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개항장 기행] 각국 조계지 일대 탐방(4)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인천 최초의 영어학교 ‘Night English School’과 ‘고아원’ 개설

랜디스 박사는 장티푸스로 비록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8년 동안 마치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매우 정열적으로 일을 했다. 의료 선교활동 외에도 그는 1891년 2월 1일에 인천 최초의 영어학교인 ‘Night English School’을 열었다. 40명의 학생을 모집해 4개 반으로 나눠 주 6회,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하루 3시간씩 영어를 가르쳤다.

랜디스 박사와 함께 찍은 야간영어학교 학생들(1890~1892,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랜디스 박사와 함께 찍은 야간영어학교 학생들(1890~1892,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학생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며, 이중에 6~8명은 중국인이었다고 한다. 조선인에게도 영어를 가르치고자 했지만 영어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영어 성경반도 열었다.

특히, 영어 성경반을 통해 일본인들은 세상을 넓게 보는 시야를 갖추게 됐고, 이는 일제침략 아래 있는 현 조선의 상황의 부조리함에 대해 깨닫게 되는 계기도 됐다고 한다. 이후 영어학교의 기틀이 잡히자 다른 선교사에게 역할을 넘기고 본격적으로 조선인들을 위한 길을 걸었다.

랜디스가 인천에 온 지 두 해가 지난 1892년에 그에게 치료를 받던 여인이 임종을 맞이하게 되고, 그녀는 임종 전에 랜디스에게 홀로 남겨진 어린 아들을 돌봐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에 랜디스는 코프 주교와 상의하고 당시 여섯 살이던 아이를 양자로 키우기로 했다. 그와 더불어 5명의 다른 고아들도 함께 데려다 키우기로 결정했다.

랜디스는 특별히 고아원의 이름을 짓지 않았지만 양자와 고아들을 데려와 돌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인천에서 처음으로 개설된 고아원이다. 그는 환자들의 진료와 영어학교에서 보내는 시간 외에 아침저녁으로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돌보며 훈육도 했다.

이렇게 고아들에게 정성을 다하자 코프 주교는 1893년 ‘성누가병원’ 건너편에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새로 집을 얻어줬다. 이에 랜디스는 더 많은 아이들을 데려다 기르며 교육도 병행했다.

랜디스가 선교단에 보낸 편지에서 요청한 대로, 1897년 선교단이 지원해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송림동에 그의 거처를 마련했다. 이곳은 랜디스가 생각한 것처럼 아이들이 자라기 적합한 환경이었기에 그는 아이들과 함께 바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다음해 장티푸스에 걸리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랜디스는 자신이 양자로 키운 아들에게 바나바라는 세례명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결혼까지 시켰다. 그리고 함께 키우던 고아 예닐곱 명을 위한 작은 학교도 운영했으며, 아이들은 특히 랜디스에게 기초적인 의료 도우미 훈련을 받아 ‘어린 의사(the little doctor)’라고 불렸다고 한다.

한국학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

랜디스 박사가 쓴 각종 민속 설화로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내용이다.
랜디스 박사가 쓴 각종 민속 설화로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내용이다.
랜디스 박사가 속담에 대해 글을 써서 한국 최초의 영문 잡지인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기고한 글.
랜디스 박사가 속담에 대해 글을 써서 한국 최초의 영문 잡지인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기고한 글.

‘성누가병원’에서의 의료 활동, 영어학교와 고아들의 돌봄만으로도 한 사람이 감당하기 벅찼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문화에 관심이 깊어 인천에서 불과 8년 동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심도 있는 자료들을 많이 남겼다. 그의 높은 학구열과 언어 습득 능력이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우리말과 문화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했으며, 그 결과물인 조사 자료와 논문 등 24편을 미국의 잡지에 영문으로 기고했다. 이 자료들은 서구사회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학 연구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의 민속과 문학에 관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 가례(家禮), 동화, 한국의 귀신, 한의학, 동학사상, 속담연구 등에 있어서는 학자로서도 인정을 받았다.

