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옛 부두를 찾아서(1)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해양도시 인천’의 꿈

화도진에서부터 인천의 옛 부두를 따라 월미도까지 가보려 한다. 1990년대에 학생들을 모아 여러 번 기행안내를 한 적이 있다. 보통 동인천역에서 출발해 화도진, 화수부두, 만석부두, 괭이부리마을, 동일방직 등을 거쳐 화평동 세숫대야 냉면을 먹고 끝내는 코스였다. 이후에는 지인들이 안내해달라고 할 때와 사진을 찍으러 갈 때 가끔 들렀다.

인천 동수 만석·화수 해안산책로 사업계획도.(동구 제공)
인천 동수 만석·화수 해안산책로 사업계획도.(동구 제공)

세월이 흐르면 많은 것이 변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30년 동안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부두도, 공장들도, 철길도 변했지만 그래도 바닷가 정취만은 예전 그대로이다. 인천을 기행하며 계속 생각하지만 ‘해양도시 인천’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대부분의 바다는 철책으로 막혀있다.

그래서 인천 시민들은 인천이 해양도시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특히 자라나는 학생들은 해양과 관련된 인천을 직접 경험할 수조차 없으니 해양강국의 꿈은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부산에 이어 2대 항구도시인 인천에 국립 해양대학이나 수산대학이 없는 것을 보면 분통이 치밀어 오를 지경이다. 부산에는 국립 수산대학과 해양대학이, 목포에는 국립 해양대학이, 게다가 군산에도 국립 군산대 안에 해양과학대학 학부가 설치돼있다. 이런 실정이니 바다를 이용한 산업이 엄청난데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은 인천의 바다를 더 이상 삶의 공간으로 꿈꾸지 않는다.

마침 동구에서 만석·화수부두 해안산책로를 2028년 완공을 목표로 한창 조성 중이다. 만석동에 위치한 ‘삼미물류’, ‘인엑스물류’ 주변 도로를 거쳐 ‘태항조선’, 만석부두와 화수부두 해안에 이르는 전체 4.72㎞ 구간을 친수공간으로 조성하는 사업이다.

이 길이 완공되고 북성포구와도 연결되면 더욱 멋진 해안산책로가 될 것 같다. 이 길을 걷다보면 바다를 이용해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선박을 수리하고 건조하는 회사들이 있어 인천 사람들에게 특이한 볼거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화도진’의 설치

화도진(花島鎭)과 연희진(連喜鎭)의 설치는 구한말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운요호 사건(1875) 등 프랑스, 미국, 일본의 잇단 침략과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에 의해 이뤄진 부산항 개항 이후, 1878년(고종 16) 외국인들이 인천항을 개항 후보지로 요구할 것에 대비해 축조한 방어진지이다. 즉 일본이 험난한 강화 수로를 피해 인천을 통해 육로로 서울에 진입하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진(鎭)은 지방의 군사를 관리하던 지방관제의 하나인 진영(鎭營)인데, 진영을 맡고 있는 장수의 품계에 따라 주진(主鎭, 각 도에는 병마절도사가 지휘권을 행사), 거진(巨鎭, 목사·부사 등이 지휘권을 행사), 제진(諸鎭)으로 나뉜다. 화도진은 이것들 중 만호(萬戶, 각 도의 여러 진에 배치되었던 종사품의 무관 벼슬.), 도위(都尉)가 지방군의 지휘권을 행사하는 제진에 속했다.

화도진도(花島鎭圖) 화도진과 주변 관할 포대들.
화도진도(花島鎭圖) 화도진과 주변 관할 포대들.

실제 인천 연안에 방어 시설을 구축하기 위한 논의는 1877년 10월경부터 구체화됐으며, 조정에서 1878년 8월 27일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에게 진사(鎭舍)와 포대(砲臺) 축조공사를 맡겨 그 이듬해인 1879년 7월에 화도진이 완공된다. ‘화도진도(花島鎭圖)’에 보면 화도진과 화도진에서 관할하던 6개의 포대가 구체적으로 잘 그려져 있다.

포대는 그 명칭과 포좌의 방향과 포혈(砲穴, 포를 쏠 수 있게 뚫은 구멍)의 수를 그려 넣었다. 화도진 관할 포대는 만석동 괭이부리 선창 주변의 묘도북변포대 5혈과 묘도남변포대 5혈, 화수동과 송월동 해안 주변의 북성곳북변포대 3혈과 북성곳남변포대 5혈, 북성동 인천역과 해안동 고철부두 주변의 제물북변포대 8혈과 제물남변포대 5혈, 논현동 호구포대 5혈, 소래포구 주변의 장도포대 5혈 등이었다.

그러나 결국 부산항과 원산항에 이어 1883년 인천항이 강제로 개항돼 화도진의 역할이 축소되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3도 통제군과 각 도의 병영, 수영, 각 진영과 진보를 폐지하며 모든 군대가 군부에 소속되어 화도진도 철폐된다.

