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개항장 기행] 청국조계지 차이나타운 ②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ㅣ

붉은색과 황색의 차이나타운

제1패루를 지나 차이나타운으로 올라가는 길은 온통 붉은색과 황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중국에 가면 옛 거리에서 볼 수 있는 풍광이다. 차이나타운이 관광 특구가 되기 전에는 중국식 주택에서만 보이던 특징이었는데, 관광객이 몰리며 새단장했으며 지금도 계속 화려하게 변신 중이다.

중국인들은 유난히 붉은색과 황색을 좋아한다. 붉은색에는 다양한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다. 중국인들은 양의 기운이 넘치는 태양의 붉은색을, 귀신을 쫓는 색으로 인식했다.

중국풍 양식으로 지은 북성동 행복복지센터.
중국풍 양식으로 지은 북성동 행복복지센터.

고대 중국에는 섣달그믐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병을 주는 수이(祟 수, 동티·귀신의 재앙)라는 요괴가 있는데, 가장 싫어하는 것이 붉은색과 밝고 시끄러운 소리여서 섣달그믐날에 집마다 붉은색 폭죽을 터뜨려 요괴를 막았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동지에 팥죽을 먹거나 문에 팥죽을 뿌려 악귀를 쫓는 의식과 같은 행위라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황색은 황제만 입던 복색이었으며 붉은색은 그 다음 신분의 권력자들이 입던 복색이었다. 그래서 일반인들에게 붉은색과 황색은 행운과 행복, 부의 상징으로 남게 됐다. 이런 풍속이 지금까지 이어져 춘절(春節, 음력설) 때는 홍빠오(紅包 홍포)라는 붉은 봉투에 세뱃돈을 담아준다.

또 집집마다 춘련(春聯)이라 해 붉은색 종이 위에 춘절의 의미를 담은 좋은 구절을 써서 붙여놓아 새해를 맞이하는 기쁜 심정을 표현한다. 이외에도 결혼식이나 각종 경사스런 날에는 붉은 종이 위에 쌍 희(囍)자를 써서 대문이나 벽, 거울 위 등에 붙여 축원을 한다. 신랑 신부가 붉은색에 황색 도안을 한 복장을 많이 입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화춘(共和春)’의 원조는

붉은색과 황색의 향연이 펼쳐진 차이나타운. 멀리 공화춘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붉은색과 황색의 향연이 펼쳐진 차이나타운. 멀리 공화춘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완만한 오르막길 중간쯤에 위치한 ‘북성동 행복복지센터’ 건물도 차이나타운에 걸맞게 지었다. 건물 외관에 올린 지붕이나 지붕 위의 용두 장식, 붉은 주칠을 한 기둥 양식, 단청과 황색 문양이 새겨진 가로 띠 등이 그대로 중국풍이다. 이런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진 행복복지센터는 우리나라 어디에도 없을 것 같다.

멀리 오르막이 끝나는 맞은편 건물에 커다랗게 적힌 共和春(공화춘)이란 글씨가 보인다. 이곳 공화춘에는 주말만 되면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설 정도로 장사진을 친다. 옛 공화춘의 명성을 들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그러나 인천 사람들 대부분 아는 사실이지만 이 집은 원조 공화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원조 공화춘은 1983년 폐업했고, 이후 2002년 상표등록을 마친 한국인이 2004년에 새로 공화춘이란 이름으로 중국음식점을 열었다. 그래서 오히려 원조 공화춘을 창립한 우희광씨의 후손들은 공화춘이라는 상호 명칭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현재 원조 공화춘 외손녀가 공화춘의 명맥을 이어 제1패루 근처에서 ‘신승반점(新勝飯店)’을 운영하고 있다.

‘의선당(義善堂)’으로

백년짜장으로 소문난 만다복.
백년짜장으로 소문난 만다복.

공화춘에서 왼쪽으로 100여 미터 길을 따라가다 보면 ‘백년짜장’으로 소문난 만다복 옆에 ‘의선당’이 있다. 의선당은 원래 인천이 개항(1883)하기 이전인 1850년대에 화엄사(華嚴寺)란 이름으로 이미 문을 열었다고 한다.

개항 이후 중국인들이 계속 늘어나자, 그들의 정신적 단합과 교화를 위한 시설이 필요해졌고, 이에 1893년 황합경 스님이 ‘의를 지키고 착하게 살라'는 뜻인 ’의선당‘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불교와 도교 풍습이 섞여 있는 중국식 절로 화교들은 평상시 이곳에서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중국 명절인 춘절, 중양절, 중추절 때에는 작은 축제를 벌인다. 이곳은 해방 이후 1970년대 화교사회의 위축과 더불어 종교시설로의 기능을 잃고 한동안 무당파 팔괘장을 전수하고 연습하는 수련장으로 쓰였다.

1953년 인천에 정착한 팔괘장의 전승자 노수전에 의해 아들 노수덕과 유순화로 이어지고, 이들로부터 중국 무술을 배운 한국인들에 의해 다시 전국으로 뻗어갔다. 이런 유명세로 1970~1980년대에는 이곳 의선당이 한국 무술영화의 대표적인 배경지였다. 이후 화교들의 모금과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2006년 5월에 대대적으로 개보수한 이후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의선당 정문과 팔선도.
의선당 정문과 팔선도.

의선당 벽에는 중국 도교의 대표적인 선인(仙人) 8명을 그린 ‘팔선도(八仙圖)’가 그려져 있다. 벽화에는 ‘팔선과해(八仙過海)’라 적혀있는데, 이는 중국 민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이다.

