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조계지 일대 탐방(10)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자유공원’ 광장

제물포구락부 정문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너른 광장이 나온다. 예전에는 비둘기장도 있어 모이를 주는 사람들과 비둘기 떼로 북적이던 곳이다.

자유공원 광장.
자유공원 광장.

이 비둘기장은 1967년에 대성목재에서 기증한 것으로 처음에는 6층짜리 두 동으로 양면에 집을 내어 모두 192채가 들어섰다. 이후 비둘기 떼가 기하급수로 늘자 1970년대 중반 5층을 더 올려 11층으로 증축하고 한옥 지붕을 올렸다.

날렵한 곡선 모양의 받침대와 11층 높은 비둘기집이 어울려 멋진 모습을 연출해 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던 곳이다. 1996년 초에 자유공원 환경개선 계획에 의해 철거됐다.

그리고 ‘평화’의 상징이었던 비둘기는 2009년부터 서식밀도가 너무 높아 분변과 털 날림 등으로 문화재 훼손이나 건물 부식 등의 재산상 피해를 주거나 생활에 피해를 준다고 유해야생동물로 규정해 아쉽게도 전국의 공원에서 비둘기집이 사라졌다.

자유공원 비둘기장(M경기도멀티미디어 제공, 1969.07)
자유공원 비둘기장(M경기도멀티미디어 제공, 1969.07)

현재 자유공원 광장은 말끔하게 단장해 바닥은 색이 들어간 벽돌들과 기하학적인 문양의 진회색 벽돌들로 띠를 둘러 멋지게 장식했다. 이곳에는 행사를 할 수 있는 무대와 해양도시 인천을 상징하는 배 모양의 전망대와 닻, 등대 모양의 조형물이 한쪽에 설치돼있을 뿐 다른 장식이 없이 시원하게 트인 광장으로 바뀌었다.

배 전망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청일조계지 일대와 월미도, 소월미도, 그리고 인천항 항만시설과 그 뒤로 인천대교와 무의도가 아스라이 보인다. 바로 밑 자유공원과 월미도는 계절마다 풍광이 바뀌는데, 특히 봄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자유공원과 월미도는 온통 벚꽃으로 뒤덮여 장관을 이룬다.

그리고 제물포구락부 뒤 나무 아래 그늘에는 돌로 만든 조금은 색다른 모양의 의자가 놓여있다. ‘2007 홍예문 프로젝트’로 설치한 ‘타임캡슐’이다. 다양한 사연들과 물품을 넣고 2017년 4월 7일, 10년째 되는 날 개봉하는 행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10년 후에 열기로 하며 사연들을 적어 넣었다고 하는데 2027년에는 직접 가서 행사를 지켜보고 싶다. 김창기 조각가의 작품이다.

인천의 대표적인 공원이었던 ‘자유공원’

‘2007 홍예문 프로젝트’로 설치한 ‘타임캡슐’ 의자.
‘2007 홍예문 프로젝트’로 설치한 ‘타임캡슐’ 의자.

지금이야 도심지 내에 시민들이 휴식을 취할 공간이 많아졌지만 1990년대까지 인천시민의 휴식처는 ‘송도유원지’와 ‘자유공원’, ‘수봉놀이동산’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인천시민들에게 인천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안내하는 곳이 자유공원이었다.

인천역과 동인천역 등 지하철역이 가깝고 신포동쪽으로 음식점들이 많아서인지 낯선 외지인들이 제일 먼저 찾는 곳도 대개는 이곳이다.

한 번이라도 자유공원을 둘러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이곳에 오르면 시가지와 항만시설, 그리고 바다 위에 떠있는 올망졸망한 섬들, 이들과 어울려 하늘을 날렵하게 선회하는 갈매기 떼들이 한눈에 펼쳐진다. 인파로 북적대는 바로 밑의 거리와는 다른 세계처럼 이곳은 수림도 우거지고 일몰 경치 또한 꽤나 아름다운 곳이다.

어쩌면 ‘항구도시 인천’, 이를 여실히 드러내는 곳이 바로 자유공원이기에 우리도 모르게 발길이 옮겨지는 것은 아닐는지. 인천에 사는 사람치고 이곳에 자그마한 추억 하나를 묻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숲길을 걷다 잠시 앉아 쉬다보면 개항기의 외국인부터 이곳을 찾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이 스쳐지나간다. 아마도 빛바랜 사진첩을 뒤지면 자유공원에서 찍었던 추억의 사진이 한 장쯤은 나올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공원

배모양 전망대에서 바라본 봄과 여름, 가을, 야경의 모습.
배모양 전망대에서 바라본 봄과 여름, 가을, 야경의 모습.

1884년(고종 21) 8월 15일(양력 10월 3일) 조선 정부는 인천항에 거주하는 청국, 일본, 미국, 영국 등의 조계지를 정하기 위해 해당 국가 외교관들과 ‘인천 제물포 각국 조계장정(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을 체결한다. 이 조계장정의 두 번째 조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각국 조계지의 땅은 4등급으로 나눈다. 제1등 구역은 중국 조계의 남쪽인데, 조선 정부는 정지(整地) 작업을 잘하해야 한다. 이 구역에 건축하는 자는 담장을 반드시 벽돌이나 돌, 혹은 철근벽으로 하며, 지붕은 반드시 철편으로 하며, 벽돌·기와를 사용할 수도 있다. 일체 목조 건물이나 초가는 엄격히 금지해 짓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다. 제2등 구역은 중국 조계 북쪽 땅이다. 이 구역에 건축하는 자는 지붕은 반드시 기와를 잇고, 담장은 반드시 진흙이나 벽돌로 쌓는다. 제3등 구역은 일본 조계 동쪽이다. 제4등 구역은 산지(山地)에 속하는 땅이다. 이상의 제2등, 제3등, 제4등 구역은 조차하는 사람이 자체로 자금을 내어 정지한다.’

