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개항장 기행] 일본조계지 일대 탐방(1)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개항 전 인천 상황

1876년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 제4조와 5조에 근거해 인천은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에 세 번째로 개항됐다. 5조를 보면 ‘개항 시기는 일본력(日本曆) 명치(明治) 9년 2월, 조선력 병자년(1876년) 2월부터 계산해 모두 20개월로 한다’라고 적혀 있다.

즉, 1877년 10월까지는 개항을 해야 한다는 내용인데, 인천이 도성(都城)과 가까워 개항을 하면 미곡(米穀)의 유출로 도성의 시장이 피폐해지고, 한성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전국 유림들의 척사상소를 이유로 조선정부는 개항을 무기한 연기한다.

인천항에서 바라본 각국조계 및 일본, 청국 거류지.(대불호텔 전시관)
인천항에서 바라본 각국조계 및 일본, 청국 거류지.(대불호텔 전시관)

물론 조선도 그 나름의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정부는 약간의 포구시설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조운선의 기항지이며 제물량만호(濟物梁萬戶)를 뒀던 성창포(城倉浦)를 개항장으로 지정하고자 했다. 이 포구는 비교적 규모가 큰 취락이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기지인 화도진과 인접하고 있어 우리 정부가 관할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성창포는 해안 매립으로 인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제물량이 성창포와 월미도, 영종도 사이의 좁은 수로를 일컫는 것이기에 대략 만석아파트 어디쯤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성창포에서 1km 정도 남쪽에 위치한 제물포 해변의 구릉지를 조계지역으로 요구함으로써 우리 정부가 지정한 개항장의 내항과 외국인 조계가 분리되는 모순이 발생했다.

조계의 외국인들은 조선 정부가 지정한 포구를 기피하고 임의로 조계 전면의 제물포와 탁포(坼浦)에 선박을 출입, 정박시킴으로써 조선 정부는 출입선박의 관세징수가 불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제물포의 이용을 묵인하게 됐고, 항구의 기능상실로 인해 타격을 입게 된 만석동의 객주들은 감리서에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일본조계 설치

청일조계지 경계 도로에서 바라본 제물포항.(1904, 인천광역시)
청일조계지 경계 도로에서 바라본 제물포항.(1904, 인천광역시)

인천 최초의 조계는 1883년 9월 체결된 ‘인천구일본조계조약(仁川口日本租界條約)’에 근거해 설치된 일본전관조계이다. 부산과 원산의 경우에는 일본 정부가 조선 정부에 대해 지조(地租) 명목으로 매년 금 50원을 납부할 뿐이었으나, 인천의 일본전관조계는 개인들이 경매로 택지를 대부받아 그 등급에 따라 정해진 액수를 조선 정부에 직접 납부했다. 이는 다른 외국인들의 도래를 예상해 청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에 설치된 조계들의 일반적 형태를 취한 결과였다.

그러나 일본인의 인천 진출은 조계가 설치되기 이전인 1878년부터 시작됐다. 그들은 성창포․만석동에 임시로 집을 짓고 밀무역을 일삼다가 적발돼 한국정부로부터 추방당한 바 있다. 그런데 1883년 9월 일본전관조계가 설정됨으로써 일본인들은 합법적으로 취락을 건설하고 무역을 할 수 있게 됐다.

일본 조계는 현재의 관동1·2가와 중앙동112가 일대의 약 7000평(2만3140㎡)에 설정됐는데, 영사관 부지 2000평(6611㎡), 창고 부지와 상점가 등을 제외하면 주거지로 사용할 수 있는 면적은 극히 좁았다. 부산의 11만 평(36만3636㎡), 원산의 9만 평(29만7520㎡)보다 너무 협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안에 인접한 지역을 장악해 선박의 접안과 운용에 편리를 도모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일본인들은 급증하는 이민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각국 조계의 저지대를 매입하거나 해면 매립사업을 꾸준히 추진했으며, 지가가 싼 전동·인현동·신포동·신흥동·도원동·만석동 등 한국인 지구로 침투했다. 그 결과 1905년경에는 개항장 총면적의 50% 이상을 점유하게 된다. 1913년 인천의 조계가 모두 철폐됐을 당시 일본인 수는 이미 1만5000명을 돌파해 한국인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했다.

