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개항장 기행] 각국 조계지 일대 탐방(7)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오례당’과 ‘오례당 저택’의 이야기는 예전부터 많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저택이 흔적 없이 사라졌고, 개항장을 안내하는 동선이 아니기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얄팍한 상식으로 청나라 출신의 인천해관에 근무한 전형적인 관료 출신, 부동산과 고리대금으로 축재한 부호 정도로만 생각해 의식적으로 외면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 인천시장 관사와 인천 역사자료관으로 사용했던 건물을 새롭게 고쳐 ‘인천시민애집’이란 이름으로 개방하고, ‘제물포구락부’도 그동안 창고로 사용했던 1층을 개방해 다양한 전시와 복합문화 공간 등으로 사용하고 있어 기행 동선을 변경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동선에 들어오는 ‘헨켈 주택’과 ‘오례당 저택’도 살펴보게 됐다.

특히 오례당이란 인물의 행적을 살피다보니 자료를 찾아보면 볼수록 묘하게도 그의 삶에 매료된다. 인천 개항장에는 다양한 이력을 가진 외국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 중 청나라 사람으로 오례당과 같은 이력을 가진 사람은 본국에서도 드물었을 것 같다.

파란만장한 이력을 가진 ‘오례당’

인천제일교회 옆 각국조계지 계단.
인천제일교회 옆 각국조계지 계단.

인천제일교회 건물을 따라 각국조계지 계단을 내려가면 선교교육관 앞 도로 맞은편 담벼락 뒤로 지붕들이 보인다. 동국빌리지 건물로 이곳에 초호화 주택으로 명성을 떨쳤던 ‘오례당 저택’이 있었다. 이 집을 지은 오례당은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우리나라가 근대화하는데 많은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국 출신인 오례당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 당시에 흔히 볼 수 없던 서양 유학을 갔다 온 결과가 작용한 것이리라. 개항 이후 인천 해관의 관리로 초빙돼 조선의 땅을 밟았을 때 이미 5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하니, 유학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그만의 독특한 어학 습득 능력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례당(吾禮堂, 1843~1912)의 중국식 발음은 우리탕이다. 그는 청나라 출신의 화교이지만, 삶의 이력이 독특해서인지 인천 화교 내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을 정도로 인지도가 낮았다.

청국조계지 자료를 살필 때도 오례당 관련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임종 후에도 중국인 묘지가 아니라 북성동에 있는 외국인 묘지(각국 묘지)에 묻혔다. 그 이유를 살피기 위해서는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의 이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유학과 결혼

각국조계지 계단 위에서 찍은 오례당 저택(Royce Raven 사진)
각국조계지 계단 위에서 찍은 오례당 저택(Royce Raven 사진)

오례당은 1843년 상하이(上海, 상해) 인근 장쑤성(江蘇省, 강소성) 창저우(常州, 상주)의 명문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상하이에 공부를 하러 갔다가 프랑스의 로 치룰 후작과 동문이 돼 서로 자신들의 언어를 가르치며 인연을 맺는다.

어느 날 그들은 함께 여행을 갔다가 강도들에게 납치당한다. 당시 오례당은 나이가 어려 풀려났지만 로 치룰 후작은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이후 오례당은 후작을 열심히 간호하고 보살펴 둘 사이는 더욱 가까워졌다고 한다.

이에 후작은 오례당에게 프랑스에 같이 가기를 권했고, 오례당은 프랑스에서 7년 동안 유학을 하며 서양문물을 익히고 5개 국어를 익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잠시 장시성( 江西省, 강서성) 푸저우(福州, 복주)에 있는 포공학교(砲工學校)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프랑스 영사관 창설 당시 통역관을 하게 된다.

