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개항장 기행] 일본조계지 일대 탐방(4)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닛센해운(日鮮海運, 일선해운)’ 사옥

닛센해운(日鮮海運, 일선해운)’ 사옥인 선광문화재단 빌딩.
닛센해운(日鮮海運, 일선해운)’ 사옥인 선광문화재단 빌딩.

‘인천우체국’ 길 건너편에 중구 신포동 공영노외주차장이 있고 그 뒤로 선광문화재단 건물이 있다. 원래 이 건물은 ‘닛센해운(日鮮海運, 일선해운)’ 사옥으로 사용됐는데, ‘닛센해운’은 해륙 운송업·중개업·대리업, 또는 이와 관련된 일체의 사업을 벌이는 해운회사였다. 1925년 설립 당시에는 지금과는 모습이 다른 일본식 3층 건물이었다고 한다.

1930년대 초반에 사옥을 확충하며 철근 콘크리트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로 신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건물은 인천에 남아있는 유일한 4층 구조의 근대건축물로, 국내에서 보기 드문 고층 구조의 건축물로 가치를 지닌다 한다. 1918년 축항이 완공되고 번성했던 인천항 세관거리를 대표했던 해운회사 중 하나이다.

건물을 보면 1층은 마치 탑의 기단처럼 넓게 자리를 잡고, 2~4층은 1층보다 좁게 올려 무게중심이 아래쪽에 있어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느낌이 든다. 거기다가 1층의 외벽은 거친 화강석으로 벽돌처럼 쌓아 무게감을 주는 방식으로 마감했다. 건물의 하단에는 지하층에 빛이 들도록 유리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1·2층을 구분하기 위해 장대석을 굵은 띠처럼 둘렀다.

1~4층까지 창문은 세로로 길게 내고 석재로 테두리를 마감하여 수직성을 강조했고, 2~4층은 외벽에 노란 타일을 붙였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인천부청 신청사도 노란 타일로 외벽을 장식한 것을 보면 아마도 1930년대 건축물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한다. 4층은 전체를 건물로 지은 것이 아니라 모서리 부분을 잘라내 십(十)자 모양으로 건물을 올린 것이 특이하다.

선광미술관에서 김창기 작가의 인천 평화의 소녀상 조각전시회.
선광미술관에서 김창기 작가의 인천 평화의 소녀상 조각전시회.

이 건물은 인천항을 기반으로 물류사업을 해온 향토기업 주식회사 선광(鮮光)이 사용해오다 현재는 이 회사가 장학사업 등 사회공헌을 위해 설립한 ‘선광문화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특히 2013년 이 건물의 1층을 미술관으로 꾸며 지역 문화·예술인을 위한 공간으로 개방했다. 몇 차례 전시회에 다녀왔는데 사진·회화·조각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전시하고 있으며 장학사업과 문화사업도 계속 펼치고 있다.

인천 최초의 카페 ‘금파(金波)’

선광문화재단 건물에서 신포로를 따라 60여 미터를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인천에서 모밀국수와 만두 맛집으로 소문난 ‘청실홍실’ 본점이 있는 건물이 나온다. 1920년대 인천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카페인 ‘금파’가 있던 곳이다.

그 후 이 일대에 부사·흑선·일화루 등 여러 카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다. 이 일대가 미야마치(宮町, 궁정. 현재 신생동 일대) 거리인데, 1910년대에 이미 술집과 유곽,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번화가였다.

인천 미야마찌 거리(宮町通, 궁정통) 긴빠(金波, 금파) 건물(인천개항박물관).
인천 미야마찌 거리(宮町通, 궁정통) 긴빠(金波, 금파) 건물(인천개항박물관).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긴빠(金波, 금파) 건물에 들어선 모밀국수 전문점 청실홍실 본점.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긴빠(金波, 금파) 건물에 들어선 모밀국수 전문점 청실홍실 본점.

