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개항장 기행] 각국 조계지 일대 탐방(6)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파란 대문 위의 조각상

파란 대문 집 위에 올라가 있던 조각상.
파란 대문 집 위에 올라가 있던 조각상.

‘성미가엘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자유공원 방향으로 길이 굽이도는 곳에 파란 대문을 달은 집이 있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는 대문 위의 멋진 조각상, 가슴을 활짝 펴고 온 세상의 기운을 흠뻑 들이마실 것처럼 당당하게 서있다.

마치 조각상의 활기찬 기운이 내게 전달되듯 가슴이 두근거리며 나도 모르게 조각상의 자세를 취하고 힘껏 숨을 들이킨다.

예전에 이곳은 잠시 카페를 했었다. 그런데 갈 때마다 문이 닫혀있어 ‘언제 들어가 보나’하며 아쉽게 지나치곤 했는데, 어느 날 대문이 열려있어 들어간 적이 있다.

마당에 온갖 조각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각가가 살고 있는 것 같다. 조각상들을 살펴보고 마당 끝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다 넋을 잃었다. 동인천 쪽 시가지의 풍광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곳에 살며 풍광이 보이는 마당에 앉아 식사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상상도 했다. 그런데 이 집이 팔린 것 같다. 조각품들만 아니라 파란 대문도 사라졌고, 마당은 콘크리트를 입히고 말리는 중이다.

조각상이 사라져 다시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크지만 시가지 풍광은 사라지지 않으니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는 카페 혹은 개인 주택이 들어서면 좋겠다. 그러면 이 근방에서 가장 멋진 풍광을 가진 집들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홍예문 위에 있는 ‘인천세관용지와 철이십일’ 표지석

홍예문 위에서 바라본 인천항 쪽 전경.
홍예문 위에서 바라본 인천항 쪽 전경.
홍예문 위에서 바라본 전동 쪽 전경.
홍예문 위에서 바라본 전동 쪽 전경.

홍예문은 일본인들이 전동과 만석동으로 거류지를 확대하기 위해 뚫은 석문이지만 그 위는 각국 조계와 측후소로 가는 길로도 이용했다. 홍예문 위에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철책을 둘렀는데 이곳 양쪽으로 바라보는 풍광 또한 매우 좋았던 곳이다. 그렇지만 도심의 발달로 건물들이 층고를 높여 지금은 아쉽게도 예전의 탁 트인 풍광을 볼 수가 없다.

그래도 인천항 쪽을 바라보면 길이 끝나는 곳에 인천중부소방서가 보이고, 그 뒤로 파란 지붕의 인천세관 건물, 인천항 1부두, 그리고 멀리 연안부두 종합어시장 앞에 있는 라이프아파트와 오른쪽으로 CJ대한통운 사이로 보세창구, 왼쪽 뒤로는 남항 컨테이너 부두가 아스라이 보이는데 건물들 뒤로 가물가물 인천대교가 가로지르고 있다.

반대편으로 바라보면 전동의 다양한 주택들과 인일여고 운동장, 노란 건물의 화도교회, 화수부두 공장 지붕들, 그리고 그 너머로 청라지구의 아파트들이 보인다.

홍예문 길을 건너면 바로 오른쪽에 표지석 두 개가 서 있다. 왼쪽의 ‘인천세관용지(仁川稅關用地)’ 표지석은 인천세관 구역 내 경계를 표시할 용도로 세워진 것이라 하는데 이곳에 왜 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오른쪽의 ‘철이십일(鐵貳十壹)’ 표지석은 홍예문을 착공하고 공사를 관리했던 일본 철도 공병대가 관리번호를 지정해 세워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안내판이 없어 처음 보는 이들은 ‘왜 이곳에 이런 표지석이 있지’하며 생뚱맞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홍예문 위에 있는 인천세관용지와 철이십일 표지석.
홍예문 위에 있는 인천세관용지와 철이십일 표지석.

세창양행 사택의 주춧돌

홍예문아파트 옆으로 카페 ‘파랑돌’이 있다. 이곳이 아마 인천항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소일 것 같다. 1·2층 모두 인천항 쪽 벽면 전체를 유리창으로 만들었다. 창밖을 보면 거칠 것 없이 왼쪽으로 송도국제도시부터 멀리 오른쪽으로 용유도가 보이고 가까이는 인천제일교회의 첨탑과 그 너머로 월미도 전망대도 보인다.

1층보다는 2층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더 잘 보여 차 한 잔 시켜놓고 앉아있으면 시간이 어찌나 빨리 흘러가는지, 한 번은 꼭 들어가 창가에 앉아보길 권한다.

카페 파랑돌에서 바라보는 인천항 전경.
카페 파랑돌에서 바라보는 인천항 전경.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wknd(위크엔드 라운지)’라는 카페 건물 맞은편 숲속에 세창양행 사택의 주춧돌이라 알려진 둥그런 돌들이 일렬로 6개가 늘어서 있다. 크기는 모두 비슷한데 주춧돌의 윗부분은 조금씩 다르다.

하나는 기둥을 올릴 자리를 둥그런 모양으로 어느 정도 깊이 있게 홈을 팠고, 하나는 살짝 홈을 파고 일렬로 기둥을 연결할 구멍을 3개 팠다. 나머지 주춧돌 4개는 선으로 그은 듯이 둥근 홈을 만들고 기둥을 연결하려 구멍 1개를 중심으로 주위에 삼각형으로 구멍 3개를 판 것과 가운데에 구멍을 하나만 판 것도 있다.

