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옛 부두를 찾아서(2)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무네미 마을(화수동) 쌍우물’

‘화도진도’에 보면 괭이부리(猫島) 방향으로 둔덕 아래쪽으로 우물 표시가 있고 집에 댓 채 그려져 있다. 이 우물은 구전에 의하면 19세기 말 화도진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과 인근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인천 향토지에는 무네미 어귀에 쌍으로 우물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 이를 ‘화수동 쌍우물(화수동 107-2)’이라 부른다.

‘화수동(花水洞)’은 본래 화평동, 만석동과 함께 인천부 다소면(多所面) 고잔리(古殘里)에 속한 마을이었다. 일제는 1914년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조선총독부가 주도해 대규모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군면(府郡面) 통폐합이다.

무네미 마을 쌍우물. 왼쪽이 원래 있던 우물이고 오른쪽은 2015년 재현한 우물.
무네미 마을 쌍우물. 왼쪽이 원래 있던 우물이고 오른쪽은 2015년 재현한 우물.

이때 신촌리(新村里), 화도동(花島洞), 수유리(水踰里)를 병합하여 세 마을 이름 첫 자를 따서 신화수(新花水)라 고쳤다가, 1946년 광복과 더불어 동명 개칭으로 화수동으로 바꿨다.

지명이 모두 한자로 돼있지만 당시 민중들에게는 우리말로 불렸다. 신촌(新村)은 새로 생긴 마을로 새말, 새마을, 신기 등으로 불렸으며, 화도(花島)는 마을 지형이 꽃과 같다거나 꽃이 많아 붙여진 땅이름이라고 해설하기도 한다.

물론 고잔(古殘)이 ‘곶(串)의 안쪽마을’을 뜻하는 것으로 ‘곶마을’이 된 것처럼 ‘곶섬’이 ‘꽃섬’, 즉 한자인 ‘화도(花島)’로 변천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수유리(水踰里)는 과거 이 지역에 바닷물이 넘어 들어왔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무네미, 물넘이말이라고 불렸다.

아무튼 이곳에 우물이 현재 2개가 있다. 원래 쌍우물 중 1개는 현존하는 우물 건너편 화수설비 건물 내에 있었으나 주택이 들어서면서 사라졌고, 2015년 6월 현존하는 우물이 있는 건물 옆 개인주택 앞에 작은 우물을 재현했다. 이곳에서는 매년 화수2동 동민의 날을 맞아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쌍우물제’를 개최하는데,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잠시 행사를 멈추고 있다.

전설에 나오는 화도진 군졸 동이. 현재 동구를 지키는 캐릭터로 사용.
전설에 나오는 화도진 군졸 동이. 현재 동구를 지키는 캐릭터로 사용.

이곳 쌍우물에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화도진에 배속됐던 군졸 ‘동이’와 얽힌 이야기이다. ‘동이’는 쌍우물로 물지게를 지고 나르면서 마을처녀 ‘정이’와 눈이 맞아 사랑에 빠져 혼인을 맹세하게 된다.

그러나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자 화도진을 축조했던 어영대장 신정희 장군의 휘하로 차출돼 전투 중 사망했다는 소문이 돈다. 이에 ‘정이’는 망연자실한 나날을 보내다 부모가 정해준 혼처로 마음에도 없는 시집을 가야하는 딱한 처지에 놓인다.

결국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던 ‘정이’는 쌍우물이 영험하다는 이웃집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서 쌍우물에서 길어온 정갈한 물 한 사발을 놓고 새벽마다 소원을 빌었다. 그런지 두 달 만에 죽은 줄 알았던 ‘동이’가 오히려 공을 세워 나라로부터 큰 상을 받고 무네미에 나타나 ‘정이’를 데려갔으며, 아들만 내리 셋을 낳고 잘 살았다고 한다.

철거될 위기에 놓인 ‘미문의 일꾼교회’

미문의 일꾼교회. 앞에 하얀 목조건물이 교회로 들어가는 출입구.
미문의 일꾼교회. 앞에 하얀 목조건물이 교회로 들어가는 출입구.

쌍우물이 있는 곳에서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담쟁이덩굴로 온통 뒤덮인 2층짜리 범상치 않은 교회 건물(화수동 183번지)이 보인다. 덩굴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기독교 대한감리회 일꾼교회, 사회복지선교회’라 적혀있다.

흔히들 ‘미문의 일꾼교회(과거 인천도시산업선교회)’라 부르는데 ‘미문(美門, Beautiful Gate)’은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던 하반신마비인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일으킨 예루살렘 성전 동편 문을 일컫는다. 그리고 일꾼은 노동자를 의미한다.

