이라 하고 야구와 축구를 시작하였으며 명년 봄부터는 테니스도 시작할 예정으로 현재 회원이 30여 명”이라는 내용을 보면 창립 당시 외형적으로는 신체를 단련하는 단체로 출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듬해 동아일보(1920.6.13.) 기사 “인천 청년으로 시대에 요구하는 정신적 체육과 실질적 체육을 유감없이 수양 발휘하기 위하야 단체를 설립하였으니 명칭은 ‘한용단’이다.

단장은 곽상훈 씨를 추천하였으며, 당국에서 기부금 인허를 득하여 인천의 심능덕, 장석우, 임상윤, 이혁로 씨와 본사 지국장 하상훈 씨의 찬조로 불원간 회관을 건축하고 도서를 비치하며 문예 잡지도 발행하기로 열심 분투하는 중”이라는 것으로 볼 때 체육활동 외에 문화활동에도 뜻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대외적인 활동으로 인천에 이름을 떨친 것은 인천 최초의 조선학생 야구팀으로 활약한 ‘한용단’이다. 당시 미두취인소 소속의 미신(米信)팀, 일본인 하역회사인 경전조(慶田組)가 중심인 미나토팀, 인천철도사무소의 기관고(機關庫)를 중심으로 한 야구팀 등이 ‘한용단’과 웃터골 운동장에서 매주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기를 치렀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야구사’에는 “1922년 5월 일본인 체육단체인 조선체육협회 산하의 인천체육협회 주관으로 인천시내 10개 팀이 참가하는 춘계야구대회가 개최됐다”고 해 당시 인천의 야구 열기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한용단’과 일본 야구팀들 간의 경기가 있는 날 ‘웃터골 운동장’은 관람객들이 인산인해로 빼곡하게 들어차 절규하듯 응원을 했다고 한다. 신태범의 ‘仁川 한世紀(인천 한 세기)’에 보면 그 광경이 잘 그려져 있다.

“漢勇團(한용단)이 유명했던 것은 야구를 잘한다고만 해서가 아니었다. 그간 쌓이고 쌓였던 日人(일인)에 대한 원한과 울분을 한때나마 야구경기를 통해서 발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漢勇團(한용단)이 나온다는 소문만 돌면 철시를 하다시피 온 시내를 비워 놓고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열병에 들뜬 것처럼 웃터골로 모여들었다. 어른들은 빈 석유통을 두드려 가면서, 아이들은 째지는 목청으로 마음껏 떠들어댔다. 지게를 세워 놓고 구경하다가 조갯살과 생선을 썩혀버린 장수도 허다했다는 이야기도 수긍이 간다.”

한용단 해체 후 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고려야구단. 맨 위 중앙 안경을 쓴 사람이 곽상훈(사진가 미상)
한용단 해체 후 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고려야구단. 맨 위 중앙 안경을 쓴 사람이 곽상훈(사진가 미상)

그러나 거의 대부분 경기에선 일본에서 인천 출신 학생선수를 데려온 미신(米信)팀이 우승을 했는데, 1924년 한용단과 미신팀이 결승전에서 맞붙게 된다. 이에 결승전은 한일대항전의 성격을 띠어 격렬한 응원전이 펼쳐진다.

그런데 심판의 편파 판정으로 한용단의 곽상훈 단장과 인천서 검도사범인 기요다(淸田)와의 실랑이가 발단이 돼 흥분한 군중들이 본부석으로 몰려가 충돌사고가 발생한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경찰서로 연행되며 사고가 진압됐으나 이를 계기로 야구경기는 중지된다. 이후 야구를 좋아하는 요코다(橫田)가 인천부윤으로 부임해 1926년 ‘웃터골 운동장’을 확장하고 인천체육협회 주관으로 야구대회를 재개한다. 그러나 ‘한용단’이란 이름으로는 허가가 나지 않아 ‘고려야구단’이란 새 이름으로 참가한다.

비록 4년 만에 한용단 야구팀은 해체됐지만 인천 사람들은 나라를 잃은 울분을 그들의 야구경기를 통해 마음껏 해소했다. ‘한용단’의 야구 경기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한 사람들은 야구 열기에 들떴고, 이때부터 어느 지역보다 먼저 야구가 지역사회에 자리를 잡는다. 야구 인천의 태동이 ‘한용단’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민족교육자 ‘길영희 교장’

제물포고등학교 초창기 모습.(제고 총동창회 제공)
제물포고등학교 초창기 모습.(제고 총동창회 제공)
제물포고등학교 전경.
제물포고등학교 전경.

