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개항장 기행] 청국조계지 차이나타운④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ㅣ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인천중화기독교회’

현대식 건물로 바뀐 인천중화기독교회.
현대식 건물로 바뀐 인천중화기독교회.

제3패루 선린문 앞에는 계단을 따라 높이를 달리하며 3층과 2층의 긴 건물이 이어져있다. 십자가가 건물 꼭대기에 있지만 눈여겨보지 않으면 건물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창문에 붙여놓은 ‘인천중화교회(仁川中華敎會)’라는 글자가 없으면 상가나 빌라 건물로 착각할 것 같다.

아마도 1990년대 초반에 언덕길 중간쯤에 있는 교회를 본 것 같다. 화교들이 다니는 오래된 교회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봤고, 하얗게 칠한 벽돌들이 꽤나 소박하고 정갈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2001년 차이나타운이 월미관광특구로 지정되자 차이나타운의 발전을 위해 땅을 내놓으며 교회를 허물었다. 거의 80여 년 동안 사용한 건물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현대식 건물로 바뀌는 것도 안타깝지만, 혹시 문화재를 하나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10~20년대에 화교들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는데, 이에 발맞춰 새로운 이국땅에 정착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정신적 위안이 필요했다. 그래서 1917년에 서양 감리교 선교사인 맥클라렌 여사와 중국인으로 기독교 신자인 손래장 씨가 개인집을 예배당으로 임대해 화교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이 ‘인천중화기독교회’의 시초이다.

과거 청관거리(출처 인천화교역사관 전시실).
과거 청관거리(출처 인천화교역사관 전시실).

손래장 씨는 선교회의 도움으로 중국의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양복점을 경영하는 화교 신도 응귀발 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신도수를 늘리며 교세를 확장했다. 그리고 1922년에 임대해 예배를 보던 시대를 마감하고 현재의 자리에 예배당을 건립했다.지금도 ‘인천중화교회’ 중앙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1922년에 건립했다는 ‘中華基督敎會(중화기독교회)’ 표지석과 종탑에 걸렸던 ‘예배당 종’을 볼 수 있다.

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현재 신자수가 50여 명이고, 100명이 넘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우연히 목사를 만나 토요일에 옛날 사진들을 보여주겠다고 해서 약속을 했다. 그러나 다시 찾았을 때 교회가 한창 공사 중이라 취재를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을 약속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린다.

중국식 저택인 ‘풍미’와 ‘대창반점’ 건물들

풍미와 대창반점이 있는 중국식 저택(2005년).
풍미와 대창반점이 있는 중국식 저택(2005년).

‘의선당’으로부터 ‘풍미’까지 쭉 뻗은 길이 차이나타운의 중심 거리다. 이곳은 주말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오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성황중이다. 그러다 보니 목이 좋아서 가게세가 계속 올라 간판들이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 2월 중순에 이곳을 찾았을 때도 장사가 꽤나 잘되던 길모퉁이에 있는 중국식 화덕만두 전문점인 ‘공가네’가 내부시설을 다 뜯어내고 한창 공사 중이었다.

길 중간에 그래도 낯익은 이름인 만두 전문점 ‘원보만두’가 있다. 예전에 만두와 오향장육으로 소문나 여러 번 먹으러 갔었는데, 사장이 바뀐 후부터 원래 사장이 운영하는 ‘다다복’으로 가고 있다. 그래도 워낙 ‘원보’가 명성을 떨쳐서인지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수제만두 전문점이다.

중국요리점인 ‘豐美(풍미)’와 ‘大昌飯店(대창반점)’이 있는 건물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청국조계가 설치된 후 조성된 청관거리의 풍광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이다. 비록 외관을 검은 벽돌로 깔끔하게 마무리했지만 차이나타운에서 몇 채 남지 않은 중국식 저택이다. 이곳 차이나타운에서 현존하는 짜장면 가게 중 가장 오래 됐다는 '풍미'는 64년 동안 한자리에서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1957년 차이나타운에 정착해 '풍미'라는 이름으로 공갈빵과 만두 장사를 시작하면서 이 거리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풍미’의 외관은 깔끔하게 단장했지만 내부 구조와 중국식 소품, 빛바랜 사진들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예전부터 화교들이 많이 찾던 곳이었다. 이런 이유로 1990년대부터 학생들과 일반인을 데리고 기행장을 안내하면 일부러 이곳에서 식사를 했다. 일반 중국집하고는 뭔가 다른 옛날 분위기로 끄는 매력이 있는 집이다.

인천을 대표했던 청요리점 ‘공화춘’

공화춘 내부와 입구 전경(1950~60년대).
공화춘 내부와 입구 전경(1950~60년대).

공화춘은 1908년 무렵에 지어진 건물로 준공 당시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객잔으로 사용했다. 설립자 우희광 씨는 처음에 ‘산동회관(山東會館)’이란 이름으로 개업했다. 그러다 1912년 1월 1일에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이를 기념해 1912년경에 ‘共和春(공화춘, 공화국의 봄)’으로 이름을 바꿨다.