현재 인천의 원도심과 구도심은 한창 개발의 열풍이 불고 있다. 이곳 역시 현대건설을 시공사로 ‘화수화평 재개발사업’이 진행 중이다. 이 일대 5만4751평(180,998㎡)에 지상 40층 규모 아파트 31개동을 짓는 사업인데, 2021년 6월 23일 인천시 도시계획위원회는 이 사업계획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인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대표되는 ‘미문의 일꾼교회’ 건물이 철거될 위기에 놓여있다.

이에 2021년 7월 13일 인천지역 78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인천시청 본관 앞에서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존치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을 열어 철거의 부당함을 알렸다.

목조건물 내부에 전시된 사진과 자료들.
목조건물 내부에 전시된 사진과 자료들.

개항 이후 간척사업이 진행된 만석동 일대와 화수동에는 일제 때 공장들이 들어서며 조선인 노동자들이, 한국전쟁 이후에는 피난민들이 들어와 주변에 마을을 이뤘다. 이곳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근대까지 노동자들의 애환이 담긴 곳으로, 근대 노동운동의 중심에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미문의 일꾼교회’를 찾아서

‘미문의 일꾼교회’를 찾은 날이 3월 15일, 교회 안에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현 미문의 일꾼교회)’ 존치를 위한 단식농성 234일차였다. 벌써 4월이니 릴레이 단식도 250일이 넘고 있다. 마침 기독교 도시산업선교회 기념관 김도진 목사를 만나 건물 안내를 받았다. 게다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60년사>, <한국 민주주의의 친구 조지 오글>, <노동자의 길> 등 소중한 책자를 선물로 받았다.

1층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 목조건물 내부 3면에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역사와 활동을 기록한 소중한 사진들과 설명이 전시돼있다. 하나하나 설명을 듣고 싶었지만 일정이 계속 있어서 목사의 안내하는 대로 그냥 따르기로 하고 사진을 찍어 확인하기로 했다. 사진을 근접촬영하고 싶은데 유리 액자에 투영된 빛으로 인해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아 벽면 단위로 촬영을 했다.

예배당 안에서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존치를 위한 릴레이 단식농성 234 일차(3월 15일 촬영).
예배당 안에서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존치를 위한 릴레이 단식농성 234 일차(3월 15일 촬영).

1층 예배당은 그리 크지는 않았는데 신자들이 예배를 보는 의자들을 뒤로 밀어놓고 설교대 앞에서 릴레이 단식을 하는 중이다. 설교대 뒤쪽 십자가 좌우 벽면에는 그림을 그려 게시물을 부착했다.

기찻길 옆 작은 학교 중·고등부가 제작한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지켜주세요! 교회를 부수는 건 역사를 지우는 것” 그림과 “60년 노동운동의 역사를 지닌 인천산선을 지켜주세요!”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구호가 붙어있다.

지하실도 매우 넓었는데 이곳에는 각종 물품들이 선반에 놓여있어 처음에는 창고로 쓰는 곳인가 했다. 그러나 이곳은 취사시설이 다 갖춰있고 예전에는 인근 노동자들이 수십 명씩 이곳을 숙소로 사용해 먹고 자며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했다고 한다.

안쪽에는 방이 따로 있어 그곳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선반을 살피다가 나무로 제작된 ‘기독교 도시산업선교 위원회(In chon U.I.M.)’와 ‘사회복지선교회(SOWEM SINCE 1996)’ 현판들이 있어 사진 한 장 찍었다.

지하실 선반에 놓여진 ‘기독교 도시산업선교 위원회’와 ‘사회복지선교회’ 현판들.
지하실 선반에 놓여진 ‘기독교 도시산업선교 위원회’와 ‘사회복지선교회’ 현판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족자 형식으로 걸려있다. 옥상에는 가건물이 2채 있는데 계단 맞은편 건물에는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서 분류한 ‘인천도시산업선교회’ 활동에 관한 사료들이 박스들에 보관돼있고, 다른 자료들도 파란 상자들에 담겨있었다.

혹시나 해서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 사료들을 넘겼냐고 물으니 사본을 넘기고 이곳에 있는 것이 원본이란다. 교회 철거 문제로 자료들을 전시하지 못하고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계단 옆에 붙은 가건물은 노동운동을 하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기숙을 하며 투쟁을 하던 건물이란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발자취를 따라서

옥상 가건물에 보관돼있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사료들.
옥상 가건물에 보관돼있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사료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1961년 4월 인천 동지방 감리사이며 주안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던 조용구 목사와 인천 서지방 감리사이며 내리교회 담임목사였던 윤창덕 목사가 동일방직공업주식회사와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에서 산업전도를 펼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나 자료를 보면 같은 해 9월 시카고 매코믹 신학교에서 산업선교 훈련을 받고 교회 중심의 선교활동을 경험한 조지 오글(오명걸) 목사가 인천에 부임하고, 10월에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모태가 되는 ‘인천산업전도위원회’가 조직된 것을 본격적인 출발로 봐야 할 것 같다.