외양만 일본식 주택으로 꾸민 건물들을 일본인이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는지.
외양만 일본식 주택으로 꾸민 건물들을 일본인이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는지.

현재 일본조계 일대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느낌이다. 근대건축물과 일본식 주택이 혼재된 일본조계지, 이곳을 걷다보면 우리 것과는 다른 주택들에서 풍기는 묘한 울림이 있다. 그런데 외양만 일본식 주택으로 장식한 것을 보면 조금은 안타깝다. 그 안의 내용도 일본식으로 바꾸고 직접 일본인이 들어와 살기도 하며, 일본을 알리는 문화관과 음식점, 상점이 불야성을 이루면 좋을 것 같다.

문화의 접촉은 넓을수록 좋다. 이왕 개항장을 보존하고 관리할 것이라면 그 안에 들어갈 내용도 모양새를 갖추면 금상첨화가 아닐는지. 더불어 지금은 사라진 건물들이지만 대표성을 지닌 건물들은 표지판을 세워 그 당시의 사진과 설명을 함께한다면 해설사 없이 다니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

청일경계지 도로 아래에서 바라본 자유공원. 멀리 석정루가 보인다.
청일경계지 도로 아래에서 바라본 자유공원. 멀리 석정루가 보인다.

청국조계지 가장 오른쪽에 있는 동횡가(東橫街)는 일본조계와 경계가 되는 도로이다. 1894년 청국조계지를 형성할 때 만들었는데, 도로의 너비는 변하지 않았다. 만들 당시에는 비포장도로였지만 지금은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고 보도블록을 깔아 차량을 통행하게 했다.

경사로 상부에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은 2002년에 인천시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됐지만 계단과 조경이 예전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중앙에는 돌계단이 형성됐는데, 급경사를 오르는 수고를 덜려고 전체 경사로 3분의2 지점까지 계단 2개 올라갈 때마다 넓은 공간인 계단참을 만들고, 양 옆으로 조경 식재(造景植栽) 공간을 만들어 나무와 꽃들을 심었다.

중앙 계단 위 양옆에는 석등이 2개씩 5열로, 모두 10개를 새로 배치했다. 그런데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 좌우로 청국과 일본 조계의 건물 모습이 확연히 다르듯, 계단 좌우 석등들도 의도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배치했다. 왼쪽 청국조계 쪽에는 중국 석등, 오른쪽 일본조계 쪽에는 일본 석등을 배치해 청·일 경계지대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계단참 가장 위에는 중국 칭다오(靑島, 청도)시 정부인 스난구(市南區, 시남구)가 2002년에 기증한 공자의 석상이 우람하게 서있다. 계단의 위에서 보면 공자상과 함께 인천항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2009년 개장한 하버파크호텔이 조망을 가로막아 조금은 아쉽다. 아무튼 청·일조계지 경계계단은 변형된 것이 많아 계단 자체의 가치는 적으나 역사성과 장소적 측면의 가치가 높다고 한다.

‘인천아트플랫폼’

인천아트플랫폼 공간안내 표지판.
인천아트플랫폼 공간안내 표지판.

일본조계 일대는 가로로 도로 정비가 잘 돼있어 제일 아래쪽 인천아트플랫폼이 있는 청국조계지와 일본조계지 경계가 되는 도로에서 구 인천우체국이 있는 신포사거리와 인천감리서지가 있었던 신포로까지 한 블록씩 올라가며 왔다 갔다 하면 제대로 살펴볼 수 있다.

