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개항장 기행] 일본조계지 일대 탐방(2)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국내 최초의 공공종합문학관인 ‘한국근대문학관’ 본관

한국근대문학관 본관 건물.
한국근대문학관 본관 건물.

인천아트플랫폼 H동인 ‘인천서점과 커뮤니티관, 인천생활문화센터’로 쓰이는 건물 건너편에 ‘한국근대문학관’이 있다. 이곳은 본관으로 일제 때 지어진 창고 건물인데, 물류창고와 김치공장 등으로 활용되던 네 개의 창고를 연결해 전시·교육·행사 등 한국근대문학과 인문학을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전시관으로 재구성했다.

한국근대문학관 본관은 크게 세 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왼쪽에는 기획전시실이 있다. 이곳은 한국근대문학과 인문학 관련 다양한 테마나 중요 자료, 또는 타 장르와 결합한 전시를 하거나 낭독콘서트, 문학 관련 영상상영 공간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특별한 전시나 행사가 없을 때는 문을 닫아놓는다.

로비공간은 1·2층에 모두 있는데 1층에는 종합안내소와 작은 전시공간이, 2층에는 도서를 열람할 수 있게 도서들을 비치하고 그 앞에 책상과 의자들을 놓아 휴식하며 책들을 볼 수 있게 꾸몄다. 1층에 있는 작은 전시공간은 유리박스 안에 분기별로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희귀작품을 설명과 함께 전시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본관의 상설전시관 1층은 한국근대문학의 역사적 흐름을 알아볼 수 있게 근대계몽기(1894~1910년)에서 해방기(1945~1948년)까지 시대를 6단계로 나눠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은 시기별로 설명들이 붙어있을 뿐 아니라 주요 문인들의 작품 원본과 복각본, 동영상 등을 다양하게 검색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돼있다.

전시돼있는 작가와 작품들은 우리가 흔히 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시간에 많이 들었던 것들이 주를 이루기에 기억을 더듬으며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특히 고등학생들은 이곳에 와서 근대문학 체험을 하면 문학시간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전시된 신소설 이인직의 혈의누와 이해조의 자유종.
전시된 신소설 이인직의 혈의누와 이해조의 자유종.

최남선의 창가 ‘경부철도가’, 신소설의 대표작들인 이인직의 ‘혈의루’, 이해조의 ‘자유종’, 안국선의 ‘금수회의록’, 한국 최초의 번역 시집인 김억의 ‘오뇌의 무도’, 이광수의 ‘무정’ ‘이상선집’ ‘정지용시집’, 박태원의 ‘천변풍경’, 염상섭의 ‘삼대’, 채만식의 ‘태평천하’, 그리고 인천항의 부두노동과 동양방적(현 동일방직) 공장 생활의 생생한 묘사가 매우 뛰어난 강경애의 ‘인간문제’ 등 작품들의 원본과 복각본을 바로 눈앞에서 살펴볼 수 있다.

상설전시관 2층에는 인천이 배출한 근대문인이자 문학평론가며 수필가인 김동석, 극작가 함세덕, 시인 배인철의 설명과 책자가 전시돼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인천문학지도가 그려져 있고 인천이 배경 속에 등장하는 작품들을 소개했다.

또 연표로 보는 한국근대문학사와 한국근대대중문화를 소개하고, 마지막 출구 부분에 ‘도전! 문학사 퀴즈’와 그리운 사람에게 직접 엽서를 작성해 작가의 도장을 찍어 부칠 수 있게 우체통도 마련했다.

상설전시관에서 로비로 나가면 창고 건물의 노출된 벽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출구 표지판을 따라 1층으로 가지 말고 3층에 올라가보기를 권한다. 3층에 올라가면 창고 건물의 지붕과 기와, 벽체의 구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게 난간이 개방돼있다.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관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관 건물.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관 건물.
기획전시관에 전시된 인천을 형상화한 소설들.
기획전시관에 전시된 인천을 형상화한 소설들.

이곳에서 신포동 쪽으로 건물 하나를 더 지나가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인천문화재단 청사로 사용하다 건물을 개보수해 2010년 10월에 개관한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관이 있다. 1999년에 미쓰이(三井, 삼정)물산 인천지점으로 사용했던 건물로 초창기에는 2층 목조건물이었으나, 이후 현재의 2층 벽돌로 신축했다.

예전에 기획전시는 본관의 기획전시실에서 열었는데, 작년에 기획전시관이 따로 마련돼 이곳에서 기획전시가 열린다. 현재 ‘인천 문학 기행 : 인천 이야기가 되다’라는 제목으로 기획전시를 하고 있다.

1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한쪽 벽면에 ‘혈의누’(1906)부터 ‘철도원삼대’(2020)까지 인천을 형상화한 소설 작품들과 작품이 없는 것은 표지를 붙여 소개하고 있다. 그 오른쪽에 ‘연표로 보는 전시’가 있는데 이것을 읽어보면 작품과 간단한 해설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1·2층 모두 주제별로 작품 소개와 옛 사진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는데, 개항기 국제항구, 일제 때 해수 온천과 해수욕장 등으로 유명한 조선 최고 관광휴양지 중 하나인 월미도, 공업지대로 이주해온 노동자들의 문제, 인천에서 발행한 근현대 희귀 문예지, 조세희, 오정희, 이원규, 방현석, 김미월의 친필원고 등을 전시하고 있어 꽤나 흥미롭다.

‘인천맥주’ 양조장

인천맥주 판매소.
인천맥주 판매소.

기획전시관에서 한 블록 더 가면 인천시 무형문화제 제14호인 정성길 단청장이 2009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운 단청을 전문으로 하는 ‘혜명박물관’이 나온다. 그 맞은편 창고 건물에 ‘인천맥주’ 양조장이 있다.

