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조계지 일대 탐방(12)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전국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린 ‘만국공원’

자유공원 광장에서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쪽으로 가는 길 입구 오른쪽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기념 헌수비’가 서있다. 2020년 4월 11일 중구청에서 헌수비를 세웠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기념 헌수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기념 헌수비.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직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인천 만국공원에서는 4월 2일 홍진, 이규갑 등이 주도하여 전국 13도 대표자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4월 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 임시정부 수립의 근간이 되었다. 국외에서는 3월 17일 노령 임시정부, 4월 11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정부는 4월 11일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이에 그 연원이 된 이곳에 한 그루 나무를 헌수함으로써 101년 전 민족 독립을 열망한 선조들의 높은 뜻을 만대에 기리고자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은 상하이 임시정부가 헌법을 발포한 4월 11일이다. 그렇지만 9월 11일 한성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원칙 하에 상하이를 거점으로 상하이 임시정부, 노령 임시정부(정확한 명칭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한 ‘대한국민의회’), 국내의 한성 임시정부 등 국내·외 임시정부 7개가 개헌형식으로 통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된다.

결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성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이고,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은 한성 임시정부의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인 거사가 일어난 장소가 되는 것이다.

13도 대표자 대회를 인천의 만국공원에서 가진 이유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해석과 외국의 조계가 만국공원 일대에 위치해 국제 위상을 고려한 결정이라는 것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홍진(洪震)의 선영이 관교동과 문학동 일대에 있어 인천과 남다른 인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아마도 경성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며 13도 대표가 모이기 적합한 곳을 인천역 바로 앞에 있는 만국공원으로 잡은 것은 철도망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다. 1919년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을 필두로 경부선·경의선·호남선·경원선 등 주요 철도가 놓여있기에 경성과 가까운 이곳이 대회를 열기에 적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홍진’의 업적과 ‘한성 임시정부’의 역할을 밝히는 전시관이 들어서기를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34회 의정원의원 일동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홍진, 5번째가 김구이다.(국사편찬위)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34회 의정원의원 일동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홍진, 5번째가 김구이다.(국사편찬위)
노령 임시정부라 불리는 ‘대한국민의회’의 전신인 전로한족회중앙총회 결성 장소(당시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실업학교).
노령 임시정부라 불리는 ‘대한국민의회’의 전신인 전로한족회중앙총회 결성 장소(당시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실업학교).

3·1독립만세운동 이후에도 각 지역별로 계속해서 만세운동이 이어져 일제의 감시가 심해 대표 20여명만 참석하고 많은 분들이 참석하지 못했다.

만국공원의 대회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기에 감시를 피해 손가락에 흰 천이나 흰 종이를 감아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표시를 했단다. 이날 이들은 미리 마련했던 임시정부 조직안과 헌법을 통과시켰으며 4월 23일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정부 수립을 선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홍진은 1946년 임종을 맞이하기 전에 인천 선영에 안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김구를 비롯한 당대의 지도자들과 1000여명의 군중이 모여 영결식을 명동성당에서 갖은 후 유언대로 인천 선영에 안장했다.

이후 1984년 12월 15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됐다. 이때 그의 묘비는 유족의 허락을 받아 인천시립박물관(현 제물포구락부) 앞마당으로 옮겼다가 박물관이 옥련동으로 이전하며 보존 문제로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한성 임시정부의 근간이 된 13도 대표자 대회의 현장인 만국공원, 이를 주도하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홍진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이곳에 3·1독립만세운동과 한성 임시정부에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밝히는 전시관을 만들어 만국공원의 위상을 알리면 좋을 것 같다.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인천해관장 사택 터(현재 리움 하우스웨딩 자리)’에 있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표지석(2021년 11월 말 교체)
‘인천해관장 사택 터(현재 리움 하우스웨딩 자리)’에 있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표지석(2021년 11월 말 교체)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으로 가는 입구는 양쪽에 사람 키보다 조금 높게 석조 담벼락을 세우고 나무를 심어 어느 계절에 보더라도 운치 있게 보이지만,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날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이 길을 따라가면 기념탑의 중앙 내부로 들어가게 돼있다.