제물포항 쪽 해안지대 선린동과 항동, 그리고 북성동 일부 약 5000평(1만6529㎡)은 청국조계가 자리를 잡았고, 일본 조계는 현재의 관동 및 중앙동 일대의 약 7000평(2만3140㎡)에 설정됐다.

각국조계는 14만여 평(46만2810㎡)에 조성됐는데 이 중 1등 구역은 인천해관(한중문화관과 인천화교역사관 일대)과 영국영사관(올림포스호텔 일대)이 있던 자리이고, 2등 구역은 공화춘(짜장면박물관) 너머 북성동 행복복지센터 부터 응봉산 자락을 따라 송월동 동화마을 일대와 외국인묘지(북성동 1가 1번지)가 있던 북성동 일대였다.

인천항 각국공원 및 일청양국거류지 모습 사진엽서.
인천항 각국공원 및 일청양국거류지 모습 사진엽서.

3등 구역은 일본영사관(중구청) 오른쪽부터 크게 두 블록인데 현재 신포로까지가 경계지대이다. 그리고 존스톤별장(한미수교백주년기념탑)이 있던 응봉산(鷹峰山, 해발 69m)을 중심으로 제물포구락부 등 세창양행 사옥(맥아더동상)까지 자유공원 일대 산 사면 모두가 4등 구역이었다. 응봉산의 태반을 차지한 각국조계는 곧이어 택지와 도로를 정비하고 거대한 양관들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각국조계 토지 구획이 정리되자 나머지 넓지 않은 1000여 평(3300㎡)에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 사바틴의 설계로 1888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공원을 설립한다. 각국조계 당국은 이 일대를 ‘파블릭 가든(Public garden)'이라 했는데,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이용하기에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공공 정원‘ 정도가 될 것 같다. 이후 꾸준한 확장 작업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공원으로 잘못 알려진 서울의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이 1897년에 만들어졌으니, ‘자유공원’은 이보다 9년이나 앞서 세워졌다. 이미 ‘자유공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공원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에도 서울시는 아직도 많은 기록물들에 ’파고다공원‘이라 적고 있어 혼선을 빚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인천시는 ’자유공원‘이 최초의 근대공원이라는 것을 널리 알릴 뿐만 아니라, 잘못 기록된 기관이나 단체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각국공원’에서 ‘자유공원’으로

월미산에서 찍은 1910년대 조선인천항전경 사진엽서.
월미산에서 찍은 1910년대 조선인천항전경 사진엽서.

조계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파블릭 가든(Public garden)'이라 불렀지만 인천 사람들은 이 공원이 각국조계에 위치하고 있다고 ‘각국공원’이라 불렀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여러 외국인들이 드나든다 해 ‘만국공원’이라고도 불렀다. 이를 볼 때 공원의 공식명칭은 ‘파블릭 가든(Public garden)'이었고, ‘각국공원’이나 ‘만국공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르기 좋게 붙인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나라를 빼앗기자 일제는 1913년 4월에 각국조계에 이어 같은 해 11월에 청국조계를 폐지한다. 1914년 4월에는 새로운 지방행정제도의 실시와 함께 일본조계마저 철폐돼 인천의 모든 조계들은 사라진다. 이렇게 조계제도가 폐지되자 일본인들은 일본공원이라 부르던 인천 신사(神社, 현 인천여상자리)의 경내를 동쪽에 있다고 ‘동공원’, 각국공원은 서쪽에 있다고 ‘서공원’이라 이름을 바꿨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되면서 ‘서공원’은 한동안 ‘만국공원’이라 불렸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맞아 1957년 9월 15일 맥아더 동상 제막식을 하고 공원을 새로이 단장하며, 10월 3일 이름을 ‘자유공원’으로 바꿔 공포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원의 이름 자체가 우리 근대사의 변화 과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름 자체가 시대상을 담고 있다면 이제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름이 바뀐 ‘자유공원’도 새로운 인천의 위상에 걸맞게 이름을 바꿔야 할 것 같다. 민선 7기 인천시 시정 목표와 핵심 전략을 보면 ‘동북아 평화번영, 서해 평화 협력시대’ 등 평화도시 인천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발맞춰 올해 9월 인천지역 시민사회단체도 ‘자유공원’을 ‘만국평화공원’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평상 시 평화공원으로 이름을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미래의 주역인 젊은이들에게 평화를 물려줘야 하는 것도 선배 시민으로서의 당위적인 역할일 것이다.

프레임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하는데, 프레임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미래 세대는 증오의 시대를 넘어 평화의 시대가 정착되기를 기원한다. 이에 ‘자유공원’을 ‘평화공원’으로 바꾸기 위해 인천 시민들의 지대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는지.

자유공원 현판(M경기도멀티미디어 제공, 1969.07).
자유공원 현판(M경기도멀티미디어 제공, 1969.07).
자유공원 안내 표지석.
자유공원 안내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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