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개항장 기행] 각국 조계지 일대 탐방(2)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인천공회당’에서 ‘인천시립시민관’으로

‘인천감리서’ 터가 있는 스카이 타워(SKY TOWER) 아파트 주차장 입구에서 인성여고 방향으로 가다보면 길 끝에 인성여고 다목적관이 나온다. 지하는 주차장으로, 1·2층에는 교실과 특별실 등, 3층에는 체육관이 들어서 있는 엄청나게 큰 건물이다. 이곳에 ‘인천공회당(仁川公會堂)’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공회당은 집회나 공공의 회의를 목적으로 건립된 공공시설로 지방정부나 공공단체가 소유하고 있다.

인천공회당_ 자리에 들어선 인성여고 다목적관. 앞에 검은 쇠기둥 위 공사하는 모습이 홍예문 공사를 나타내는 것 같다.
인천공회당_ 자리에 들어선 인성여고 다목적관. 앞에 검은 쇠기둥 위 공사하는 모습이 홍예문 공사를 나타내는 것 같다.
인천공회당 정면 모습.(인천도시역사관 전시)
인천공회당 정면 모습.(인천도시역사관 전시)

1914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도의 위치·관할 구역 변경 및 부·군의 명칭·위치·관할 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을 근거로 통치의 편의를 위해 조선의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한다. 부군면 통폐합(府郡面 統廢合)을 단행해 11개의 부(府)를 새로 만들어 부제(府制)를 실시했다. 이에 인천부는 현재 중·동구 일대로 축소됐고 나머지 인천 지역과 부평군을 통합해 부천군이 신설된다.

이와 함께 개항장에 유지되고 있던 조계 제도를 폐지한다. 각국조계와 청국조계도 이때 폐지됐다. 이에 따라 일본인들을 보호하고 이익을 대변하던 ‘인천일본거류민단’은 해체되고, 그 사무소는 ‘공회당’으로 용도를 바꿔 집회장소나 문화시설로 사용된다. 사무소는 현재 중구청 동쪽 관동1가 8번지에 있었다.

1923년 ‘인천공회당’은 현재 인성여고 다목적관이 있는 자리에 새로 2층 붉은 벽돌로 건물을 짓고 이전한다. 건설자금은 인천부와 인천상업회의소(현재 인천상공회의소)가 나눠 부담했다.

그래서 정면과 좌측 두 곳에 모양이 똑같은 돌출된 출입문을 만들었다. 정면 중앙 출입문 위에는 ‘仁川公會堂(인천공회당)’, 좌측 출입문 위에는 ‘仁川商業會議所(인천상업회의소)’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좌측 출입문은 주로 ‘인천상업회의소’ 사무실에 일이 있는 사람들이 이용했다.

홍예문로에서 바라본 인천공회당 측면 모습.(인천도시역사관 전시)
홍예문로에서 바라본 인천공회당 측면 모습.(인천도시역사관 전시)

광복 후에는 미군정 수용소로도 사용됐다가 한국전쟁 당시 함포를 맞아 일부가 소실됐다. 1956년 인천시는 미군의 원조를 받아 건평 510평(약 1686㎡)에 객석 1200석, 3층의 대극장으로 새로 지어, 1957년 ‘인천시립시민관’으로 이름을 고치고 문을 열었다. ‘시민관’은 주로 영화를 상영했지만 연극공연, 집회, 강연회, 권투경기, 쇼 등 각종 행사가 펼쳐지는 복합 문화공간이었다.

1962년 예총 인천지부가 경상비를 마련하고자 시로부터 ‘시민관’ 운영권을 위임받았으나, 계속적으로 누적되는 적자로 결국 1968년 인성학원에 매각해 송학동 시절을 마감했다. 이후 1974년 주안에 문을 연 '인천시민회관'이 ‘인천시립시민관’의 역할을 대신했다. 그 후 1994년 구월동에 개관한 현대식 문화예술공간인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으로 다시 역할이 넘어갔다.

‘공회당’에서 있었던 대표적인 행사를 살펴보면 그 역할이 복합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봉암, 정수일, 김종범 등이 강연한 인천국제청년데이, 관동 대지진 피해 조선인 추도회, 인천영화학교 주최의 강연과 음악회, 음악무도회 개최와 현제명 독주와 4중창단 연주, 인천부 토산품품평회, 인천용동권번 기생들의 만주이재동포 위문의연기생연예대회(滿洲罹災同胞慰問義捐妓生演藝大會), 개항 50주년 기념 축하회, 인천야담대회, 위안만담대회, 영국을 배척하는 배영동지회, 인천주류품평회, 여운형, 조병옥 등의 강연회, 예수교 대부흥회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성미카엘성당’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성미카엘성당. (1892년 7월 Morning Clam 잡지에 실림)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성미카엘성당. (1892년 7월 Morning Clam 잡지에 실림)

성공회의 우리나라 선교는 1890년 9월 영국 해군 종군신부였던 코프(Charles John Corfe, 한글명 고요한) 주교와 내과 의사인 미국인 랜디스(Elibarr Landis, 한글명 남득시)가 인천에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코프 주교는 각국거류지 북동쪽에 위치한 송학동 3가 3번지(현재 인성여고 다목적관 뒤 공영주차장 자리)를 구입해 성공회 성당 착공에 들어간다.