화도진의 건물도 지방 군사 조직인 지위연대의 예하부대가 월미도에 주둔하게 되면서 일부 건축물을 헐어 월미도 병영 건축에 사용했으며, 남은 건물은 해방 전 해안 매립 때 철거했다고 하는데 화도진에 설치된 안내문에는 갑오개혁 이후 불타 없어졌다고 적혀있다.

복원이 아닌 재현된 ‘화도진’

인천 동수 만석·화수 해안산책로 사업계획도.(동구 제공)
재현된 화도진지 전경.(동구 제공)

인천시 기념물 제2호인 ‘화도진지(花島鎭址, 화도진이 있던 터)’는 화수동 319-47번지 일대에 조성된 화도진공원 안에 깔끔하게 세워졌다. 화도진 복원에 대한 의견은 ‘한미수교 100주년’을 맞기 1년 전인 1981년에 있었는데, 인천시가 인천직할시로 독립한 해이다.

이때 지역과 국내 언론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장소가 화도진이라고 계속 게재되고 있어 당연히 인천으로서는 정체성을 찾는 방법으로 1982년 화도진 복원 계획을 수립한다.

이에 인천시는 화도 고갯마루에 빽빽이 들어선 가옥들을 매입하고 1987년 공사를 시작해 1989년 화도진 복원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복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향토사학자 고 이훈익 선생님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화도진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화도진 복원공사를 하기 전 ‘인천시사(1973)’와 동아일보 기사(1978), 인천시 발간 ‘문화재대관(1980)’에 이미 화도진 관아는 현재 위치에서 동쪽으로 20~30m 아래 주택가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도진 복원은 장소에 대한 고증이나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도 없이 급속하게 추진됐다. ‘한미수교 100주년’을 맞아 이를 강조하다보니 화도진의 역사적 가치에 치중하지 않고 조미수호조약이 체결 장소가 화수동 141번지라는 ‘인천시사(1973)’의 기록을 그대로 따른 것 같다.

현재 화수·화평지구 재개발사업을 맞아 화도진 관아의 원위치를 규명하고 발굴조사를 해야 한다는 각계의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지표조사와 발굴을 하면 많은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도진은 이제 복원이 아니라 재현이라는 말을 써야한다. 복원은 원래 상태가 존재해 이를 보수하고 정비해 원상태로 다시 유지하는 것을 일컫는다. ‘화도진도’를 통해서는 화도진 건물의 위치와 건물의 칸수 정도만 밝혀낼 수 있을 뿐 건물의 형태를 정확하게 실측할 수 없다.

또한 지어질 당시의 장소도 잘못됐을 뿐만 아니라 사용된 자재도 존재하지 않기에 복원이 아닌 재현이라고 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될 때 명칭을 ‘화도진’아니라 ‘화도진지’로 정한 것이다.

화도진지에서 본 ‘황해도 평산 소놀음굿’

'황해도 평산 소놀음굿 보존회' 주택.
'황해도 평산 소놀음굿 보존회' 주택.

사진을 저장해 둔 파일들이 다 날아가 복구할 수는 없지만 ‘화도진지’에 가면 1990년대 후반에 이곳에서 거행된 국가무형문화재 제90호인 ‘황해도 평산 소놀음굿’을 구경했던 광경이 잊히지 않는다. 마을민의 대동단결을 모색하고 풍농을 기원하며, 장사의 번창과 자손의 번영을 비는 굿이라는데 이를 주도하던 고 이선비 만신의 모습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분장한 소를 끌고 들어오는 모습부터 시작해 삼지창에 돼지를 꽂아 세우는 광경, 고 이선비 만신이 쌍작두 위에 맨발로 올라 그네를 타는 모습 등이 아직도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90호 ‘황해도평산소놀음굿’ 이수자 김혜숙 황해도만신이 쌍작두그네를 타는 모습(2015)
국가무형문화재 제90호 ‘황해도평산소놀음굿’ 이수자 김혜숙 황해도만신이 쌍작두그네를 타는 모습(2015)

당시 전국에서 쌍작두 그네를 타는 유일한 분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것보다 이선비 만신의 해맑은 웃음과 떡과 막걸리를 나눠주며 같이 먹어야 한다며 권하는 티 없이 맑은 눈빛이 더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하도 강렬한 인상을 받아서일까 이후에도 시간이 될 때 서너 번 더 구경을 갔었다. 이것이 호기심으로 변해 ‘서해안 풍어제’도 두세 차례 가서 보존회 분들과 이야기도 나누곤 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특히 만신들의 때 묻지 않은 수수한 모습과 힘들게 굿을 했음에도 궁금한 것을 물으면 맑은 눈빛으로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대답해주던 모습들이다. 화도진 정문에서 동쪽으로 내려가 한 블록 더 가면 골목길에 ‘황해도 평산 소놀음굿 보존회(화수동 225-1)’ 주택이 있어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화도진지’ 돌아보기

새로 만든 화도진 정문.
새로 만든 화도진 정문.
왼쪽 계단 위 대문으로 들어가면 내사, 오른쪽 건물은 화도진 정문과 연결된 사랑채.
왼쪽 계단 위 대문으로 들어가면 내사, 오른쪽 건물은 화도진 정문과 연결된 사랑채.

