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개항장 기행] 각국 조계지 일대 탐방(5)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인천내리교회’를 찾아서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정문에서 오른쪽 경사로를 100m쯤 내려가 삼거리 골목길에서 다시 왼쪽으로 100여m 더 가면 오거리 골목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보면 내리교회의 건물 뒤편이 보이고 ‘기독교 대한감리회 인천내리교회’와 ‘관인 내리유치원’ 현판이 달린 정문이 나온다. 건물 뒤편으로 문이 있어 갈 때마다 정문을 뒷문으로 착각한다.

‘성미가엘 종합사회복지관’ 옆으로 내려가는 좁은 골목길.
‘성미가엘 종합사회복지관’ 옆으로 내려가는 좁은 골목길.

개항장을 기행하며 ‘인천내리교회’를 찾아갈 때면 이 길보다는 ‘성미가엘 종합사회복지관’ 옆에 있는 좁은 골목길로 내려간다. 계단 밑에 보이는 하얀 칠을 한 목조주택이 발길을 끈다.

그리고 마치 막다른 골목일 것 같은데 모퉁이를 돌면 다시 길이 나오고, 길 속에 숨어있는 다양한 집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언제 길이 끝날 것인지, 또 어떤 집들이 나타날 것인지 호기심을 잔뜩 품고 골목길을 걷게 된다.

비록 짧은 길이지만 인생도 이와 같이 구불구불 한 모퉁이를 돌 때마다 뜻하지 않은 집들을 만나는 것처럼 경이로움을 만나는 것이 아닐는지. 삶은 오롯이 혼자 걸어야만 하는 길이고, 삶 속에 펼쳐진 다양한 사건들도 선택은 자신이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일의 성사 여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일을 만들고 해결해야만 하는데, 어떤 일들은 뜻한 대로 쉽게 이루어지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결국 삶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 어떻게 풀릴 것인지 알 수 없기에 재미있는 것은 아닐는지.

골목 곳곳에 숨어있다 튀어나오는 집들을 봤을 때의 즐거움처럼 삶도 생각지도 않은 사람과 뜻밖의 일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것 같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인천내리교회 정문.
인천내리교회 정문.
문 왼쪽에 있는 한국선교 120주년 기념비와 맞은편에 있는 표지석들, 미주한인선교100주년기념비.
문 왼쪽에 있는 한국선교 120주년 기념비와 맞은편에 있는 표지석들, 미주한인선교100주년기념비.

‘인천내리교회’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 풀밭에 아펜젤러의 선교를 기리는 ‘한국선교 120주년 기념비’가 서있다. 비의 옆면에는 1885년 4월 9일 아펜젤러가 제물포에서 미 북감리교 선교회에 보낸 서신의 끝 부분이 적혀있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맞은편에는 ‘미주한인선교100주년기념(1903-2003)’비가 서있다. 1902년 11월에 ‘인천내리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해 한국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 제1호선에 내리교인 50명을 태워 이민을 보냈으며, 12월에는 한국 최초의 해외선교사를 하와이로 보냈을 뿐만 아니라 계속 교인을 보내 102명의 교인들이 이주했다.

1903년 11월에는 한국 최초의 해외 개척교회를 설립했는데 현재 하와이제도에 있는 ‘호놀룰루 미연합감리교회’이다. 이때 이민 간 신자들을 기려 2002년 11월에 기념비를 새웠다.

예전에 이 자리에는 1901년 건립한 십자가형 ‘웨슬리 예배당’ 종각에 설치한 종이 있었다.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 당시 각 교회에 축하예배를 강요해 국방헌금, 애국헌금, 비행기헌금 등을 강탈했으며, 심지어는 교회종과 놋주발, 숟가락까지 빼앗았다.

그러나 다행히 이 종은 빼앗기지 않았고 내용을 알리는 표지석만 이곳에 남아있다. 현재 종은 교회의 종탑에 올려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내리교회가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라는 표지석도 같이 있다.

인천내리교회(선교 100주년 기념 예배당) 전경.
인천내리교회(선교 100주년 기념 예배당) 전경.
교회 종탑에 웨슬리 예배당에서 사용했던 종이 올라가 있다.
교회 종탑에 웨슬리 예배당에서 사용했던 종이 올라가 있다.

‘인천내리교회(선교 100주년 기념 예배당)’는 건물 자체도 거대하지만 종탑 위의 십자가까지 얼마나 높은지 사진 한 컷에 담기도 힘들다. 교회 밖 도로 끝에 가서야 겨우 십자가까지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한국 최초의 교회라는 자부심이 이렇게 거대한 예배당을 만든 것은 아닌지. 건물 앞에서 스스로 왜소해지는 느낌이다. 어쩌면 신을 경배해야 하기에 스스로를 한껏 낮추고 들어오라는 무언의 신호는 아닐는지.

교회의 정문으로 계단을 오르다 보면 정문 왼쪽 벽돌에 ‘한국 최초, 인천최고 100선’ 현판들이 붙어있고, 아래에는 머릿돌들이 붙어있는데 건물을 지을 때 벽돌들에 박아 넣은 것 같다.