이 건물은 현재 신포동과 신생동 경계 5거리에 위치했다. 태평양전쟁기에 잠시 문을 닫기도 했으나 광복 후에는 고려회관으로 영업을 재개했다. 그러다 한국전쟁 중 건물이 소실되며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의 건물은 1970년대에 새로 지어진 건물인데 금파 건물과 상당히 유사한 모습이다. 건물터가 그대로여서 땅의 형태에 따라 지었기 때문이다. 다만 3층이었던 건물이 4층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금파’ 건물은 1m 정도의 석조 기단 위에 기둥은 벽돌을 쌓아올린 것 같고, 2층과 3층을 구분하는 창문 하단부는 판석으로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옥상은 난간을 두른 3층짜리 서양식 건물인데, 층고를 일반 주택보다 거의 2배 높게 만들었다. 그리고 건물은 필지를 따라 사다리꼴 모양으로 지었기에 독특한 모습이 눈에 두드러지게 들어온다. 당시만 하더라도 일대에서 상당히 높은 건물로 손꼽혔을 것 같다.

한때 ‘금파’의 주인이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국외로 망명한 러시아 백계(白系) 여성이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얼굴이 하얗고 눈이 파란 러시아 마담을 보기 위해 많은 남자들이 이 카페에 들락거렸다고 한다. 이곳은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사교장이었으며,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는 시국과 예술을 논하는 문화의 장이었고, 일반인들에게도 선망의 장소였다고 한다.

고일의 <仁川昔今(인천석금)>에는 ‘양식 화식(和食, 일본식 요리)의 식당이며 바아를 겸영하던 긴빠(金波)는 미야마찌(宮町, 궁정) 거리 어구에 우뚝 솟은 인천의 마천루였다. 백계 러시아 계집이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굴리면서 워카(조니 워커로 추정됨)도 아닌 기린 비-루(맥주)를 거품이 허옇게 흘러넘치도록 새빨간 입술을 축일 때 향수에 우는 벌르스나는 염통을 씻고 불살랐다’라고 소개할 정도로 유명한 카페였다.

1980년대 주안역 일대의 새로운 상권과 인천시청의 구월동 이전, 1990년대 중후반 인천시청과 예술회관 주변의 새로운 상권 형성, 특히 1997년 외환위기 등으로 개항장 주변(중앙동·신생동·신포동·내동 일대)의 상권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그러다 차이나타운이 개발되고 일본인 조계지도 단장을 하며 5·6년 전부터 꾸준히 상점들이 들어서 제2의 부흥기를 맞고 있다. 갈 때마다 새로 생긴 가게들로 눈이 어지럽지만 다시 번성하는 거리의 모습이 활기차서 좋다.

중국요리 전문점 ‘진흥각’과 ‘중화루’

일본조계 혼마치 거리(本町通, 본정통)에 일본식 2층 기와집들이 늘어서 있다.(인천개항박물관)
일본조계 혼마치 거리(本町通, 본정통)에 일본식 2층 기와집들이 늘어서 있다.(인천개항박물관)
중국요리 전문점 중화루와 진흥각.
중국요리 전문점 중화루와 진흥각.

신포로23번길을 따라 일본 은행들이 있던 일본조계의 중심인 혼마치(本町, 본정) 거리로 가다보면 소고기전문점 우화미(牛火味, 과거 SC제일은행 인천지점 자리) 옆으로 인천사람들에게 중국요리 전문점으로 잘 알려진 ‘진흥각(振興閣)’과 ‘중화루(中華樓)’가 있다. 신포동 주변이 번성기를 누릴 때 인천을 대표하는 중국 요리점으로 이곳에서 모임을 여러 번 가졌던 기억이 아련하다.

‘진흥각’은 1962년 현재의 위치 바로 옆에 있는 SC제일은행 자리에서 개업했으나, 제일은행측이 가도에 있는 진흥각이 은행 위치로 좋다고 해 자리를 내주고, 196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창업자인 왕진모(1980년 작고) 씨가 자신의 이름 가운데 글자인 진(振)자를 넣어 요리점이 흥하라고 ‘진흥각’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현재 왕진모 씨의 친구가 주방을 맡고 있으며 차남인 왕린보 씨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중화루’는 진흥각과 붙어있다. 1983년 우심진(공화춘 설립자 우희광의 손자) 씨가 공화춘을 운영하다 폐업을 한 후, 1985년 화교 양감민(인천화교협회 13대와 17대 회장 역임) 씨와 한국사람 한 명 등 세 사람이 동업해 ‘중화루’를 현재 이곳에 열었다. ‘중화루’ 간판에 1918년부터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대불호텔 자리에 있던 중화루의 명맥을 잇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03년 우심진 씨가 돌아가시자 3인 동업이 깨져 소유권이 한국인에게 넘어갔다가, 다시 양감민 씨가 소유권을 받아 운영했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지자 자금성과 태화원의 사장인 손덕준(현 인천화교협회 회장) 씨에게 넘긴다. 손덕준 씨의 외할아버지는 중화루의 지배인이었고, 아버지도 중화루에서 요리사 보조를 했다가 나중에 공화춘의 주방장도 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인천 최고의 요리사였단다.