인천맥주는 2016년 송도신도시에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이라는 수제맥주 펍으로 출발했는데, 2018년에 이곳에 양조 설비를 갖춘 ‘칼리가리 브루잉(CALIGARI BREWING)'을 설립했다. 그러다 2020년 지역과 맥주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인천맥주‘로 이름을 바꿨다.

인천에 수제맥주를 판매하는 술집은 많지만 수제맥주 양조장을 운영하는 곳은 ‘인천맥주’가 유일하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수제맥주가 나오는데 그중에 ‘개항로 라거’는 국내 최초로 미국의 비건인증기관인 ‘BeVeg International’로부터 비건 맥주 인증을 획득했다. 비건은 완전 채식을 말하는 것으로 채식주의자나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반가운 소식일 것 같다.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터

인천 미두취인소.(출처 인천시)
인천 미두취인소.(출처 인천시)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적 시장으로 불리는 ‘인천미두취인소’는 1896년 4월 1일에 설립 허가를 받았데, 표면적으로는 ‘미곡의 품질개선과 쌀값의 적정화 및 표준화’를 꾀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었지만 한반도 내 미곡시장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담긴 일제의 대표적인 수탈기관이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1989년 준공된 국민은행 신포동점이 들어섰다.

개항 이후 인천에는 미두취인소가 설립되기 전에 이미 1885년에 결성된 객주조합인 ‘인천객주상회(仁川客主商會)’가 있었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실려 오는 미곡의 집산을 도맡아 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천항에서 거래되는 모든 물화의 상권까지 쥐고 있었다. 일제는 인천항 객주들을 통해 넘겨받던 미곡을 미두취인소를 통해 자신들이 직거래함으로써 객주들의 손발을 묶고 유통조직까지 와해시키려 했다.

미두취인소는 훗날 한국 증권시장의 모태가 됐지만 흔히 미두장(米豆場)이라 불렸다. 곡물을 중개하고 거래하는 일종의 선물(先物)시장 역할을 했다. 거래대상은 미곡, 대두, 석유, 방적사, 금사, 목면, 명태 등 7개 상품이었다. 그러나 실제 거래는 미곡 1종으로 한정됐고 매매거래는 전후장으로 구분돼 집단경쟁매매 방법으로 행해졌다.

1920년대 이후 조선에서 산미 증식 계획이 시작되자 조선의 미곡 시장은 활황 국면을 맞이했다. 이 과정에서 시세 차익을 노린 투기 광풍이 불어 1930년대 후반까지 계속됐다. 고객 90%가 조선인이었으며 미두장에 바친 돈이 줄잡아 15년 내 수억 원(현시세 약 수십조 원)이라 해 당시 이로 인한 피해 규모가 끔찍할 정도였다. 이들은 결국 재산을 탕진해 패가망신하고 심지어는 자살로 내몰렸다.

이 폐해는 ‘개벽’(1924. 8월호)에 ‘인천아 너는 어떤 도시?’라는 제목으로 미두취인소를 ‘피 빨아들이는 악마굴’이라며 ‘조선인의 생활난이 여기에서 일어나고 장차 조선인 공사(公私) 경제의 파멸이 이로부터 다 닥칠 날이 멀지 않다’는 기사로도 실렸다. 또 이광수의 소설 '재생', 채만식의 소설 ‘탁류’와 희곡 '당랑의 전설'에도 미두취인소의 폐해가 잘 그려져 있다.

인천미두취인소터에 자리잡은 국민은행 신포동점.
인천미두취인소터에 자리잡은 국민은행 신포동점.

미두취인소와 관련된 사람으로 ‘미두신’이라 불린 반복창 이야기는 전국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했다. 그는 12살에 미두장에서 명성을 날리던 일본인 아라키의 하인으로 일하다, 2년 후 ‘아라키중매점’에서 미두꾼들에게 인천과 일본 오사카의 미두 시세를 전달하는 일을 하는 요비코가 됐다. 그러다 19살에 중매점의 시장대리인으로 발탁돼 신분이 상승했으나 1919년에 아라키는 부도를 낸 후 일본으로 도망가고, 그 여파로 미두취인소도 3개월 영업정지를 당했다.

다시 미두장이 개장하자 반복창은 자신의 재산 500원 가량으로 미두장에 뛰어든다. 그는 미두 중매점에서 쌓은 노하우로 인해 승승장구하고 큰 수익을 올린다. 단 한 번의 거래로 18만 원 가량의 돈을 벌어들이는 등, 쌀 시세를 정확히 예측해 재산을 40만 원(현시세 약 400억 원)으로 늘렸다.

그는 1921년 신여성으로 미의 여신으로 추앙받을 만큼 명성이 자자했던 ‘원동 큰 재킷’ 김후동과 조선호텔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초호화 결혼식을 올려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요시마쓰 인천부윤이 몸소 축사까지 낭독한 결혼식은 유럽의 왕실 결혼식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호화로웠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에 시세예측이 계속 빗나가 재산을 탕진하고 파산했으며, 1923년에는 사기혐의로 구속되기도 한다. 이후 아내 김후동은 그에게 세 아들을 남기고 이혼했으며, 거듭된 실패와 상실감으로 나이 서른에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다.

결국 정신마저 이상해져 10년 동안 비참한 삶을 살다가 1939년 미두장이 폐지되기 20일 전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반복창의 이야기는 양진채의 소설 ‘변사기담’에서도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

아무튼 요즘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에 열광하는 세태를 보며 ‘미두신’ 반복창이 떠오르는 것이 기우(杞憂)만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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