인천아트플랫폼(Incheon Art Flatform)은 2009년 9월에 개관해 현재 창작스튜디오, 전시장, 공연장, 생활문화센터 등 총 13개 동의 규모로 조성했다. 인천 원도심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근대 개항기 건물과 1930~40년대에 건설된 건축물을 리모델링해 조성된 복합문화예술 공간으로 인천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공간 안내 표지판에 그려진 대로 공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A동은 ‘군회조점(郡廻漕店)’으로 1902년에 지어진 2층 조적식 구조(組積式構造, 벽돌, 블록, 돌 등을 쌓아 올려서 벽을 만드는 건축구조) 건물이다. 코오리 킨자부로(郡金三郞)라는 해운업자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회사로 무역업과 해운업을 주로 했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돼있고 지붕은 일식기와이며, 2층 창문은 아치형 창으로 이마돌과 조적으로 완만한 아치를 틀고 있다. 또한 의장 효과를 주기 위해 주두와 몰딩(창틀이나 가구 따위의 테두리를 장식하는 일)으로 처리하고 있다. 2009년 인천아트플랫폼 교육공간과 전시장 ‘크리스탈 큐브’로 사용하다가 2016년부터 ‘인천생활문화센터’로 운영하고 있다.

왼쪽 A동 인천생활문화센터(군회조점) 오른쪽 H동 인천서점과 커뮤니티관, 인천생활문화센터(금마차 다방).
왼쪽 A동 인천생활문화센터(군회조점) 오른쪽 H동 인천서점과 커뮤니티관, 인천생활문화센터(금마차 다방).

B동과 C동은 1948년에 지어진 건물인데 인천아트플랫폼이 착공되던 때까지 대한통운 창고로 사용됐는데, 창고 구조로서 가장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다.

B동은 건물 노후화로 인해 외형을 복원해 새롭게 리모델링됐다. 현재 인천아트플랫폼 ‘전시장’으로 입주 작가의 창작 무대이자 지역의 다양한 예술을 보급하는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C동은 가변적으로 활용이 가능한 블랙박스 형태의 ‘공연장’으로 창작과 실험적 공연예술은 물론 다양한 형태와 장르의 공연을 시민에게 제공하고 있다.

D동은 개항 이후 인천의 해운업을 독점했던 구 일본우선주식회사(日本郵船株式會社) 인천지점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248호이다. 건물의 준공 시기는 1888년으로 현존하는 대한민국의 근대건축물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 1904년에는 일본병참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인천아트플랫폼 ‘관리사무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왼쪽부터 대불호텔 전시관, D동 인천아트플랫폼 관리사무동(구 일본우선주식회사)과 C동 공연장(대한통운 창고).
왼쪽부터 대불호텔 전시관, D동 인천아트플랫폼 관리사무동(구 일본우선주식회사)과 C동 공연장(대한통운 창고).

E동과 F동, G동은 1933년 지어진 창고 건물이다. 한때 인천 지역예술가들의 ‘피카소 작업실’로 사용됐다. 창고의 전형적 형태인 박공지붕에 일식기와를 올렸으며, 출입문의 철문과 측면부분의 붉은 벽돌 원형이 일부 개조됐다.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작가의 작업 공간인 스튜디오와 창고갤러리, 커뮤니티아트 랩, 공동작업실과 게스트하우스로 사용하고 있다.

H동은 1943년 건축된 일본식 점포 건물로 당시에는 금마차 다방이 있었기 때문에 금마차 다방 건물로 불렸다. 현재는 인천을 소재로 한 책들을 모아 놓은 인천서점과 카페, 커뮤니티관, 인천생활문화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는 양쪽 벽을 벽돌로 쌓은 목조 2층 건물이었으나 그 위로 유리를 덮어 씌웠다. 그리고 S는 야외광장으로 현재 목선을 주제로 한 작품이 전시되고 있으며, W는 윈도우갤러리로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다.

건물 주변에 소규모의 재미난 작품들이 곳곳에 전시돼 있고, 쉴 수 있는 의자들도 마치 작품처럼 놓여있다. 이런 소품들과 근대 건축물들을 구석구석 돌며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에 담다보면 시간이 흘러가는 것조차 잊지 않을는지.

C동, 공연장(대한통운 창고).
C동, 공연장(대한통운 창고).
E2, E3동, 스튜디오.
E2, E3동, 스튜디오.
H동, 인천서점과 커뮤니티관, 인천생활문화센터(금마차 다방).
H동, 인천서점과 커뮤니티관, 인천생활문화센터(금마차 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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