웃터골 공설운동장을 도원동으로 이전하고 이 자리에 1935년 4월 1일 인천부립중학교가 개교한다. 광복 후 1945년 11월 27일에는 인천중학교로 이름을 바꿔 개교하는데, 이때 3.1 만세운동에 학생대표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며 민족교육자인 길영희 교장이 인천시민들의 추대를 받아 취임했다.

1946년 인중은 6년제 중학교로 학제가 개편됐고, 1954년 중학교가 3년제로 바뀌면서 중학교내 부설 고등학교로 제물포고등학교가 개교한다. 이때 길영희 인중교장이 제고 초대교장으로 취임해 겸직 교장이 된다.

1972년에 중학교 평준화 정책으로 인천중학교는 폐교되고, 이곳에는 오롯이 제물포고등학교만 남게 된다. 길영희 교장은 1961년 제고에서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긴다. 향토사를 공부할 때 길영희 교장에 대해 알아보느라 동분서주했던 생각이 난다. 어떻게 구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육성 테이프도 구해서 직접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무감독 시험제도의 시행, 학생들 체력을 위해 눈 오는 날 학생들과 토끼몰이, 방과 후 동아리 학생들의 자유로운 실험, 전국을 돌며 유명한 교사를 초빙해 다시 테스트 후 교사 선발, 조회시간에 학생들에게 연설하다 이를 들으러 온 시민들을 향해 연설을 해 박수갈채를 받은 일, 작업복을 입고 똥지게 지며 채전을 가꾸다 학부모에게 학교의 인부로 오해받은 일, 학생들이 임의로 학급을 편성해 담임교사 모셔가기 등이 기억 속에 가물거린다.

이외에도 규율부가 없는 학교, 학생 주관 월례조회, 전문 운동부가 없이 학생 모두가 체육부원이 되는 학교, 교사의 글은 단 한 줄도 실리지 않는 학생 교지, 한국 중·고교 최초의 대규모 개가식 도서관 설치 등 많은 제도를 만들어 인재를 배출하며 국내에서 명성을 떨쳤다.

선생은 정년퇴임 후 자택에 대성학원을 열어 가난한 청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나,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 1967년 수덕사 근처에 ‘가루실 농민학교’를 설립하고 농촌 학생들에게 배움의 터전을 마련해 주다가 1984년 별세했다.

민족교육자 길영희 교장 동상.
민족교육자 길영희 교장 동상.
교육지표 유한흥국과 교훈,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을 새긴 돌.
교육지표 유한흥국과 교훈,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을 새긴 돌.

길영희 교장은 ‘유한흥국(流汗興國, 땀을 흘려 일하여 나라를 일으키자)을 교육지표로 세웠으며,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교훈을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제고를 졸업한 서예가 남전 원중식 선생의 글로 써서 새긴 돌이 본관 건물 앞에 우뚝 서있다. 그리고 본관 앞 화단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규모가 작은 석등 2개와 석탑이 서있다. 규모로 봤을 때 개인 주택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곳에는 1935년 인천부립중학교가 개교할 때 세워진 강당이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 427호로 지정됐는데 인천 지역사회의 대형 집회 공간으로도 활용해온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지붕은 상부를 완만한 경사로 하부를 급경사로, 2단으로 처리한 맨사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의 벽돌조 건물이다. 내부는 15미터나 되는 너비를 중간 기둥 없이 처리한 것이 특징적이며 전체적으로 아주 간결하면서도 기능적이다. 일제강점기 학교 강당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한다.

강당과 본관 사이에는 두루마기 차림으로 앉아 학생들에게 말을 거는 길영희 교장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옆면 밑에는 동상 건립문이 뒤에는 선생의 약력이 적혀있다. 운동장 왼쪽으로 끝으로 2018년에 조성된 명상숲 둘레길을 따라 학교를 한 바퀴 산책하다보면, 당시 최고의 자연환경 속에 학교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족교육자 길영희 교장의 삶을 생각하며 한 바퀴 둘러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인천부립중학교 개교 때 세워진 강당(국가등록문화재 제 427호).
인천부립중학교 개교 때 세워진 강당(국가등록문화재 제 427호).
본관 앞 화단에 있는 석등과 석탑.
본관 앞 화단에 있는 석등과 석탑.
2018년에 조성된 명상숲 둘레길.
2018년에 조성된 명상숲 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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