세계적으로 ‘산업전도’는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교회가 공장 노동자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가톨릭교회에서 ‘산업목사’ 제도를 둔 것을 중요한 계기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산업전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57년 무렵이라 한다.

현대사회와 교회 주제로 강의 중인 조지 오글 목사(출처 인천도시산업선교회 60년사).
현대사회와 교회 주제로 강의 중인 조지 오글 목사(출처 인천도시산업선교회 60년사).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산업선교의 특징에 알맞게 목회자가 직접 공장에 취업해 선교활동을 했다. 그럼으로써 노동자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노동교육, 노동조합 지도자 훈련, 노동조합을 위한 프로그램, 소모임 활동 강화 등 노동자를 지원하는 일을 주로 했다.

1960년대에는 주로 노동자를 교육하고 그들의 권리 의식을 깨우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1970년대에는 동일방직, 삼원섬유, 한국기계, 대성목재, 반도상사 등에서 민주노조가 건설되는데 산파 역할을 했다.

인천도시산업선교위원회 초가집 시절(출처 인천도시산업선교회 60년사).
인천도시산업선교위원회 초가집 시절(출처 인천도시산업선교회 60년사).

1971년 6월 8일에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위원회 사무실을 중구 인현동 26번지(혜성빌딩 5층)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당시에는 15평짜리 목조 초가지붕 건물로 이곳에 일꾼교회(당시 노동자교회)를 개척해 동일방직의 노동조합운동을 지원했다.

이후 단층 슬라브 건물로 바뀌었다가 1976년 대지면적 57평(190㎡)에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102평(338.25㎡)의 현재 건물이 지어졌다. 서슬이 시퍼렇던 유신 독재시절이었기에 당연히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72년 유신 헌법이 선포되자 한국노총은 어용화됐으며 노조의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극도로 제한됐다. 이에 전국의 ‘산업선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노조들은 경찰의 감시와 협박을 당했다. 그리고 1972년 동일방직에서 최초의 여성지부장 탄생, 집행부 18명 전원 여성이라는 사건이 벌어지자 중앙정보부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1972년 7월 조승혁 목사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고, 1974년 조화순 목사가 구속됐으며, 1974년 말 고문으로 조작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실을 국제사회에 폭로한 조지 오글 목사가 한국에서 추방됐다. 그러나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주변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지속하고 지원의 손길을 계속했다.

1978년 국가기관이 개입한 대표적 노동조합 탄압 사례인 ‘동일방직 분뇨 투척 사건(출처 인천도시산업선교회 60년사).
1978년 국가기관이 개입한 대표적 노동조합 탄압 사례인 ‘동일방직 분뇨 투척 사건(출처 인천도시산업선교회 60년사).

1978년 국가기관이 개입한 대표적 노동조합 탄압 사례인 ‘동일방직 분뇨 투척 사건’ 당시 여성 노동자들이 피신한 곳이 바로 이곳 교회였으며,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는 ‘산업선교회’에 대한 매도와 탄압에서 박정희 정권을 능가했다고 한다. 이후 1980년대 중후반부터 노동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자신의 역할을 노조와 다른 노동단체에 내주게 된다.

이후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1995년 ‘감리교 사회복지선교회’로, ‘일꾼교회’도 ‘미문의 일꾼교회’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화수부두와 만석부두가 포구의 기능을 상실하고 주변의 공장들도 문을 닫으며 교회의 활동 방향도 변한다. 지역 주민과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고민한다는 점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현재까지 먹거리 나눔운동인 푸드뱅크사업 등 소외된 지역민과 장애인을 위한 복지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현재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존치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는 향후 보전 가능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문화재청에 근대유산으로 등재 하는 방안, 민간이 지정하는 사회문화 유산으로 등재해 정부측이 산업유산 지정을 하도게 유도하는 방안, 인천 동구지역의 산업유산과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연계해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시도하는 방안 등이 그것이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1960~1980년대 인천의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것을 넘어 대한민국이 자랑할 만한 현장 노동의 변천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 유산임에 틀림없다.

이런 대표적인 유산을 단순히 재개발 사업의 용적률이 내려가면 사업의 추진이 어렵다는 조합의 입장을 받아들인 인천도시계획위원회의 철거 결정, 교회의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고자 조합 측에 권고안을 수용하게 요청했다는 것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위원회의 결정이 안타깝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인천은 이상하게도 근대 문화유산이 될 만한 건물들을 유난히 고민 없이 철거를 많이 한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미문의 일꾼교회’는 우리나라 산업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간직한 대표적인 건물이다. 최소한 근대유산으로 등재돼 후손들에게 교육의 현장으로 사용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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