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개항장 기행] 각국 조계지 일대 탐방(3)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엘리 바 랜디스 박사’의 조선 선교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오른쪽 랜디스 박사와 영국 부영사 졸리(1890,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오른쪽 랜디스 박사와 영국 부영사 졸리(1890,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랜디스 박사의 본명은 엘리 바 랜디스(Eli Bar Landis)이다. 전통적인 농부출신인 아버지 피터 랜디스와 어머니 마르타 바의 다섯 번째 아들로 1865년 12월 18일 미국 펜실바니아주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형제자매들은 농부가 되거나 농부에게 시집을 가 농부의 아내가 됐으나 엘리(이후 랜디스로 사용)는 그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남달리 영특하고 인정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16살에 국립학교에 들어가 의예과를 졸업했으며, 18살에는 명문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5년 뒤 의학박사가 돼 랭카스타 시립병원의 레지던트가 됐다.

당시 미국의 신실한 젊은이들 사이에는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확산되고 있었고, 미국성공회의 성클레멘트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랜디스도 선교의 열망을 품었다. 결국 성공회 지도자들은 그에게 5년간 조선 선교를 제안했고 그는 서슴지 않고 이를 수락했다.

코프 주교는 성공회 포교의 방편으로 의료와 교육을 구상하고 조선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는 내과의사인 랜디스와 퇴역한 영국 해군 의무관 출신 의사인 와일스, 간호교육을 받은 수녀 2명과 수병 등을 동행했다.

그들이 부산항을 거쳐 제물포에 도착한 날은 1890년 9월 29일이었다. 그들이 인천에 도착한 날이 마침 성미카엘 축일이었기 때문에 교회를 설립했을 때 ‘성미카엘성당’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랜디스는 그 해 10월 성당 밑에 집을 구해 임시 진료소로 사용하며 의료 구호 활동을 했다. 진료 시간 이전부터 환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기하급수적으로 환자가 늘었다. 서울에서 약을 구해오기 전에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비슷한 성분이 있는 약재를 구해 치료를 했다. 대부분의 환자는 가난한 사람으로 약값을 내지 못해 달걀이나 과일을 대신 주고 갔다고 한다.

인천 최초의 서양병원인 ‘성누가병원(St. Luke’s Hospital)’

최초의 성누가병원과 기도실로 사용했던 한옥 건물들(1892,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최초의 성누가병원과 기도실로 사용했던 한옥 건물들(1892,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1891년 10월 16일, 코프 주교는 지금의 내동 성공회교회 자리에 인천 최초의 서양병원인 ‘성누가병원(St. Luke's Hospital)’을 설립한다. 병원에 입주하는 날인 10월 18일이 누가(의사의 수호성인)를 기념하는 침례일이었기에 붙인 이름이다. 처음 지어진 병원은 한옥으로 지어졌다. 서양 건축물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한옥을 짓는 과정과 한옥의 용도가 신기했는지 랜디스는 이를 기록에 남겼다.

“병원에선 한국인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건물의 벽은 쪼갠 대나무로 엮고 진흙을 바른 뒤 그 사이에 8피트 높이의 수직 기둥들을 나무로 연결한다. 이것이 마르면 다시 모래를 섞은 흙으로 벽을 바른다. 그 바깥쪽에는 접착력이 높이기 위해 해초를 넣어 끓인 물에 섞은 석회를 다시 바른다.·····

한국인들은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방바닥 밑에 돌과 진흙으로 만든 온돌을 만들고 불기운이 통과하게 해서 난방을 한다. 그래서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펴고 잔다. 문과 창문에는 유리 대신 종이를 바르는데 한국의 종이가 튼튼할 뿐 아니라 반투명하기 때문에 보온도 되고 볕도 통과시켜 유리를 대체하기에 아주 좋다.”

