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개항장 기행] 일본조계지 일대 탐방(6)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 ‘대불호텔’

인천개항박물관(구 인천일본제1은행지점)에서 차이나타운 방향으로 가다보면 청일조계지를 경계 짓는 넓은 도로에 인접해 대불호텔(현재 대불호텔전시관)이 있다. 이 도로 아래쪽 끝에는 제물포항이 위치했고, 당연히 승객과 화물은 항구 바로 앞에 있는 인천해관을 거쳐 이동했다. 인천해관에서 불과 100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경사로 위에 대불호텔이 있어 투숙객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대불호텔은 일반적으로 1888년에 영업을 시작했다고 알려졌으나, 당시 호텔을 찾은 외국인 기록을 보면 1884년경 2층의 일본식 목조가옥으로 숙박업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 높은 건물이 대불호텔(1896년경, 대불호텔 전시관).
왼쪽 높은 건물이 대불호텔(1896년경, 대불호텔 전시관).

“당시 제물포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세운 극히 소수의 오두막집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우리는 소위 고급이라는 라이부츠(大佛)나 해리스(Harris)호텔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 1885년 4월 5일 도착. ‘언더우드 언더우드 회상기’, “나의 숙소는 일본인 거류지에서 단 한 채밖에 없는 2층집의 위층이었다. 앞의 창문을 통해서 바다의 전경이 내다보이며 마루 건너에 집주인과 그의 친구가 살고 있었다” - 1885년 5월 도착. 칼스 ‘조선 풍물지’ 등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은 일본명으로 ‘다이부츠(大佛, DAIBUTSU) 호텔’이라 불렀다. 나가사키 출신 무역상이며 해운업자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가 세우고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체구가 크고 뚱뚱했던 호리는 큰 부처상 같다고 다이부츠(大佛)라고 불렸는데, 그 별명을 그대로 호텔 이름으로 정했다고 한다.

이후 대불호텔은 1887년에 새로 짓기 시작해, 지금 재현한 건물과 같은 모습인 3층 벽돌조 건물에서 1888년부터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이런 내용은 ‘인천부사(仁川府史)’(1933)에 “메이지20년(1887)부터 이듬해에 걸쳐 벽돌조의 서양식 3층 가옥(現在 本町通 1-18번지 소재의 中華樓)을 새로 지었다. 상호는 호리 히사타로의 풍모를 고려하여 대불호텔(大佛ホテル)이라는 상호를 붙였다”라고 적혀있다.

10여 년 이상 개항장을 대표하던 대불호텔은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되며 쇠락하기 시작했다. 배를 통해 들어오는 외국인들은 더 이상 인천에서 묵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들은 하선 후 바로 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떠났다. 게다가 러일전쟁(1904~1905) 이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던 외국인도 줄어 경영 위기가 닥치자 1907년경 폐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화루’ 개업과 ‘대불호텔 전시관’

대불호텔 전시관 안에 재현된 대불호텔의 객실.
대불호텔 전시관 안에 재현된 대불호텔의 객실.

대불호텔이 문을 닫은 후 건물이 몇 차례 전세로 임대되다가 1918년경 호리 히사타로의 아들 호리 리키타로(掘力太郞)가 라이샤오징(賴紹晶, 뢰소정)을 비롯한 산동성 푸산현(福山縣, 복산현) 출신 동업자 40여 명이 공동출자한 중국인들에게 매각했다. 이후 ‘중화루(中華樓)’란 이름의 북경요리점으로 운영됐다.

‘중화루’에선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북경에서 주사부라고 불리던 일급주방장을 초빙했다. 그가 만든 북경요리는 인천은 물론 당시 경성의 부자들에게도 소문이나 전국 각지에서 미식가들이 찾아왔고, 경성까지 요리를 배달했다고도 한다. 결국 ‘중화루’는 인근 공화춘(共和春), 동흥루(同興樓)와 함께 인천 3대 중국요리점으로 명성을 날렸다.

중화루를 세우고 한국 유수의 청요리집으로 발전시켰던 라이(賴) 가문이 195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북경요리 전문점 중화루의 명성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1년 ‘외국인토지법’이 제정돼 토지소유가 제한되고, 1962년 화폐개혁으로 화교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면서 화교들의 숫자가 줄었으며, 결국 ‘중화루’도 1970년 초 문을 닫았다.