중국 산동 지방의 장인이 직접 참여해 지은 중정형(中庭型) 중국식 건물로, 집의 외벽 자체가 담장이 되는 거대한 집이다. 이를 요새형 주택이라고도 한다. 무역상들의 숙소를 보호하기 위해 이런 형태로 건물을 지은 것 같다. 거의 100여 년이 넘는 건물로 2006년에는 국가등록문화재 제246호로 지정됐다.

공화춘은 청국조계지에서 가장 번창했던 요리점 중 하나라는 자부심으로 ‘공화춘(共和春)’ 간판 옆에 ‘색변회석(色辨會席)’, ‘특등요리(特等料理)’라는 현판을 붙이고 영업했다. 그 맛이 얼마나 뛰어난지 각종요리를 맛보기 위해 상류층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각종 회식과 사교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우희광 씨는 1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 우홍장 씨가 공화춘을 물려받았다가 다시 손자 우심진 씨가 물려받아 운영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인천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하고 미군부대가 옮겨가면서 쇠퇴하기 시작해 1983년에 영업을 끝냈다.

1990년대 후반이었던 것 같다. 평일에 차이나타운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우연히 공화춘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들어가게 됐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1층에서 모래를 채로 거르고 있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있었다. 우희광 씨의 막내딸인 우란영 씨였던 것 같다. 내부를 수리해 다시 공화춘을 열려고 한다고 했다.

덕분에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의지해 나무계단을 올라 2층의 홀들과 결혼식을 거행했던 연회장을 구경했다. 막대한 보수비 때문에 투자자들을 모으려 했지만, 뒷길에 위치하고 있어 투자자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결국 2002년에 한국인이 ‘공화춘’이라는 명칭을 상표 등록함으로써 복원의 꿈은 안타까움만 뒤로한 채 사라졌다.

‘짜장면박물관’으로 개관하다

짜장면박물관으로 개관하며 공화춘 건물의 외장을 원래 벽돌 모습으로 복원했다.
짜장면박물관으로 개관하며 공화춘 건물의 외장을 원래 벽돌 모습으로 복원했다.

현재 서울 한성화교학교 교사인 우희광 씨의 증손자 우례후 씨는 중구로부터 박물관 건립 제의를 받고 가족 친지들과 상의 후 ‘짜장면박물관’으로 바꾸는 것에 동의를 했다. 그래서 2010년 중구가 공화춘을 매입해 공간을 6개의 전시실과 기획전시실로 꾸며 2012년에 개관했다.

이때 우씨 가족들은 공화춘과 가족의 역사가 담긴 오래된 사진들, 영업 장부, 주식증서 등 공화춘과 관련된 물건들을 기탁해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박물관으로 꾸미다보니 원래 공화춘 구조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전에는 계단의 방향이 반대로 나있었고 건물 뒤쪽으로 화장실을 만들며 길이도 많이 짧아졌다. 그리고 2층의 홀들은 다 터서 전시실로 활용하고 있으며 연회장은 면적이 좁아졌지만 그 흔적은 남아있는 것 같다.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에 기획전시실, 오른쪽에는 원래 걸려있던 현판들이 빛바랜 색으로 전시되고 있다. 관람은 2층부터 시작된다. 화교의 역사와 짜장면의 탄생을 전시한 제1전시실, 짜장면의 역사가 공화춘이 아니라 1890년대 중국 산둥(山東) 지방에서 건너 온 부두 노동자인 쿨리(苦力)들이 인천항 부둣가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던 음식에서부터 나왔다고 바로잡아 다행이다.

짜장면박물관 내부의 1950년대 면요리 상차림 재현 모습.
짜장면박물관 내부의 1950년대 면요리 상차림 재현 모습.

제2전시실에는 공화춘에서 나온 유물들을 활용해 1930년대 접객실을 재현했고, 제3전시실에는 1970년대 중국음식점에서 짜장면을 먹는 가족들을 재현했다. 19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는 입학식, 졸업식, 생일 등 중요한 날에는 항상 중국음식점으로 가서 외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지금도 짜장면 하루 소비량이 150만 그릇 정도라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임이 분명하다.

그밖에도 철가방의 변화, 짜장면의 주재료인 사자표 춘장과 곰표 밀가루의 역사,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출시된 짜장라면의 역사가 전시돼 있다. 마지막으로 1층에 내려오면 1960년대 공화춘 주방의 모습을 재현해 짜장면을 조리하는 광경을 엿볼 수 있다.

이외에도 많은 사진과 자료들, 짜장면과 관련된 다양한 물건들이 전시돼 있어 하나하나 살피다 보니 짜장면과 관련된 재미있는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계속 스쳐 지나간다. 이곳에 가서 짜장면에 얽힌 추억의 두레박을 끌어올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짜장면박물관 내부의 1960년대 공화춘 주방 재현 모습.
짜장면박물관 내부의 1960년대 공화춘 주방 재현 모습.
주말이면 관광객들로 붐비는 현재 차이나타운 중심 거리.
주말이면 관광객들로 붐비는 현재 차이나타운 중심 거리.

 

※ 천영기 시민기자는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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