손덕준 씨에게 중국요리를 처음 가르쳐준 사람이 아버지였으니 인생은 돌고 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1918년 옌타이(烟台, 연태) 출신이 주주 40여 명을 모아 대불호텔을 사들여 북경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중화루를 열었을 때, 지배인이었던 외할아버지와 주방에서 일을 했던 아버지의 인연이 손덕준 씨에게 이어지는 것이 어쩌면 필연일 것도 같다.

‘진흥각’과 ‘중화루’의 요리는 맛이 언제나 한결같다. 사람마다 맛에 대한 평가는 다르지만 우선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맛이어서 좋다. 나오는 요리도 푸짐할 뿐 아니라 깔끔한 것으로도 이름나 있다. 차이나타운이 관광특구가 되며 많은 중국 요리점들이 들어서 번성하자 반대급부로 이곳은 침체됐는데 과거 전성기 때의 명성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명월집’과 ‘세창양행 사옥’터

인천의 대표적인 노포 김치찌개 백반집 명월집.
인천의 대표적인 노포 김치찌개 백반집 명월집.

일본조계가 설치되고 혼마치 거리(本町通, 본정통)로 가는 길 양옆으로 일본식 2층 기와집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현재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간혹 중간 중간에 2층집들이 보이지만 외양을 현대식으로 치장해 일본식 주택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그래도 20여 년 전에만 해도 일본식 주택이 꽤나 남아있었는데 관광지가 되면서 안타깝게도 현대식 건물로 바뀌어 아쉬움이 남는다.

계속 길을 가다보면 왼쪽으로 1966년부터 55년째 영업을 하고 있는 ‘명월집’이 보인다. 인천의 대표적인 노포(老舖) 김치찌개 백반집으로 알려져 있다. 가게 한쪽에서 석유곤로 위에 큰 양푼을 놓고 김치찌개를 계속해서 끓이고 있는데 마음대로 여러 번 떠먹어도 된다. 그 옆에는 상추와 쌈장을 놓아 가져가서 먹을 수 있다.

반찬은 대략 10첩 반상 정도로 나온다. 꽁치조림이나 굴비구이 등 생선도 꼭 나오고, 제철에 맞게 반찬이 구성되며 깔끔하고 양념도 적절해 거의 남기는 것 없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맛집이다.

‘명월집’ 옆으로 중앙프라자 6층 건물이 우뚝 솟아있는데, 이곳이 ‘세창양행 사옥’터이다. 1884년에 독일 마이어 상사(Meyer 商社)의 제물포 지점으로 설립된 무역상사 건물인데, 주부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은 부러지지 않는 ‘세창바늘’과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진 해열진통제 ‘금계랍’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건물 옆길 뒤에는 과거 일제 때 지어진 가와바타 철물점 창고건물을 시민들이 사무실로 만들어 쓰다가 지금은 ‘인천영상위원회’가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인천지역 세트장을 소개하거나, 인천지역 영상물 제작 유치 등의 일을 하는 곳으로, 현재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어 인천과 관련된 영화부터 인지도 높은 외국영화 까지 400여 편의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단다. 아쉽게도 개방하는 것을 몰라 외관만 사진을 찍었는데 꼭 들러봐야 할 곳이다.

세창양행 사옥.(인천광역시 제공)
세창양행 사옥.(인천광역시 제공)
세창양행 사옥에 들어선 중앙프라자 건물.
세창양행 사옥에 들어선 중앙프라자 건물.
인천영상위원회 창고건물.
인천영상위원회 창고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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