가게가 문을 닫은 후 건물에는 화교들이 세를 들어 살며 건물이 퇴락했고, 1978년 주안의 현 모씨가 호텔을 세우기 위해 1400만원에 건물을 매입한 뒤 그해 7월 철거했다. 중화루가 문을 닫은 후에도 건물 외벽에는 중화루라 쓴 커다란 간판이 여전히 걸려 있었는데 이 간판은 나중에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됐다.

대불호텔 전시관.
대불호텔 전시관.

철거된 후 중화루 터는 주차장으로 사용되다가, 2011년 5월 상가 신축공사를 하던 중 벽돌을 쌓아 만든 대불호텔 터가 발견돼 문화재청이 보존을 추진했다. 이에 땅 소유주가 문화재로 활용하라는 취지로 인천 중구에 기부 채납했으며, 2013년 중구는 터 위에 대불호텔 건물 재현 사업을 추진해 2018년 ‘대불호텔 전시관’을 완공했다. 건물 재현 당시 설계도면도 없는 상태에서 중구청장이 강행해 짝퉁 복원이라는 논란이 일었다.

현재 ‘대불호텔 전시관’은 3층으로 구성됐는데, 1층은 대불호텔 터에서 발견된 호텔의 기초부와 대불호텔에서 중화루로, 그리고 철거되기까지의 역사와 영상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2층은 재현된 대불호텔의 객실과 대불호텔과 함께 다른 호텔과 여관 등 숙박업소의 운영방식, 이용요금, 제공된 서비스와 관련된 내용, 그 당시 물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3층에는 연회장을 재현했는데, 음식과 음악을 제공하는 사교의 장이었다고 한다.

‘인천 관동교회’와 ‘인천 구 대화조 사무소’

인천 관동교회와 인천 구 대화조 사무소.
인천 관동교회와 인천 구 대화조 사무소.

대불호텔 전시관에서 한 블록 올라가면 영사관(領事館)거리가 나온다. 건물들의 외양에 급경사로 처마를 달아 일본식 주택을 흉내만 내어 어설프고 낯선 풍경인데, 오히려 건축 당시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 두 채가 눈에 띈다. 두 건물이 나란히 붙어있는데 ‘인천 관동교회’와 ‘인천 구 대화조(大和組) 사무소’이다.

1954년에 세워진 ‘인천 관동교회’는 2008년에 새로 신축했지만, 교회 정면과 입구는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특히 정면 빛이 바랜 붉은 색 벽돌과 위에 우뚝 솟은 십자가가 고풍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어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이 건물이 신축된 것을 알려면 옆에서 바라보면 된다. 정면 색이 바랜 붉은 벽돌과 다르게 측면은 새 벽돌을 사용하고 있어 육안으로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249호인 ‘인천 구 대화조 사무소’는 1880년대 말에서 189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로 추정한다. 이 건물은 일본 야마구치 출신의 사업가 히로이케 데시로가 건립한 ‘야마토쿠미(大和組)’라는 하역업을 하던 하역회사 사무소 건물로, 근대 일본 상가 겸용 주택의 하나인 마찌야(町家, 정가) 유형의 건물이다.

카페 팟알 1층 내부 전경.
카페 팟알 1층 내부 전경.

2012년 이 건물을 보존하며 복원공사를 할 때 1층 평면도를 보면 본채 앞부분은 점포로, 뒷부분은 방과 부엌이 설치된 것이 보인다. 언제 이런 구조로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후에 바닥 난방과 벽체 보강을 하며 구획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안뜰 위쪽 구석에 있는 욕실도 목구조인 본 건물과는 다르게 조적조(組積造)인 것으로 보아, 한참 후에 필요에 의해 지어졌을 것이라 한다.

또 2층 보강공사를 할 때 내벽면을 뜯어내던 중 오사카상선(大阪商船, 대판상선)주식회사가 메이지 34년과 35년 (1901년, 1902년)에 출항하던 지점망을 안내하는 포스터가 나왔다. 결국 이 건물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120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3층 벽면에는 짓궂은 낙서가 그려져 있는데, 이 집의 역사성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부분이라 벽을 허물거나 덮어버리지 않고 유리로 보존했다.