이후 청나라에서 관리들이 유럽을 순방할 때 비서 겸 통역관으로 다시 갔으며, 나중에 스페인 주재 청국공사관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한다. 그는 이곳에서 20살 어린 스페인 출신 아말리아 아마도르(Amalia Amador, 1863~1939)를 만나 결혼을 한다. 그러나 부친이 위독하자 스페인에서의 달콤한 신혼생활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인천해관에 근무하다

오례당 저택 모형(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전시)
오례당 저택 모형(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전시)

1876년 2월 27일 맺어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와 그 부록, 또 6개월 뒤에 체결된 ‘조일무역규칙’에는 수출입 화물의 관세를 규정하지 않았다. 이에 무관세무역의 부당함을 통감한 조선 정부는 관세 교섭에 나섰으나 일본의 강력한 반발로 교섭은 실패한다.

그러나 1882년 5월에 ‘조미수호통상조약’, 11월에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자 일본은 1883년부터 조일관세 협상을 서둘러 7월에 ‘조일통상장정’을 조인하고 7년 만에 관세권을 회복한다.

조선정부는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의해 1년 이내에 비준서를 교환하기로 함에 따라 관세 행정을 담당할 기구의 설립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관세행정과 기구 운영 등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언을 구한다.

이에 청국의 실력자 이홍장은 일본의 전횡을 막으면서 청국의 종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청국해관과 천진 영사를 역임한 통상외교 전문가였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천거한다.

‘인천해관’은 1882년 겨울부터 6개월 정도 준비를 거쳐 1883년 6월 16일에 창설된다. 창설 당시 해관원은 영국인 세무사 스트리플링을 비롯해, 독일인 하버 마스터, 러시아인 엔지니어, 프랑스·미국·청국인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로 채워졌다.

오례당은 1883년 4월 24일자로 왕명에 의해 종신직 해관 보좌관으로 임명됐으나, 실제 조선에 들어온 것은 인천해관 창설일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보빙사절단으로 미국에 가다

1883년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에 파견된 견미조선보빙사(遣美朝鮮報聘使) 일행. 앞줄 오른쪽이 수행원 겸 통역을 맡은 오례당.
1883년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에 파견된 견미조선보빙사(遣美朝鮮報聘使) 일행. 앞줄 오른쪽이 수행원 겸 통역을 맡은 오례당.

오례당은 묄렌도르프를 따라 조선에 들어온 해관요원 중 한 사람으로 중국어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에 두루 능한 사람이었다. 그가 해관직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할 무렵 조선 정부는 조미조약 비준문서를 교환한 후 주한공사 루시어스 푸트의 건의에 따라 견미보빙사(遣美報聘使, 미국에 파견한 일종의 답례 외교 사절단)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조선으로서는 역사상 최초의 미국 사행이었기에 수행원 중 양국 간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는 통역관을 물색했다.

묄렌도르프는 인천해관 보좌관으로 근무하던 오례당을 통역관으로 천거한다. 해관에 근무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풍부한 외국경험과 영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정부가 미국에 파견한 견미보빙사의 통역원으로 인천해관의 일을 잠시 쉬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보빙사절단은 전권대신 민영익, 부대신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무관 현흥택·최경석, 수행원 유길준·고영철·변수 등과 통역관 일본인 미야오카 츠네와 청국인 오례당, 미국인 퍼시벌 로웰 등 모두 11인이었다. 이들은 미국 대통령 아서를 2차례 접견해 국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양국 간의 우호와 교역에 관하여 논의했다.

이들은 40여 일 동안의 미국거류 기간 중에 세계박람회, 시범농장, 방직공장, 의약제조회사, 해군연병장, 병원, 전기회사, 철도회사, 소방서, 육군사관학교 등 공공기관을 시찰했다. 그밖에도 우편제도, 전기시설, 농업기술에 관심을 보였는데 귀국 후 신식 우편제도인 우정국 설치, 경복궁의 전기설비, 육영공원의 설치, 농무목축시험장과 경작기계의 제작, 수입 등 근대화에 많은 기여를 한다.

인천의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였던 ‘오례당 저택’

인천명승 엽서의 존스턴별장과 오례당 저택 부분을 확대한 것.(하나금융투자 공식 블로그 제공)
인천명승 엽서의 존스턴별장과 오례당 저택 부분을 확대한 것.(하나금융투자 공식 블로그 제공)

미국에서 12월에 귀국한 오례당은 인천해관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후에는 용산과 원산의 상무위원을 역임했다. 인천해관에 근무하던 중 그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다. 프랑스에서 로 치롤 후작이 세상을 떠나며 그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어 일약 재산가가 된 것이다.