랜디스 박사는 어학에도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해 이내 조선에 들어와 있는 선교사 중 가장 우리말을 잘 하는 사람으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한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누가병원’이라는 명칭은 한국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며 ‘The Hospital of Joy in Good Deeds (선행 베푸는 것을 기뻐하는 병원)’이란 의미의 ‘樂善施醫院(낙선시의원)’이라는 이름을 직접 지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남득시(南得時)'라는 한국이름을 쓰면서 한국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랜디스 박사 사진(내동교회 사무실).
랜디스 박사 사진(내동교회 사무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나이는 어리지만 헌신적이고 열정적이며 실력 있는 의사인 랜디스를 ‘의료계의 큰 어른’이라는 뜻으로 ‘약대인(藥大人)’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랜디스의 의료 활동에 고마움과 존경을 바치는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병원 일대의 야산 또한 그의 이름을 따서 ‘약대인산’ 혹은 ‘약대이산’이라 불렀다.

초창기 ‘성누가병원’의 사진을 보면 세 채의 한옥이 보인다. 가운데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모두 6칸 집으로 팔작지붕을 올렸다. 양옆에는 행랑채처럼 길게 건물을 지었는데 정면은 사진 상으로 몇 칸인지 알 수는 없고, 측면은 2칸으로 건물 앞쪽에 길게 툇마루를 내었으며 우진각지붕을 올렸다.

병원 건물들은 전체적으로‘ㄷ’자 형태로 배치됐는데, 이런 형태의 한옥배치는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형태이다. 아마도 땅의 협소함과 병실로 사용하는 용도 때문에 이렇게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ㄷ’자형의 트인 쪽은 동쪽으로 한국인 마을을 향하고 있었고, 대문은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대문이 있던 남쪽(오른쪽) 건물에는 환자 대기실, 약방, 진찰실, 랜디스 의사의 숙소, 그리고 창고가 있었고, 서쪽(가운데) 건물에는 일꾼방, 부엌, 식료품 저장소, 연료창고, 목욕탕이 있었으며, 북쪽(왼쪽) 건물은 모두 온돌마루로 된 병실들이 있었다고 한다.

‘성누가병원’에서 1892년에는 3594명, 1894년에는 4464명의 신규 외래 환자를 진료했다는 랜디스의 기록이 있다. 이곳을 찾는 조선인 환자들의 1/3 정도는 인천 사람들이었다. 랜디스 박사의 명성이 점차 커지자 인근의 강화도를 비롯한 섬지방과 충청도, 황해도 사람들, 심지어는 전라도에서도 소문을 듣고 배편을 이용해 병원을 찾아왔다고 한다.

또, 청일전쟁 때에는 인천 앞바다에 침몰하는 중국 군함에 탄 군인들을 정성껏 치료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중국황제가 내린 쌍룡(雙龍)훈장을 받기도 했다.

서구식으로 새로 지어진 ‘성누가병원’

고종황제가 희사한 땅에 새로 세워진 성누가병원(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고종황제가 희사한 땅에 새로 세워진 성누가병원(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새로 지은 성누가병원의 여자 병실. 아래 층은 간호원실(1908,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새로 지은 성누가병원의 여자 병실. 아래 층은 간호원실(1908,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하는 ‘성누가병원’의 헌신적인 모습과 국내에서 의술로 명성을 떨친 까닭인지 고종황제는 ‘성누가병원’을 희사한다. 그래서 종전에 있던 낡은 한옥 병원을 헐어버리고 1895년 서구식으로 새 병원 건물을 짓는다.

사진을 찍은 위치에서 볼 때 현재 내동교회 위치와 비교하면 가장 안쪽으로 독립된 건물이 여자 병실 건물 사진과 같은 모양이다. 1층은 반 지하로 지어진 것 같은데 간호원실로, 2층은 여자병실로 사용했다. 가운데 굴뚝이 많이 달린 가장 큰 건물과 왼쪽에도 횡으로 길게 건물이 있는데,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인천에 정착한 지 6년 만에 랜디스는 안식년을 얻어 잠시 미국의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1896년 성탄절에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약 5개월의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 선교단에 편지를 보낸다.