‘화도진지’는 ‘화도진도’를 보면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재현됐음을 알 수 있다. 화도진도서관 옆으로 새로 문을 달아 한글로 ‘화도진’이라 쓴 현판을 달았는데 이곳으로 들어가 길을 따라가다 왼쪽으로 꺾어지면 화도진 안내판이 있고, 바로 내사(內舍)로 들어가는 계단 위로 대문이 달린 건물이 나온다. 건물은 대문 좌우에 창고와 행랑채가 달려있다.

내사는 일반적으로 내아(內衙)라고도 하는데 지방관아에 있던 안채를 일컫는다. 안주인의 거처로 살림집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능상 비중이 크고 활용빈도가 높은 공간이다. 살림을 하는 공간이기에 밖으로 나가 장을 보는 등 일이 많아 직접 나갈 수 있게 따로 대문을 달고 행랑채를 둔 것이다.

‘ㄱ’자 내사(內舍) 건물.
‘ㄱ’자 내사(內舍) 건물.

건물 형식은 ‘ㄱ’자 건물로 정면 각각 3칸의 집을 맞붙인 형태이다 보니 맞붙은 공간 안쪽별도의 칸에는 안방을 두었고 부엌도 1칸을 두었다. 측면은 2칸으로 1칸은 툇마루를 둔 툇간으로 만들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살림집이기에 각 방과 대청에는 용도에 알맞게 살림살이가 놓여있으며 사람 모형도 만들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꾸며놓았다.

내사와 외사(外舍)인 동헌 건물 사이에는 6칸으로 된 창고 건물과 담장으로 공간을 구분했는데 외사로 연결된 문을 달았다. 문을 나가면 왼쪽 뒤로는 축대 위에 정원을 꾸미고, 여섯 개의 기둥에 짚으로 엮은 지붕 처마가 여섯 모가 되게 지은 정자인 육모정(六茅亭)이 있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했다.

외사인 동헌은 정면 6칸, 측면 3칸에 1칸은 툇간으로 툇마루를 두었으며, 격에 맞게 이익공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렸다. 가운데 대청에는 수령이 앉아서 행정업무나 재판을 하던 교의가 놓여있고, 왼쪽 방에는 사무나 응접을 하던 모습을, 오른쪽 방에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하는 장면을 재현했다. 예전에 조약을 조인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강의에 사용하기도 했었다.

재현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하는 장면.
재현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하는 장면.

그런데 문제는 2013년 실제 조약 체결 장소가 ‘인천해관장 사택 터(현재 리움 하우스웨딩 자리)’로 밝혀지며 고증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확정하고, 2019년 그 앞에 표지석을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동구에서는 이곳의 재현한 모습을 철거하지 않아 관람객들에게 그릇된 역사를 전달할 우려가 있다.

벌써 3년 전에 확정 표지석을 설치했음에도 늦장 행정 때문인지 아니면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인지. 우선 이곳에 조인 장면이 만들어진 이유라도 적은 안내판을 설치해야 할 것 같다.

동헌 마당에 있는 우물과 전시관으로 개조한 행랑채.
동헌 마당에 있는 우물과 전시관으로 개조한 행랑채.

동헌 마당 오른쪽 앞에는 우물이 설치돼있고, 그 옆으로 8칸의 행랑채를 재현했는데 전시관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주도했던 신헌과 슈펠트 흉상이 있고, 화도진 주변을 그린 화도진도가 걸려있다. 그리고 조선 무관의 복식과 그 당시 사용했던 다양한 무기들을 전시하고 있다. 또 신헌의 초상화 외에 화도진을 준공한 신정희의 초상화도 볼 수 있다.

마당 앞에는 중문이 있는데 왼쪽 2칸은 방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포졸과 화포 등 무기류를 전시하고 있다. 그런데 누가 장난을 쳤는지 포졸의 팔이 꺾여있고 앉은 자세가 매우 불편하게 보인다. 중문을 나오면 바로 ‘ㄱ’자 건물인 사랑채가 있고 정면으로 솟을삼문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화도진지’의 정문이다. 밖에 한자로 ‘花島鎭(화도진)’이라 쓴 현판이 걸려있다.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비와 대포들.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비와 대포들.

정문을 나와 왼쪽으로 한 단 내려가면 야외전시장에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82년 5월 22일에 세워진 기념비가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기념비 밑에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확인돼 인천해관장 사택 터에 기념비를 새로 설치해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는다는 표지판을 붙여놓았다. 또 기념비 옆에는 홍이포와 중포, 소포를 전시하고 있다.

화도진지 동쪽 아래에는 길을 내느라 콘크리트 축대로 담벼락을 올렸는데, 어영대장 축성 행렬 벽화가 그려져 있으니 구경하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동헌에 전시된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하는 장면, 전시관에 있는 조미수호통상조약과 관련된 자료와 흉상, 초상화 등도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시급하게 손을 보고 ‘화도진지’와 어울리는 내용으로 새롭게 단장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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