그는 1890년 해관을 은퇴한 후 인천에 정착해 토지와 가옥을 매수하고 재산을 불리더니, 급기야 부동산 투자와 고리대금업으로 방대한 재산을 형성해 개항장 외국인 중 최고의 부호가 된다.

알려진 바로는 인천 개항장 내 부동산이 많았는데 내리 2필지, 용동 1필지, 외리 3필지, 신정(신포동) 2필지, 궁정(신생동) 2필지, 유정(유동) 1필지, 율목리 4필지, 사정(답동) 1필지 등 총 8곳에 대지와 전답 16필지가 있었다 한다.

외교관이나 고급 상인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던 그의 부인은 뛰어난 미인이었지만 몹시 영악하고 몰인정해 그 당시 인천 주재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오례당은 그의 아내 아말리아의 요구로 송학동 2가 16번지에 독일풍의 거대한 저택을 지었다. 건축물의 규모는 지하1층 지상 2층이었으며, 연면적은 1338.9㎡(지하1층 333.0㎡, 지상1층 581.8㎡, 2층 423.1㎡)로 인천에서 존스턴별장 다음으로 큰 400평 정도의 양관이었다.

이 건물은 지하1층과 지상1층에 베란다를 설치했는데 높은 축대를 쌓고 지었기에 그 아래 인천항과 시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건물은 붉은 벽돌의 외벽에 지붕은 검은 오석을 다듬어 올린 형태로 바다를 향해서 널찍하게 뚫린 유리창이 몹시 시원스럽게 보였다고 한다. 지붕은 전체적으로 십자형으로 만들었는데, 특히 집의 왼쪽은 원통형으로 만들어 돔형 지붕을 올렸기에 마치 투구처럼 독특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인천명승 엽서의 오례당 저택부분을 확대한 것.(하나금융투자 공식 블로그 제공)
인천명승 엽서의 오례당 저택부분을 확대한 것.(하나금융투자 공식 블로그 제공)

인천의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였던 이 저택에서 인천에 거주하는 외교관과 외국 사업가들을 초청해 연회와 무도회를 자주 열었다 한다.

‘오례당 저택’은 1909년에 준공되자마자 바로 불이 나서 다 타버렸고, 그 후 다시 짓기 시작해 1911년 12월에 원래의 모습대로 준공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례당은 이 새 집에 거처해 불과 오륙 개월밖에 살지 못했다.

그는 1912년 6월 수백만 원(현재 가치로 수천억 원대로 추정)의 재산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오례당이 한국에 온지 30년이 되던 해로 당시 그의 나이 69세였다.

오례당이 죽자 이 집은 그의 조카와 아내의 유산 상속 소송에 휘말린다. 결국 반반씩 나누게 되지만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쌓은 오례당의 재산은 소송비용으로 거의 탕진되고, 1930년대에 일본인 상공회의소 대표였던 요시다히데지로(吉田秀次郞)에게 팔린다.

그러다 해방 후엔 미군 독신자 장교 숙소, 그 후 육군 방첩대가 사용하던 중 1968년 4월 16일 한밤중에 원인모를 화재로 안타깝게도 소실된다. 현재는 높은 축대만 남아있고 그 자리에는 빌라인 ‘동국 빌리지’가 들어서 있다. ​

현재 오례당과 그의 부인 아말리아는 인천가족공원 내 외국인묘역에 나란히 묻혀있다. 오례당의 무덤 묘비는 아내와 딸, 조카가 같이 세웠다고 하는데 묘비에 물때가 묻어 작은 글자들은 확인하기가 힘들다. 다만 오례당이 세상을 떠난 후 27년 뒤에 남편 옆에 묻힌 아말리아의 묘비에 적힌 R.I.P.(Rest in Peace)대로 그들 부부가 평안하게 쉬기를 바란다.

인천제일교회 옆 각국조계지 계단.
인천제일교회 옆 각국조계지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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