‘외국인이 모여 사는 조계지를 떠나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마을로 돌아가 아이들이 한국인 전통의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집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1897년 여름 인천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성누가병원’ 증축 준비도 다 끝난 상태였다.

선교단의 지원을 통해 랜디스는 송림동에 거처를 마련했고, 그동안 돌보던 아이들과 이사를 한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8년 3월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랜디스는 그저 감기 기운이겠거니 생각하고 진통제로 며칠을 버티는 사이 증상이 급격히 악화됐다.

인천가족공원 내 외국인묘역에 있는 랜디스 박사 무덤.
인천가족공원 내 외국인묘역에 있는 랜디스 박사 무덤.

급히 외국인 조계지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 온갖 방법을 다 취했지만 결국 4월 16일, 안타깝게도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망원인은 과로와 장티푸스 등이었다. 장례식은 그의 마음을 헤아려 한국식으로 치렀는데, 한복에 두루마리를 곱게 입혀서 북성동 외국인묘지에 안장했다.

이후 도시가 계속 확장되자 1965년 북성동, 율목동, 도화동 등에 흩어진 외국인묘지를 청학동으로 이장했다가, 2017년 다시 부평에 있는 인천가족공원 내 외국인묘역을 만들어 이장했다.

이때 랜디스 박사가 평생 몸에 지녔던 켈틱교회 전통문양 십자가가 발견됐다. 십자가 뒷면에는 라틴어로 ‘The MISERICORDIA(미세리코르디아, 자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십자가는 현재 안타깝게도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내동교회에는 사무실 벽에 사진만 걸려있다.

랜디스 사망 후 ‘성누가병원’은 잠시 폐쇄됐다가 1904년 영국의사 위어(Weir) 박사가 부임하면서 병원을 다시 열었다. 그는 이곳에서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격침당한 순양함 바랴그호와 포함 코레에츠호의 부상당한 수병들을 진료하기도 했다. 이에 러시아 정부는 러일전쟁 발발 100주년인 2004년에 고마움을 표하는 명판을 사제관 건물에 부착했다.

계속해서 위어 박사의 헌신적인 의료 활동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영국선교부의 지원금 부족으로 결국 1916년 ‘성누가병원’은 문을 닫았다. 물론 ‘성누가병원’이 잠시 폐쇄됐던 1902년에는 러시아영사관으로도 사용됐으며, 1927년부터 1952년까지는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인 ‘성미카엘신학원’으로 건물을 활용했다.

랜디스 박사의 사진을 찍으러 사무실에 들렀다가 김학윤 신부님이 권해준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상권 1890-1964)을 펼쳐 ‘성미카엘성당’과 ‘성누가병원’의 사진들을 보게 된 것은 인천의 기행문을 정리하는 내게 행운이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사진들을 봤을 때의 기쁨으로 무더위가 한순간에 날아갔다. 더군다나 사진들을 찍어서 활용해도 된다는 말에 늦었지만 지면으로나마 신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청학동 랜디스 박사 묘지를 이장할 때 나온 십자가(현재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청학동 랜디스 박사 묘지를 이장할 때 나온 십자가(현재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성미카엘신학원으로 사용했던 성누가병원 건물(1953,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성미카엘신학원으로 사용했던 성누가병원 건물(1953,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성누가병원 진료반원들. 앞줄 왼쪽 두번째가 의사 위어 박사(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성누가병원 진료반원들. 앞줄 왼쪽 두번째가 의사 위어 박사(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성누가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성누가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성누가병원 여자병실 내부(1912,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성누가병원 여자병실 내부(1912,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성누가병원 남자병실 내부(1895,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성누가병원 남자병실 내부(1895,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 8년 동안 의료 봉사를 했던 랜디스 박사의 다양한 업적과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이야기는 다음 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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