이외에도 한문 해독 능력도 뛰어나 1895년에는 ‘로사라수트라(염주경)’ 등 불교 문헌 3편을 출판하기도 했으며, 1897년에는 동의보감 일부를 영어로 완역해 홍콩에서 발간되는 '차이나 리뷰(China Review)‘지에 싣기도 했다. 아마도 랜디스가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동의보감 전체가 영어로 완역됐을 것이다.

그는 고아원을 운영하며 많은 어린이들을 접해서인지 어린이들의 구비 전승 동요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한국 어린이들의 노래’라는 글을 쓰기도 했으며, 동요의 가사를 정확히 전하기 위해 로마자 표기법을 이용해 한국어 음운을 하나하나 적어놓았다. 그리고 가사에 주석까지 붙이는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랜디스는 임종 당시 그를 지켜줬던 트롤로프 주교에게 자신이 연구한 조선 관련 논문과 도서들을 처분해 달라고 유언을 했다. 당시 연구를 위해 수집했던 많은 서적과 집필한 책들은 대략 300여 권이었다.

이에 트롤로프 주교는 그가 소장했던 도서를 성공회 명의로 일괄 구매하고, ‘랜디스 기념 문고’(Landis Memorial Library)를 만들어 조선 관련 도서들을 보관했으며 일부 논문은 출판을 했다.

그러나 1941년 일제가 선교사들을 추방하자 트롤로프 주교는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에 기증해 ‘랜디스문고’에 보관했다. 당시 ‘랜디스문고’는 서양어로 저술한 한국학 문고 중 가장 포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연희전문학교에 ‘랜디스 문고’가 만들어진지 80년, ‘인천내동교회’나 성공회 측에서 보면 ‘랜디스문고’라는 엄청난 보물을 사장시키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연세대쪽과 만나 대여 형식으로라도 ‘랜디스문고’를 빌려와 교회에서 열람을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고요한(코프) 주교와 랜디스 박사 흉상.
고요한(코프) 주교와 랜디스 박사 흉상.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성미카엘성당(1953,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성미카엘성당(1953,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인천시 유형문화제 제51호인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 담장 밑의 화단에 고요한(Charles John Corfe) 주교와 랜디스(Eli Bar Landis) 박사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흉상 왼쪽에는 ‘인천 성공회(인천 최초의 성공회)’ 표지석이, 오른쪽으로는 ‘英國病院(영국병원)’ 표지석과 ‘의학박사엘리바랜디스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성미카엘성당’과 ‘성누가병원’을 세우고 의료선교활동으로 명성을 떨쳤던 두 분의 업적을 기리는 것이리라.

한국전쟁 때 송학동 3가 3번지에 있던 ‘성미카엘성당’이 폭격으로 파괴되자 당시 인천교회 사제였던 전세창(스테반) 신부는 ‘성누가병원’ 자리에 ‘인천내동교회’를 새로 건립한다. 이때 한국전쟁에 참여하고 영국으로 돌아간 영국 병사들과 유가족들이 전몰장병을 추모하고자 헌금을 모았고, 신자들도 성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1955년 8월 28일 현재의 교회 건물 주춧돌을 놓는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했는데, 차애덕(車愛德, Arthur Earnest Chadwell) 주교가 정초석을 놓는 행사를 주관했다. 이후 1956년 6월 23일 건물을 완공해 축성식을 가졌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화강암으로 육중하게 지었는데 양쪽 벽면은 길게 붉은 벽돌로 쌓았으며 채광을 위해 벽체의 3분의 1 정도는 십자로 열을 맞춰 구멍을 냈다.

정면으로 보이는 종탑 아래 왼쪽으로 교회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교회 내부로 들어가니 중앙의 높은 지붕을 받치는 십자모양의 기둥들이 늘어서 있고, 공간을 넓히기 위해 기둥 바깥으로 지붕을 붙여 만든 벽체와 창문이 보인다. 창문은 밖의 붉은 벽돌에 구멍을 뚫어 빛이 들어오게 만들어 자연스럽게 십자가 문양들을 만들지만 그만큼 빛이 적게 들어와 전체적으로는 어두운 느낌이다.