3층으로 된 마찌야 양식의 이 건물은 인천에 유일하게 남아있으며, 전국에서도 보기가 드문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인천항 하역노동자의 노동력착취 현장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고, 건물이 지어진 초기의 모습이 잘 보존돼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카페 팟알 2층 다다미방.
카페 팟알 2층 다다미방.

이 건물 복원공사가 끝나고 2012년에 ‘카페 팟알’을 개업하기 전에 건물 2층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1층은 카페로, 2~3층은 게스트하우스로 하면 어떨까라는 사장님의 사업계획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는데, 의외로 다다미방의 잠자리가 쾌적해서 개항장을 찾아오는 가족들을 위한 잠자리로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다만 샤워시설을 어떻게든 갖춰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목조건축이라 숙박업을 같이 하려면 소방시설을 새로 추가해야 하며, 비용이 많이 들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카페 팟알’은 130여 년 된 건물의 분위기만이 아니라 각종 음료 외에 단팥죽·팥빙수·카스테라를 한정수량으로 판매하고 있다. 1층에는 개항장과 관련된 각종 엽서와 사진·책자 등을 전시하고 판매도 하고 있어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과거로의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2~3층의 다다미방도 미리 예약을 하면 이용할 수 있으며, 그냥 둘러볼 수도 있다. 차 한 잔의 여유와 함께 개항기의 온전한 일본식 주택을 경험하며 과거로의 여행을 가보길 권한다.

‘일본영사관’ 터에 지어진 ‘구 인천부 청사’

일본영사관(인천시 제공).
일본영사관(인천시 제공).

국가등록문화재 제249호인 '구 인천부 청사(舊 仁川府 廳舍)'는 ‘일본영사관’이 있던 자리에 지은 중구청 본관 건물이다. 인천이 개항되자 일본은 1883년 10월 31일 다른 나라보다 가장 먼저 영사관을 설치했으며, 1884년 10월 31일 건물을 준공한다. 영사관 안에 재판소와 경찰서·소방서·우편국 등을 설치했다.

영사관 건물은 정면 2층에 난간이 있는 발코니를 설치했는데, 르네상스 양식에 가까운 서양 건축물을 본떴지만 시멘트나 벽돌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시기라 당시에 유행하던 의양풍(擬洋風, 일본 전통건축의 관점으로 서양의 건축양식을 보고 모방한 건축양식) 건축양식으로 목조건물을 지었다. 외벽은 목조 비늘판 벽으로 마감했으며, 지붕은 모임지붕 위에 일본식 기와를 올렸다.

이후 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1906년 이 건물의 이름을 '인천이사청‘으로,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1910년엔 '인천부청'으로 각각 바꾼다. 말이 일본영사관, 인천이사청, 인천부청이었지 실은 조선침략을 위한 전초기지이자 인천시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식민통치 기관이었다. 이후 1930년대 전국적으로 각 도·부청사의 신축이 진행되면서 ‘인천부청’ 역시 1932년 8월에 철거되고, 새로 신축해 1933년 6월 25일에 준공된다.

건물의 주요 구조는 철근콘크리트였으나, 외벽체는 벽돌조로 구성됐고, 내부의 일부 벽체는 목골철망(木骨鐵網)벽체로 구성됐다. 2층으로 지어진 청사의 평면은 一자 형태를 기본으로, 1층과 2층을 경계 짓는 부분은 조금씩 튀어나온 형태로 지어졌다. 1937년에는 청사 양 옆으로 동서별관이 들어섰다.

광복 후 이 건물은 인천시청으로 사용하다 1964년엔 본관을 3층으로 증축했으며, 1985년 인천시청이 구월동 청사로 이전하자 중구청이 들어와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후 중구의 행정수요가 점점 늘면서 1987년 북별관, 1988년 월디관, 2004년 의회청사를 신축해 5개의 건물이 본관을 둘러싼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신축한 인천부청(인천광역시 제공).
신축한 인천부청(인천광역시 제공).
중구청(구 인천부 청사).
중구청(구 인천부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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