기념탑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00주년을 맞이해 1982년 건립됐는데 표지석 내용을 보면, 1882년 5월 22일 대조선국 전권대관 신헌과 대미국 전권대신 로버트 윌슨 슈펠트와의 사이에 제물포 화도진 언덕에서 조인 체결됐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2013년 실제 조약 체결 장소인 ‘인천해관장 사택 터(현재 리움 하우스웨딩 자리)’의 정확한 위치를 표기한 세관 문건이 발견돼, 고증을 통해 자유공원 인근 삼국지 벽화 거리 옆 지점을 조약 체결 장소로 확정하고 2019년 한글판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표지석을 세웠다.

그러다 올해 11월 말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인천의 외교적 문화유산을 알리기 위해 영문과 중문을 추가해 새로운 표지석으로 교체했다. 이에 따라 100주년 기념탑의 표지석 내용도 시급히 바꿔야 할 것 같다.

이 기념탑은 한미 수교 통상 조약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향후 한미 양국 간의 상호 신뢰와 우호 협력 관계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건립했는데, 건축가 강석원이 설계했고 중앙의 조각 ‘움직임 그 100년’은 조각가 최만린이 맡았다. 탑의 외형은 돛을 형상화시킨 형태이며 인간·자연·평화·자유를 탑 8개로 구성함으로써 양국이 상견례하는 뜻과 결속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이야 공원에 조명도 밝고 관리가 잘 되고 있지만 기념탑이 세워진 초창기에는 밤만 되면 행락객들이 술을 먹고 쓰레기를 버려 골머리가 아픈 적도 있고, 기념탑의 재료는 철재로 만들었지만 외피는 동판을 부착해 기념탑의 상층부 동판이 떨어져 나가고 녹이 슬어 보수공사를 하기도 했다.

그때 돛을 형상화한 탑의 끝이 너무 날카롭게 뾰쪽해서,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우리의 자연을 거스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인천의 랜드마크였던 ‘존스턴 별장’

인천항 해안의 광경 그림엽서. 오른쪽 응봉산 정상에 존스턴 별장이 보인다.
인천항 해안의 광경 그림엽서. 오른쪽 응봉산 정상에 존스턴 별장이 보인다.
각국공원 정상 존스턴 별장 풍경 사진엽서.
각국공원 정상 존스턴 별장 풍경 사진엽서.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존스턴 별장’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건물은 영국인 사업가 제임스 존스턴(James Johnston)의 여름 별장으로, 1903년 건축을 시작해 1905년에 준공한 지상 4층의 유럽양식으로 지어진 석조 건축물이었다. 건축 설계는 상하이 독일인구락부를 건축했던 중국 칭다오(靑島) 독일총독부소속 건축사 쿠르트 로트케겔(Curt Rothkegel)이, 건축은 중국인 이경통(李慶通)이 했다고 한다.

건물은 아름다운 다각형의 붉은 기와와 복잡하게 굴곡 처리된 벽면에 다양하게 창문을 냈다. 그리고 바다를 향한 방향으로 사각형 망루를 세웠는데 1층과 2층 사이의 벽면 모서리에 창을 비껴든 기사상이 우뚝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4층은 5평(약 16.53㎡) 정도 크기에 발코니를 만들어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대략 5276평(약 1만7441㎡)의 대지 위에 연면적 566평(약 1871㎡)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별장이었다. 그리고 기와는 중국 칭다오에서, 전기장치와 램프는 독일에서, 모든 가구는 영국에서 구입해 치장했다.

‘존스턴 별장’은 1900년대 인천 개항장에 지어진 양관 중에 가장 크고 아름다워 인천의 랜드마크라 불렸다. 최성연의 <開港과 洋館歷程(개항과 양관역정)>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응봉산 서쪽 마루 비단결 같은 잔디위에 아담스레 자리 잡은 인천각은 가까이 가면, 구석구석 오밀조밀한 건축미의 극치를 이룬, 귀족적 향기 높은 영국 근세식 일대 전당이요- 멀리 해상에서 바라다보면 아물아물한 시야 속에서도 색채가 영롱하게 도드라져 보이던 탓으로 일찌기 내외 선원으로부터 인천항구의 ‘랜드·마아크’(目標)로 불리워 왔다고 전한다.”

이 별장은 상하이에서 항만시설공사로 큰 부를 추적한 존스턴이 여름별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지었기에 난방시설이나 난로 같은 것도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별장 내부의 목재 장식을 위해 상하이에서 조각가 10여명을 초빙해 몇 개월에 걸쳐 완성했다고 하니 내부도 엄청 아름다웠을 것이다.

