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개항장 기행] 일본조계지 일대 탐방(3)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인천우체국’과 근대식 우편제도

인천명승, 인천축항도로 엽서. 정문 위에 인천우편국이 새겨져있다.
인천명승, 인천축항도로 엽서. 정문 위에 인천우편국이 새겨져있다.

신포사거리에서 인천항 제1부두로 가는 길 오른쪽에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8호인 ‘인천우체국(仁川郵遞局)’이 있다. 우편업무를 목적으로 1923년 12월 10일에 지어진 근대식 건물로, 그 당시 행정관청으로는 꽤나 큰 규모로 지었다. 건립 당시의 명칭은 ‘인천우편국’이었으나 해방 이후인 1949년 8월에 ‘인천우체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우리나라의 근대식 우편제도는 1882년 12월 통리아문(統理衙門, 외무 통상 업무를 맡아보던 기관) 내에 우정사(郵政司)를 설치해 일본·영국·홍콩 등 외국과 우편물교환협정을 체결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실제 우편활동은 1884년 4월 22일 설치된 우정총국(郵征總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우체국)에서 법령을 마련하고 개국 준비를 해 11월 18일에 처음으로 우체업무를 시작했다.

이때 인천에도 우정총국(郵政總局) 인천분국이 설치돼 같이 업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12월 4일 우정총국 청사의 낙성과 개설 축하연을 이용해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해 12월 8일 폐지됐다. 이후에도 우체업무는 계속됐지만 1885년 1월 5일 업무를 완전 폐쇄했다. 안타깝지만 ‘50일 천하’도 누리지 못하고 우정총국과 함께 근대식 우체업무는 실패로 끝났다.

실제 인천에서 우체국 업무를 먼저 시작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인들은 개항되기 전부터 인천에 들어와 있었는데, 이들을 위해 1882년부터 일본영사관에서 우편 사무를 취급했다. 그러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되고 일본조계가 설치되자 일본인들의 이주가 본격화된다. 이에 일본은 12월 우편 업무를 개시한다고 공표하고 1884년 4월 일본영사관 내에 '우편국'을 설치했다.

우리나라의 근대식 우편제도가 실질적으로 시행된 것은 우정총국이 중단된 지 10년 반이 지나서였다. 갑오개혁으로 1895년 6월 1일 서울과 인천에 ‘우체사(郵遞司)’를 설치하고, 계속해서 전국 각지에 우체사(郵遞司)를 설치하면서 새로운 우편사업이 재개됐다. ‘인천우체사’는 1895년 중구 경동에 있던 이운사 건물 안에 있다가 1898년 내동으로 이전했다.

조선정부는 우체사를 설치하고 일본우편국 철폐를 요구했지만, 을사늑약(1905)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되자 일본은 그해 4월 한일통신기관협정 체결을 강요하면서 오히려 통신권을 강탈했다. 결국 일제는 국내에 있는 우체사와 전보사, 전화소 등 통신기관을 통합하고 금융업무까지 업무를 확장했다. 이에 따라 ‘인천우체사’의 명칭도 일본식인 ‘인천우편국’으로 바뀌었다.

인천우체국 건물의 현재 모습.
인천우체국 건물의 현재 모습.

인천은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거치는 동안 일본인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모했다. 계속되는 일본인들의 급속한 증가와 일본조계 확장의 필요성, 우편 이용자가 급증함에 따라 ‘인천우편국’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보다 넓은 시설이 필요했다. 이에 바다를 매립해 새로 시가지를 조성한 항동의 현재 위치에 ‘인천우편국’을 2층으로 건축해 이전했다.

이 건물은 당시에 유행하던 서양식과 일본식을 섞은 절충주의 양식으로 지었다고 한다. 건물의 아래 2단은 화강암을 거칠게 다듬는 방식으로 처리해 기단처럼 보이게 하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사각기둥처럼 길게 줄줄이 올렸으며, 1·2층 모두 긴 창문을 내어 건물의 수직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입구 양쪽에 큰 기둥을 세우고 출입구를 밖으로 돌출시켜 시각적 효과를 나타냈다. 전체 모습이 이색적이어 그 당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내내 ‘인천우편국’으로 불렸으나 광복 이후 왜식 명칭 추방에 따라 1949년 ‘인천우체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6·25전쟁 당시 지붕의 일부가 파괴돼 부분적으로 개수했고, 2003년 인천우체국이 연수구 신청사로 이전된 뒤에는 2년간의 수리를 거쳐 ‘중동우체국’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건물 안전진단에선 결함으로 보수가 필요한 단계인 'D등급'을 받아 중동우체국마저 정석빌딩으로 옮겨가면서 현재는 비어있다.

2019년 2월 우정사업본부는 인천시에 ‘인천우체국’ 매각 의사를 밝히면서 이에 상응하는 조건으로 중구나 동구에 중동우체국 청사를 지을 땅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시유지를 활용하려 했지만 적당한 부지가 없어 현재 사유지를 물색 중이라 한다.

시에서는 ‘인천우체국’을 매입해 일부 공간에 근대 우편 관련 유산을 소개하는 우정박물관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빠른 시일 안에 ‘인천우체국’이 새롭게 단장해 시민들에게 공개되기를 기다린다.

‘인천세관 구 창고와 부속동’

인천세관 구 창고.
인천세관 구 창고.

인천우체국에서 인천항 쪽으로 한 블록 내려가서 길을 건너면 인천항 제1부두 출입문 못 미쳐 왼쪽으로 빨간 벽돌 건물들이 보인다. 이곳이 국가등록문화재 제569호인 ‘인천세관 구 창고와 부속동’이다. 현재 이곳에는 창고 1동과 그리 크지 않은 건물 2채가 있다.

