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개항장 기행] 청국조계지 차이나타운 ①

인천투데이ㅣ1883년 개항한 인천 개항장은 응봉산 자락에 일본조계지, 청국조계지, 각국조계지로 나뉘어 넓게 자리를 잡았다. 이에 외국 자본이 들어와 인천은 경제수탈의 현장이 됐지만, 그중 큰 변화는 다양한 서양의 근대 문화가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는 것이다.

개항 전에 인천은 한적한 포구로 인구가 1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개항 이후 일본과 청국, 각국의 조계가 설치되며 계속 외국인들이 들어왔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을 때 인구 상황을 살펴보면, 인천 인구는 3만1011명이었는데 외국인의 인구 비율이 52%를 넘었다.

인천은 다른 개항지역과 다르게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들어와 다양한 문화가 혼재된 생활을 했다. 인천의 각국 조계는 인천감리와 영국·미국·독일·청국·일본 등 5개국 대표가 모여 자치기구인 신동공사(紳董公司)를 만들었다.

각국 조계의 행정권 집행을 볼 때, 이들이 인구의 주축을 이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인 묘지에 묻힌 사람들을 보면,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러시아·호주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개항장에 거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개항으로 인해 인천은 다른 지역과 다르게 '다문화사회'로 다양한 문화가 존재했다. 그 흔적이 개항장을 중심으로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이에 기행 편의를 고려해 인천역에서 출발해 청국과 일본, 각국 조계지 순으로 지역을 확장하며 살펴보려 한다.

대한민국 최초 철도 시발지 ‘인천역’

인천역 앞 한국철도 탄생역이 적힌 모갈 1호 모형.
인천역 앞 한국철도 탄생역이 적힌 모갈 1호 모형.

인천역 앞에는 ‘한국철도 탄생역’이라 쓴 대리석으로 만든 기차 조형물이 놓여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 개통 시, 열차를 견인하는 증기기관차인 모갈 1호의 모형이다.

이 증기기관차는 미국의 브룩스사가 제작한 것으로 모두 4대가 부품단위로 도입돼 1899년 인천공장에서 조립됐다. 이때 객차 6량과 화차 28량이 함께 들어와 하루에 상행·하행 각 1회씩 운행했다.

1883년에 인천이 개항되자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제물포를 잇는 경인철도가 구상됐다. 경인철도 부설에 관심이 있던 미국 정부는 1883년 제물포와 한강의 수심 측량을 허가받고, 1887년에는 '전등 및 철도 신설계획의 요청' 공문을 보낸다.

이후 1891년 고종은 이완용과 이하영을 시켜 주한미국전권공사인 기업가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와 '철도창설조약'을 협상했으나 일본 정부의 개입으로 방해를 받았다.

청일 전쟁 직후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한국에서 철도의 주요 이권을 독점하려는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1896년 철도부설권은 미국의 모스에게 넘어갔다.

한국정부가 모스와 체결한 '경인철도특허조관'에는 특허일로부터 12개월 내에 기공, 그 후 3년 안에 준공하며 위반 시 특허의 효력이 상실된다고 규정돼있다. 이에 모스는 1897년 3월 22일 우각현(쇠뿔고개, 지금 석정로 삼거리 부근)에서 기공식과 함께 공사를 시작했다.

인천부내철도약도에 최초 철도 예정선과 인천역.(조선철도사 1권, 1929년)
인천부내철도약도에 최초 철도 예정선과 인천역.(조선철도사 1권, 1929년)

그런데 ‘한국철도 최초 기공지’ 비는 기공식이 있었던 석정로 삼거리 부근에서 서쪽으로 400여 m 떨어진 도원역 앞길에 세워져 있다. 일본은 부설권을 재취득하기 위해 거짓 소문을 미국에 흘렸다.

이에 미국 투자가들이 자금을 회수하게 되자 모스는 자금난을 겪는다. 거기다 철도 부지 문제로 일본인 지주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1899년 1월 31일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에 철도부설권을 양도했다.

경인철도의 시발역은 처음에는 탁포(坼浦, 인천여상 앞 사동일대)를 매립해 인천역을 설치할 계획으로 공사를 진행했으나, 철도 부지를 소유한 일본인 지주들과 협상이 이뤄지지 않아 전환국(인천여자고등학교 자리였던 중구문화원 자리)과 응봉산(자유공원) 뒤를 우회하는 현재의 인천역으로 선로를 변경했다.

이에 1899년 4월 23일에 재기공식을 갖고, 9월 18일에는 인천역과 노량진역 간 33.2km 구간이 개통돼 인천역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당시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13~14시간이 걸렸으나 경인철도 개통으로 1시간 30분 정도로 시간을 단축하는 꿈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인천은 물류 운송을 기선과 범선에서 철도로 바꾸는 획기적인 변화를 선도하는 도시가 됐으며, 한국의 철도시대를 여는 최초의 도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鐵道始發址(철도 시발지)’ 비가 노량진역 안에 세워져 있다. 경인철도가 놓일 때 기공식과 재기공식을 한 장소가 인천인데도 불구하고, 서울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코레일의 무지가 만든 결과인 것 같다.