제일 아래 머릿돌은 ‘AD1901’년이라 적혀있는 것을 보아 ‘웨슬리 예배당’을 준공했을 때 사용한 머릿돌이다. 그 위의 머릿돌은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는데 ‘19□5. 10.19’이라 적혀있고, 오른쪽 돌에는 개축 봉헌한 것과 화재로 전소된 연도를 적었는데 글자가 희미해서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제1, 2, 3대 목사인 아펜젤러, 조원시(존스), 김기범 목사 흉상.
제1, 2, 3대 목사인 아펜젤러, 조원시(존스), 김기범 목사 흉상.

계단을 다 오르니 세 분의 흉상이 눈길을 끈다. 특히 가운데 모신 분은 양반들이 평상시 집에서 쓰던 관(冠)인 정자관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왼쪽 분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감리교를 전파한 초대 목사 아펜젤러(Henry Gehard Appenzeller, 1858~1902)이고, 오른쪽 분은 1892년에 한국 최초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개설한 제2대 목사인 조원시(George Heber Jones, 존스, 1892~1903)이다. 가운데 분은 한국 감리교회는 물론 한국 개신교 전체를 통틀어서 최초로 목사로 내리교회의 첫 한국인 담임목사가 된 제3대 김기범(1869~1920) 목사이다.

한국의 어머니교회

개신교인 감리교회는 아펜젤러가 인천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바니아주 수더튼(Souderton)에서 태어났으며, 1882년에 랭카스터에 있는 개혁교회의 프랭클린 마샬 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을 졸업했다. 그해 가을에 드루신학교(Drew Theolgocial Seminary)에 입학하여 3년의 정규과정을 마쳤다.

아펜젤러는 1884년 미 감리교 선교위원회로부터 한국의 첫 선교사로 임명돼, 1885년 2월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에 상륙한다. 그는 인천에 일주일만 머물고 일본에 갔다가 6월 20일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7월 29일 서울에 들어가기까지 38일 동안 인천에 머물면서 선교를 준비했다. 6월 28일에는 외국인을 위해 한국 최초로 감리교 예배를 드렸으며, 7월 7일 일본에서 주문한 풍금이 도착하자 감리교 찬송가를 봉헌했다. 이런 이유로 ‘인천내리교회’를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라 칭한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인 아펜젤러의 화이트 채플(White Chapel)’.
한국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인 아펜젤러의 화이트 채플(White Chapel)’.

1889년 서울에 선교의 터를 구축한 감리교에서는 인천 선교를 위해 청국조계지 안에 초가집 2채를 구입해 감리교 서점을 열었으나 조선인 거류지와 거리가 멀어 선교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선교의 결실을 맺지 못하자 감리교에서 1891년 6월 아펜젤러를 인천지역 선교 책임자로 임명하고, 11월에 한국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을 짓고 아펜젤러의 ‘화이트 채플(White Chapel)’이라 이름 지었다. 규모는 단출해 정면 3칸, 측면 2칸 모두 6칸 집으로 우진각지붕을 했다. 최초의 ‘성누가병원’ 사진에 이 예배당 모습이 같이 찍혀있다.

이후 교인들이 증가해 ‘화이트 채플’ 예배당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01년 12월 ‘웨슬리 예배당’을 신축하는데, 특이하게도 십자가 형태로 지었다. 1955년에 다시 이를 허물고 새로 짓기 시작해 1958년 12월 12일 건평 323평에 2층으로 된 교회당을 완공했다.

그러나 1964년 화재로 전소해 새로 교회당을 건립하고 사용하다 1985년 ‘선교 100주년 기념 예배당’을 완공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인천내리교회’는 개신교 선교 초창기에 세워진 교회 중 하나이기 때문에 개신교 신자들은 ‘한국의 어머니교회’라고 부는데, 그 이름에 걸맞게 한국 최초라는 많은 수식어를 가지고 있다.

1897년 한국 최초의 감리교청년모임인 엡윗청년회 조직, 1901년 김기범 목사의 한국 최초 목사 안수, 1902년 12월22일 하와이 첫 이민단에 내리교회 교인 50명 포함, 해외 개척교회 설립, 한국 최초의 해외 선교사 파송(派送) 등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웨슬리 예배당 뒤쪽에서 찍은 사진(1955, 인천내리교회 제공).
웨슬리 예배당 뒤쪽에서 찍은 사진(1955, 인천내리교회 제공).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인인 영화초등학교를 설립했으며, 한국 최초로 메시아 전곡을 발표하는 등 ‘최초’의 수식어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교회이다.

‘인천내리교회’ 뒤쪽으로 2011년에 신축한 ‘아펜젤러 비전센터’와 2013년에 복원 건축한 십자가형 ‘웨슬리 예배당’이 있다. 내리교회 2층에 있는 ‘역사사진갤러리’와 아펜젤러 비전센터 3층의 ‘내리역사전시관’에 들르고 싶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직접 가서 살피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다.

이곳을 탐방하고자 하는 분은 내리교회 홈페이지(http://naeri.co.kr)에 들어가 탐방신청서를 다운받아 3일 전에 신청하면 된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사진 촬영도 가능하다고 한다.

2011년에 신축한 아펜젤러 비전센터.
2011년에 신축한 아펜젤러 비전센터.

 

2013년에 복원 건축한 십자가형 ‘웨슬리 예배당’.
2013년에 복원 건축한 십자가형 ‘웨슬리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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