또한 별장이 완공됐을 당시에는 인천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어서 정원에 별도로 발전기를 설치했으며, 우물로부터 옥상으로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펌프 시설도 설치했다고 한다.

존스턴은 여름이면 상해에서 가족들과 피서를 하기 위해 이곳으로 올 때는 친구들을 동반해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때는 기선 한 척을 통으로 전세 내어 많은 사람들을 초빙했다고 하니 엄청난 거부(巨富)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1919년 상하이에서 죽자 독일 상사인 세창양행의 경영주 칼 발터와 결혼한 딸이 인천으로 돌아와 이곳에 잠시 거주했다.

다양하게 용도 변경 됐다가 사라진 ‘존스턴 별장’

인천상륙작전 이후 파괴된 존스턴 별장(사진 출처 미상).
인천상륙작전 이후 파괴된 존스턴 별장(사진 출처 미상).
인천 서공원 정상 풍경 사진엽서(출처 인천개항박물관).
인천 서공원 정상 풍경 사진엽서(출처 인천개항박물관).
존스턴 별장 주두로 추정되는 돌.
존스턴 별장 주두로 추정되는 돌.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자 칼 발터도 독일인인 관계로 많은 재산이 동결돼 적산관리를 받는다. 이에 경제적 고통을 받고 있던 발터부인은 1919년 일본인 히로자와에게 헐값에 매각한다.

그후 다시 야마쥬(山十)에게 매각돼 한때 ‘야마쥬 별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 ‘가다구라’ 등에게 팔렸는데 아마도 1936년 2월 인천부청이 매입해 주식회사 성영사와 계약을 체결한 것을 보면 성영사의 인물인 것 같다.

인천부청이 매입한 후 처음에는 ‘서공원회관(西公園會館)’으로 이름을 지었으나 1936년 7월 다시 ‘인천각(仁川閣)’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곳은 고급 여관 겸 요정으로 인천을 찾는 귀한 손님들을 영접하는데 활용했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미 군정청이 접수해 고급 장교 독신자 숙소(BOQ)로 사용하다 철수 후 인천에 주둔하는 국군 장교구락부로도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때 바다 쪽을 향한 망루의 벽체에 세운 기사상과 벽체 일부, 망루의 지붕, 본체 건물의 벽체 일부가 포탄을 맞고 부서졌다. 사진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수리해서 복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1951년 12월 대한청년단 인천시단장 김영일에게 벽돌과 주춧돌 등 건물의 잔해 모든 것이 수의계약으로 팔려 인천의 랜드마크였던 ‘존스턴 별장’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이후 이곳에 어린이 놀이공원이 들어섰다가 1979년 수봉공원으로 옮기고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들어섰다. 그런데 존스턴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도 없이 2005년 ‘각국공원 창조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또 2016년에는 ‘개항창조도시 도시재생활성화사업’을 추진하며 ‘존스턴 별장’을 복원하려고 했으나 지역사회의 반발로 무산됐다.

이미 사라진 건축물, 특히 제국주의 약탈의 상징이 될 수 있는 건물을 단순히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 콘텐츠로 만들겠다는 인천시의 반복된 볼거리 위주의 복원 정책은 더 이상 추진되지 않기를 바란다.

‘존스턴 별장’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별장의 주두(柱頭)로 추정되는 돌 2개는 개인주택으로 들어가는 입구 석주 앞에 박혀있다. 1990년도 초반에 우연히 이 앞을 지나가다 나물을 다듬고 있는 아주머니가 계셔 그 돌들이 뭐냐고 물으니 ‘인천각(존스턴 별장)’이 파괴되었을 때 직접 가서 주워왔다고 한다. 소중한 돌이니 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니 돈을 받으면 모를까 기증할 마음이 없다고 한다.

올해 자유공원에 몇 번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혹시나 하고 들렀는데 예전의 모습 그대로 잘 박혀있다. 이 주두의 실제 값어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존스턴 별장’의 마지막 남은 돌이라는 것에 의미를 둔다. 거의 70여 년 이곳에 박혀서 존재했으니 계속 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소는 밝히지 않는다.

중구가 매입하거나 기증을 받는 방법을 찾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중앙 광장으로 옮겨 전시해, 이곳이 ‘존스턴 별장’ 터가 있던 곳이라는 것을 알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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