제단이 있는 곳에 만들어진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제단이 있는 곳에 만들어진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제단이 있는 정면의 반원형 벽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세 개 있는데, 처음 지어졌을 때 좁은 창살 간격과는 다르게 가로 세로로 삼단의 창살을 달았다. 가운데 창문에는 예수가 양팔을 들어 올려 신자를 맞이하는 자세를, 양옆 창문에는 예수를 찬양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신부님 말씀으로는 아침 햇살이 들어올 때 장관이라고 하는데 언젠가 아침에 가서 멋진 광경을 직접 봐야 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성당을 지을 때 제단이 있는 방향은 동쪽으로, 입구는 서쪽을 향한다. 이유는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주님께 향하고, 주님을 기다리며, 우주의 질서에 동참한다는 근본적인 진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인천내동교회’는 제단은 북동쪽을, 입구는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아마도 답동성당처럼 넓은 터가 아니라 언덕 위 협소한 지형에 건축했기 때문일 것이다.

돌로 지어진 집임에도 천장은 목조로 했기에 눈에 확 들어오는데, 널판을 잇대고 3각형 형태의 나무로 짜서 받치는 일종의 트러스 구조를 하고 있다. 천장, 2층 성가대 자리, 입구의 문, 신도들이 앉는 긴 의자 등 시설물들을 고동색의 나무빛깔로 일치시켜 엄숙하면서도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천내동교회’는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인 처마를 적용했고, 한국 고유의 맞배지붕을 본 따 기와를 얹어 동서양의 건축미가 조화를 잘 이룬 건물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인천내동교회’는 로마 말기에 그리스도교의 성당으로 지어진 초기 교회양식인 바실리카 양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아마도 기와를 올린 지붕형태, 지붕과 처마 밑에 튀어나온 나무 등 처마 끝을 장식하는 코니스 부분이 우리 전통 한옥 방식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나온 것 같다.

이외에도 사제관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들이 있는데, 성당 뒤편에 있는 사제관은 과거 사진을 봤을 때 성당건물과 같이 지어졌던 것 같다. 개항장을 안내하면 꼭 들러보는 장소 중 하나이다.

어느 해인가 4월 18일에 사람들을 안내하러 갔을 때 성당 전면에 세월호 리본 현수막이 커다랗게 걸려있어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성공회 성당에서 세월호에 희생당한 분들을 추모하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아리며 눈물이 핑 돌았다.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빨간 벽돌 벽면. 중간에 십자 모양 채광 구멍이 나있다.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빨간 벽돌 벽면. 중간에 십자 모양 채광 구멍이 나있다.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전경.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전경.

‘성미가엘 종합사회복지관’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가장 낮은 곳, 가장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하는 것이 종교의 본연일 것이다. 이곳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도 ‘성미카엘성당’과 ‘성누가병원’에서 행했던 병자와 고아를 돌보던 정신을 되살렸다.

성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부족한 예산을 교인들이 십시일반 모으고, 예산 절감을 위해 손수 벽돌과 모래를 이고, 지고, 날라 사제관 너머 홍예문으로 올라가는 길에 1993년 7월 ‘성미가엘 종합사회복지관’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사회 복지사업을 시행했다.

아마도 복지관이 설립된 초반기였던 것 같다. 이곳에 근무하던 사회복지사 한 분이 인천 향토를 배워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다고 우리가 운영하는 ‘인천향토교육연구회’를 찾아왔다. 2년 정도 열정적으로 같이 공부하고 답사도 다녔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복지관을 찾아가 학생들도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기행 안내도 했다.

현재 국가에서 담당하는 복지 분야가 다양해져 일들이 많이 줄었지만, 이곳 복지관에서는 아동·청소년과 성인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다. 특히 아동발달지원사업과 아동청소년심리지원서비스, 방과후아동공부방, 성인문해교실 주부대학, 무료경로식당 등을 운영해 지역사회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인지·언어치료실, 미술치료실, 상담실 등을 설치해 운영할 뿐 아니라, 푸드뱅크와 푸드마켓도 운영하며 자원봉사단과 후원회를 조직해 어려운 이웃을 직접 찾아가고 있다. 명실상부 지역사회에서 복지의 중심 센터로서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성미가엘 종합사회복지관.
성미가엘 종합사회복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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