이 건물들은 인천항에서 관세업무를 했던 ‘인천세관’의 부속 시설들로 일제 강점기에 지어졌다. 그리고 이곳 일대를 세관거리라 불렀는데, 인천세관 건물과 상선회사, 해운회사, 해운창고 등이 즐비했던 곳이다.

구 창고는 1911년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인데 원래 위치는 신포역 2번 출구 부근이었다. 수인선을 인천역으로 연결하며 창고가 신포역 2번 출구와 맞물려 2002년 지금의 위치로 40m 정도 옮겨 복원했다.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동쪽 벽체는 통째로 들어서 옮겼고 나머지 3개 벽체는 벽돌들을 일일이 해체한 뒤 회반죽을 사용해 다시 세웠다.

재미있는 것은 수인분당선 신포역 2번 출구 모습을 옮긴 창고의 측면 모습과 똑같은 형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모습의 지하철 출구는 전국 어디에도 없을 것 같다.

수인분당선 신포역 2번 출구.
수인분당선 신포역 2번 출구.

꽤나 멋지게 지어진 창고 건물인 것 같다. 정면에서 볼 때 정확히 좌우 대칭으로 지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빨간 벽돌들에 남겨진 세월의 흔적이다. 110년의 세월에 벽돌들의 색이 바래서 마치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보는 것 같다. 사방에 판문을 달았는데 판문 아래는 매끈하게 다듬은 화강암 받침을 두었고 위는 아치형으로 만들고 쐐기돌도 화강암으로 큼직하게 장식해 판문을 강조했다.

그리고 건물 기단은 기단석을 놓아 구획을 구분했으며, 벽체 밑에는 장대석으로 둘렀고, 기둥처럼 장식한 벽돌들의 아래는 큼지막한 주춧돌을 놓아 붉을 벽돌과 대비돼 눈에 확 들어온다. 물론 좌우 측면의 기둥 상부에도 사각형 상판 위에 둥근 모양의 장식을 올렸으며, 지붕 상부에 띠를 둘러 시각적 효과가 뛰어나다. 그런데 지붕상부의 장식들은 대리석과 색이 달라 깨진 부분을 보니 시멘트로 발라 꾸민 것 같다.

부속동은 1918년경 지어진 건물들로, 선박에 관한 관리 업무를 보던 선거계(船渠係) 사무실과 화물에 관한 관리 업무를 보던 화물계(貨物係) 사무실이 ㄱ자형으로 옆에 같이 있다. 선거계 사무실은 현재 인천본부세관 내항감시소 현판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사무실로, 화물계 사무실은 현재 경비실로 사용하고 있다.

아무튼 인천시와 인천본부세관은 작년 7월에 세관창고와 부속동을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세관박물관으로 활용하기 위한 협약을 맺었다. 지금 한창 창고의 울타리를 걷어내고 주차공간이었던 바닥을 들어내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어떻게 꾸며질지 기대된다.

6.25 전쟁으로 소실된 ‘인천세관’ 건물

인천세관 부속동. 왼쪽이 선거계 사무실, 오른쪽이 화물계 사무실.
인천세관 부속동. 왼쪽이 선거계 사무실, 오른쪽이 화물계 사무실.

인천세관의 처음 명칭은 원래 ‘인천해관’이었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소속으로 1883년 6월 16일 우리나라 개항장에 설치된 해관 중 최초로 세워졌다. 관세 행정 경험이 아주 없었기에 총책임자를 청나라가 소개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임명해 청나라가 사용하던 명칭인 해관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차용했다.

초창기 인천해관은 영국영사관 부지(현재 올림포스호텔) 아래쪽, 현재 한중문화관이 있는 자리에 해관 청사, 세관감시소, 검사소 세 동의 개량 한옥으로 설립됐다. 그러다 1885년 7월 화재가 발생해 소실됐고, 곧 그 자리에 건물을 재건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905년 9월에 해관 업무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장악됐다. 그래서 1907년 12월 ‘인천해관’이라는 명칭도 일본식 호칭인 ‘인천세관’으로 바뀐다.

이후 1907년 해안 쪽으로 2층 목조 건물로 임시청사를 지어 사용하다가, 1911년 올림포스호텔과 인천역 사이에 새로 청사를 짓는다. 그러다 1926년 3월 ‘인천세관’ 청사는 건물 전체를 해체해 지금의 인천항 제1부두 인근으로 옮긴다. 매우 아름다운 목조양식 건물로 인천항의 랜드마크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며 인천세관 청사는 폭격에 아쉽게도 사라졌다.

개항장을 걷다가 인천을 대표하는 근대건축물이 사라진 곳에 가면 뭔가 아쉽고, 안타깝기도 하며, 가슴이 아리다. 인천세관 건물 역시 마찬가지다. 세관박물관이 만들어지면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인천세관의 모습을 큰 사진으로나마 보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 싶다.

개항 당시 인천해관 주변 청사들. 가장 위쪽 영국영사관, 아래 좌측 건물 세관감시소, 우측 위 인천해관 청사, 우측 아래 검사소.(출처 인천세본부세관)
개항 당시 인천해관 주변 청사들. 가장 위쪽 영국영사관, 아래 좌측 건물 세관감시소, 우측 위 인천해관 청사, 우측 아래 검사소.(출처 인천세본부세관)
1900년대 초 임시로 사용했던 인천해관 청사.(출처 인천본부세관)
1900년대 초 임시로 사용했던 인천해관 청사.(출처 인천본부세관)
1926년 3월에 신축한 인천세관 청사.(출처 인천본부세관)
1926년 3월에 신축한 인천세관 청사.(출처 인천본부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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