한국 철도의 최초 시발지를 상징하는 인천역, 코레일의 협조를 받아 노량진역에 있는 ‘철도 시발지’ 비를 옮겨오거나, 불가능한 경우 인천 시민의 힘으로라도 ‘한국 최초 철도 시발지’ 비를 만들어 세워야 할 것 같다.

도원역 앞길에 세원진 ‘한국철도 최초 기공지’ 비석.
도원역 앞길에 세원진 ‘한국철도 최초 기공지’ 비석.

차이나타운의 제1패루 ‘중화가’

인천역 건너편에 ‘中華街(중화가, 중국인들의 거리)’라 쓴 현판이 걸린 패루(牌樓)가 화려한 색채를 뿜으며 우뚝 서있다. 패루는 주로 충신이나 효자, 절개를 지킨 부녀자 등을 기릴 목적으로 설립했는데, 문짝이 없는 문의 형상이다.

주로 도시 내의 주요 거리, 마을과 건물의 입구, 시내 중심지에 세워 장식으로 활용하거나 기념비 같은 건축물로도 이용했다. 그리고 해외에서는 중국 문화의 상징으로, 차이나타운의 입구에 많이 세웠다.

이곳에 있는 제1패루 ‘중화가’는 인천의 자매도시인 중국 웨이하이(威海)시가 2000년에 직접 기증한 것이다. 이후 한중문화관 옆에 제2패루 ‘인화문(仁華門, 어질고 밝은 빛)’, 차이나타운에서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곳에 위치한 제3패루 ‘선린문(善隣門, 한국과 중국 사람은 가까운 이웃)’, 송월동 동화마을 입구에 제4패루 ‘한중문(한중문, 한국 속의 중국으로)’ 등이 잇따라 세워졌다.

제1패루는 원래 목조 구조물로 기증받은 것이었는데, 2008년 목재 구조물이 떨어지는 사고가 나면서 기존 패루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웨이하이시에서 다시 기증한 돌패루를 세웠다.

오전에 찍은 차이나타운 제1패루 중화가의 모습.
오전에 찍은 차이나타운 제1패루 중화가의 모습.

나중에 세워진 패루들은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반면, 제1패루는 회색 석재로 만들어져 특색이 없는데다 밋밋하다는 평가가 이어져, 2016년 웨이하이시와 협의를 통해 중국식 단청전문가 2명이 현장에서 직접 기술지도해 새롭게 단청 도색작업을 했다.

회색빛 패루였을 때는 패루에 새긴 조각들이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형형색색의 옷을 입히자 얼마나 정교하게 조각했는지 가까이 가서 바라볼수록 감탄에 감탄,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각 기둥과 보 등에 용 46마리, 봉황 8마리, 사자 12마리 등이 새겨져 찾아봤는데 용은 너무 많아 세다가 결국 포기했다. 해가 넘어갈 음에 이곳에 가면 패루가 석양을 받아 더욱 붉게 물들어 화려함의 극치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뿜어내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차이나타운의 ‘밴댕이회거리’

차이나타운 밴댕이회거리.
차이나타운 밴댕이회거리.

인천역 월미도 모노레일 승강장 건너편에 ‘밴댕이회거리’ 간판이 보인다. 지금은 밴댕이를 파는 가게가 대여섯 집만 남았지만, 2001년 차이나타운이 월미관광특구로 지정되기 전만 해도 밴댕이를 먹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곳이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수원집은 지금은 사라진 인민군집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다 독립해 1969년에 개업했다고 한다. 언제부터 밴댕이집들이 이곳에 장사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밴댕이골목은 분명하다.

부두노동자와 주변의 공장노동자, 그리고 인천의 예술인들이 많이 찾던 곳으로, 해가 질 무렵이면 손님들이 들기 시작해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먹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가끔 기행 안내를 하고난 후 그분들과 이곳에 들러 밴댕이회에 막걸리 한잔 하는데, 요즘은 ‘밴댕이회거리’ 건너편에 있는 ‘만남의집’으로 간다.

이유야 나름대로 다르지만 인천 사람들에게 물으면 반드시 자신만의 단골집인 중국집과 횟집 하나 정도는 가슴에 품고 있지 않을까?

아무튼 역설적이게도 차이나타운이 관광특구로 지정돼 중국집에는 사람들이 몰리는 반면, 이곳 차이나타운 ‘밴댕이회거리’는 점점 과거의 영화를 잃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만남의집’ 왼쪽 뒤로 보이는 올림포스호텔. 그 아래에 제물포연초회사가 있었다.
‘만남의집’ 왼쪽 뒤로 보이는 올림포스호텔. 그 아래에 제물포연초회사가 있었다.
때마다 구성이 달라지는 모듬회(밴댕이·병어·준치 등)와 밴댕이무침.
때마다 구성이 달라지는 모듬회(밴댕이·병어·준치 등)와 밴댕이무침.

※ 천영기 시민기자는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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