이곳 역시 안내판이 없어 세창양행 사택의 주춧돌이라 추정만 할뿐이다. 분명 관에서 하는 공사 중에 옮겼을 것인데 아무런 설명도 없으니 나중에 이 주춧돌 자리에 건물이 있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이곳엔 어린이헌장비와 인천로타리클럽에서 세운 포웨이테스트비, 식수기념비, 백봉규송덕비와 그 뒤로 철탑의 받침돌이 있다. 숲을 나오면 그 위로 <KBS> 송학TV 중계소 철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세워져있다.

세창양행 사택 주춧돌로 추정되는 돌들.
세창양행 사택 주춧돌로 추정되는 돌들.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

방송탑이 보이는 곳에서 왼쪽 자유공원 남로로 접어들면 자유공원 새장 쪽으로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이 보인다. 학도의용대를 표시하기 위해 연필 모양의 조형물을 만들었고 그 뒤에는 명비를 만들어 이름을 새겼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미군이 38선을 넘어 승전을 앞두고 중공군이 개입해 전세가 다시 역전, 전선이 뒤로 후퇴하게 된다.

이에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 3천여 명은 축현초등학교에 집결, 출정식을 갖고 마산까지 남하해 1951년 1월 600여 명은 해병대로, 1300여 명은 부산에서 육군으로 자원입대한다.

이후 수많은 전투에서 200여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내며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쳤다. 이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넋을 추모하고자 ‘인천학도의용대 6.25참전회’에서 2000년 8월 31일 이곳에 호국기념탑을 세웠다.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

각국조계지 계단 제일 위에 있던 ‘헨켈 주택’

호국기념탑에서 100m 정도 내려가면 길모퉁이에 공영주차장과 인천제일교회가 마주보고 있다. 교회 건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각국조계지 계단이라 불렀는데, 계단 바로 오른쪽이 ‘헨켈 주택’이 있던 자리다. 현재 이곳은 인천제일교회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헨켈 주택 자리에 들어선 인천제일교회 교육관.
헨켈 주택 자리에 들어선 인천제일교회 교육관.

제2의 세창양행 사택이라 불렸던 ‘헨켈(Henkel) 주택’은 1895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집은 세창양행의 전신인 마이야양행의 사원인 독일인 뤼일리스(Luhrs)가 인천에서 결혼하면서 신혼 살림집으로 신축한 주택이다. 건물은 외관상 빼어나게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벽돌의 질감을 잘 살린 단층 건물로 인천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각별한 집으로 알려졌다.

뤼일리스의 뒤를 이어 세창양행(‘개항과 양관역정’에는 월터양행으로 기록됨)의 간부사원으로 헤르만 헨켈(H. Henkel)이 조선에 부임해 왔을 때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 한다. 같은 독일인이 살았던 터라 믿음이 있기도 했지만 인천항을 바라보는 조망이 워낙 뛰어나 인천을 대표하는 양관으로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헨켈이 사는 집이라 해 ‘헨켈 주택’이라 불렸다.

최성연의 ‘開港과 洋館歷程(개항과 양관역정)’을 보면 헨켈이 사망한 후 그의 부인 안나 헨켈은 사고무친의 고독감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망, 일본의 전세(戰勢)가 기울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지방으로 소개(疏開) 분위기 등으로 수녀원에 의뢰해 같은 교도인 김부영 여사에게 싼값에 매각한다.

그러나 바로 일본이 패망하자 다시 인천에 정착하려 소송을 걸었으나 불리함을 알고 결국 소송을 포기하고 한국을 떠났다 한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헨켈 주택’은 한국 전쟁 당시 폭격으로 지붕 상부가 파괴돼 벽체와 굴뚝만 남았다가, 후에 벽체도 일부 파손됐으나 한쪽 지붕만 임시로 수리해 사람이 거주했다.

오른쪽 한국전쟁 시 폭격으로 부서진 헨켈 저택, 이런 풍광이 집에서도 보였을 것이다.( 1952.10 Thomas W. Th)
오른쪽 한국전쟁 시 폭격으로 부서진 헨켈 저택, 이런 풍광이 집에서도 보였을 것이다.( 1952.10 Thomas W. Th)
한국전쟁 후 지붕을 보수한 헨켈 주택(1953, Royce Raven 촬영).
한국전쟁 후 지붕을 보수한 헨켈 주택(1953, Royce Raven 촬영).

이 터는 나중에 아담한 양옥으로 다시 지어서 인천항의 하역업체인 우련통운 배인복 사장이 살다가 작고한 후 한동안 빈집으로 방치됐다. 이후 인천제일교회가 인수해 새로 건물을 짓고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다. 짧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파란 대문 집이 순식간에 주인이 바뀌어 공사에 들어가는 것을 눈앞에서 봤는데, 하물며 백 년도 훨씬 넘는 세월의 저편에서 만든 건축물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다만 사라지고 흔적만 남았더라도 과거에 이곳에 어떤 것이 있었다는 것과, 왜 이곳에 이런 흔적이 남아있는지 과거의 사진과 함께 설명하는 안내판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다. 이를 통해 백여 년 전의 시공으로 순간 이동하고 싶은 건 나만의 욕심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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