전설에 의하면, 여동빈 등 팔선이 서왕모가 주최한 반도회(蟠桃會, 불로장생하는 복숭아를 먹는 모임)에 참석하러 가다가 커다란 파도가 세차게 넘실대는 동해를 지나게 됐다.

이에 여동빈은 각자 자신의 물건을 바다 속으로 던져 신통력을 발휘해 바다를 건너자고 제안했다. 철괴리(鐵拐李)는 자신의 호리병을, 조국구(曹國舅)는 옥판(玉板)을, 한종리(漢鍾離)는 파초선을, 남채화(藍采和)는 꽃바구니를, 장과로(張果老)는 종이 노새를 펼쳐 진짜 노새로 만들어, 한상자(韓湘子)는 피리를, 여동빈(呂洞賓)은 보검 등을 타고 건넜으며 하선고(河仙姑)는 물이 튀기는 게 싫어 공중 부양으로 건넜다.

이 ‘팔선과해’ 이야기는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재능이 있어 각자가 자신의 기량을 십분 발휘해 임무를 완성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동해를 건너 이곳 차이나타운에 정착한 화교들이 각자 재능대로 열심히 살아온 과거가 벽화와 묘하게 겹쳐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 같다.

화교들의 소망을 적은 ‘의선당’ 현판들

의선당 외부 현판들(유구필응, 물부재풍, 자운균점, 의중천추, 자심제세).
의선당 외부 현판들(유구필응, 물부재풍, 자운균점, 의중천추, 자심제세).

의선당 문을 넘어서면 7층 석탑이 마당 중앙에 서있고, 맞은편으로 도교의 사당과 불교의 법당이 합쳐진 정면 5칸의 건물이 있다. 각 칸마다 안팎으로 현판을 달아 문구가 적혀있으며, 안에는 칸마다 흙으로 빚은 토상(土像) 다섯 분을 모셨다.

이 토상들은 청나라 말기 중국 종교미술 양식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란다. 현판에 기증자들의 이름이 같이 적힌 것을 보니, 현판에 적힌 문구들 자체가 우리나라로 건너온 화교들의 소망은 아닐는지.

왼쪽부터 첫 번째 현판에는 ‘有求必應(유구필응, 원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이라는 문구가 적혀있고, 안쪽 현판에는 ‘靈驗無雙(영험무쌍, 영험이 견줄만한 짝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이 적혀있다.

이곳에는 ‘호삼태야(胡三太爺)’를 모셨는데, 중국 동북지방의 토속신으로 인간의 선악과 백성의 화복(禍福)을 살펴 재앙을 물리치고 평안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두 번째 현판에는 ‘物阜財豊(물부재풍, 재물이 언덕만큼 풍요롭다)’이 적혀있고, 안에는 ‘裕國富民(유국부민, 나라의 살림을 넉넉하게 하고 백성을 부유하게 한다)’이 적혀있다. 이곳에는 물을 다스리는 ‘용왕(龍王)’을 모셨는데 중국을 왕래하며 교역을 하던 화교들에게는 무사안전을 기원하는 중요한 신이었을 것이다.

세 번째 현판에는 ‘慈雲均霑(자운균점, 자비로운 구름의 비가 골고루 적셔준다)’이 적혀있고, 안에는 ‘佛光普照(불광보조, 부처님의 빛이 온 세상을 비춘다)’가 적혀있다. 이곳에는 현판의 뜻과 어울리게 아미타불의 현신으로, 구원을 요청하는 중생의 근기에 맞게 모습을 나타내 대자비심을 베푼다는 ‘관음보살’을 모셨다.

네 번째 현판에는 ‘義重千秋(의중천추, 의리를 중하게 여겨 천년을 이어간다)’가 적혀있고, 안에는 ‘英名千古(영명천고, 영웅의 명성이 천년 동안 한결 같다)’가 적혀있다.

이곳에는 ‘관우’를 모셨는데, 관우는 중국인에게 충(忠)과 의(義)를 상징하는 인물로 신격화돼 도교의 사원뿐만 아니라 일반 집에서도 관우상을 모실 정도로 민간종교화 됐다. 그리고 관우의 변함없는 충의는 신뢰가 중시되는 돈벌이에서도 통용돼 민간에서는 ‘재물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다섯 번째 현판에는 ‘慈心濟世(자심제세, 자비로운 마음이 세상을 구제한다)’가 적혀있고, 안에도 밖의 현판 내용과 똑같은 의미인 ‘婆心濟世(파심제세, 할머니의 마음으로 세상을 구제한다)’가 적혀있다. 아마도 이곳에 모신 신이 낭랑(娘娘)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의선당에 있는 경로청.
의선당에 있는 경로청.

낭랑은 도교에서 여신을 일컫는 것으로 사람들이 각기 지닌 소원의 종류만큼 그 수가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곳에 세 여신이 모셔져 있는데, 세 신상 중 하나가 아이를 안고 있어 아이를 점지해주는 송자낭랑(送子娘娘)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아이와 여성을 보호해주는 낭랑들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왼쪽에는 우리나라 경로당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경로청(敬老廳) 건물이 있고, 오른쪽에는 ‘有求必應(유구필응)’ 현판을 달고 안에는 불상 및 위패 등을 모시고 기도할 수 있는 행랑채처럼 문에 붙은 건물이 있다.

비록 전체적으로 협소한 장소이지만 ‘의선당’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이 땅에 정착한 화교들의 애환이 서린 장소임이 분명하다. 이곳에서 현판의 의미를 새기며 화교들의 꿈을 생각해본다.

※ 천영기 시민기자는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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