1891년 9월 29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건축된 성공회 성당으로, 다음날인 9월 30일 ‘성미카엘과 모든 천신(St. Michael and All Angels)’이란 이름으로 축성(祝聖)됐다. 서양 교인들은 ‘성미카엘성당’, 조선인 교인들은 ‘인천교당’으로 불렀다고 한다.

코프 주교는 성당 건축을 하던 중 내동 3번지(현재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에 두 번째로 토지를 구입하고 랜디스의 의료선교를 활성화하기 위해 ‘성누가병원(St. Lukes Hospital)'을 건립한다.

1913년 배드콕(Badcock, 한글명 박요한) 신부가 관할 사제가 되면서 ‘성마카엘성당’도 본격적인 교회의 면모를 갖추며 발전하기 시작했다. 1926년에는 황석희(黃奭熙) 신부가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관할사제로 부임했으며, 1934년에는 인천전도구로 승격됐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성미카엘성당’은 폐허로 변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군에 의해 조용호 신부가 납치되고 순교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이후 주일미사는 내동 3번지에 있던 ‘성누가병원’ 자리의 허름한 공간에서 이뤄졌다. 1952년 관할사제로 전세창(스테반) 신부가 부임하면서 ‘성마카엘성당’ 부지를 매각했다. 이에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이 지어졌던 송학동 시대를 마감하고 ‘성누가병원’ 자리에 성당을 신축하며 내동시대가 열린다.

일제 수탈의 현장인 ‘홍예문’

과거 홍예문 모습.(인천도시역사관 전시)
과거 홍예문 모습.(인천도시역사관 전시)

‘성미카엘성당’이 있던 공영주차장 바로 위로 ‘홍예문’이 보인다. 홍예문(虹霓門)이란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虹霓)같이 둥글게 만든 문을 말하는 보통명사로, 인천의 홍예문 역시 그 모양을 보고 붙여진 이름이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며 고유명사가 됐다. 밑에서 보면 별로 높아 보이지 않지만 높이 13미터, 아파트 5층 정도의 건조물로 위에서 보면 아찔하게 내려다보인다.

송학동 마루턱에 홍예문을 축조한 이유를 알려면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개항 후 일본조계를 설정할 때 조선에서는 넓은 해안지대를 빌려 주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은 조계가 넓으면 오히려 관리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현 중앙동과 관동 일부의 약 7000여 평(약 2만3140㎡)에 스스로 만족한다.

그러다 청일 전쟁(1894) 이후 일제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일본 거류민의 수가 급격히 늘어난다. 결국 자신들이 설정한 조계 면적이 부족하게 되자 일본인들은 전동, 신생동, 내동 방면으로 침투하는 한편 해안을 매립해 그들의 거주지역을 넓혀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주공간의 부족을 해결할 수 없어 다시 현재의 만석동으로 거류 지역을 확대하려 했다.

당시 이 지역의 도로 사정은 지극히 나빠 일본조계에서 만석동에 가려면 매우 가파른 서북 해안선을 따라 가야 하거나, 용동 마루턱을 거쳐 화평동을 우회하는 것이 유일한 통로였다. 그러나 서북 해안선은 매우 급경사여서 우마차로는 갈 수가 없었고, 우회도로는 인력과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비교적 짧은 거리인 현 송학동 마루턱을 깎아 아래로는 만석동으로 가는 길을 뚫는 동시에, ‘홍예문’ 위로는 각국조계와 측후소로 가는 길을 만들고자 했다.

홍예문 너머 왼쪽 그늘로 양산을 들고 넘어오는 서양정장 차림을 한 여성이 보인다.(인천도시역사관 전시)
홍예문 너머 왼쪽 그늘로 양산을 들고 넘어오는 서양정장 차림을 한 여성이 보인다.(인천도시역사관 전시)

이에 경부선과 경의선 부설 공사를 위해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공병대에 의해 1905년 착공되고, 공사는 1906년부터 시작된다. 홍예문의 설계와 감독은 일본이 맡았는데, 유명한 중국의 석수장이들이 공사에 참여했고 흙일과 잡일은 기술도 돈도 없던 조선 노동자들이 맡았다. 그러나 공사를 진행할 때 예기치 못한 암석들을 만나 공사 기간이 오래 걸렸다 한다.

응봉산을 관통하는 도로 공사는 산이 높고 양쪽이 급경사면을 이루어 인력에 의존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오로지 곡괭이나 삽 같은 기본적인 도구로 거대한 암석을 부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한국에서의 독점적 권력을 차지한 일본인들은 수많은 조선인 노무자들을 동원해 이를 강행, 1908년 이 도로를 완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쳐 희생됐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홍예문’을 구멍이 뚫린 문이라 ‘혈문(穴門)’이라 불렀지만, 조선인 노동자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피로 뚫은 ‘혈문(血門)’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공사는 완료됐고 화강암으로 쌓은 거대한 축대와 ‘홍예문’이 만들어졌는데, ‘홍예문’ 안의 천장은 빨간 벽돌로 마감했다.

멀리서 볼 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왜소하게 보이지만 이 길을 걸어보면 의외로 거대한 건조물임을 알 수 있고, 그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공사를 했는지 절절히 느낄 수 있다.

당시 일본의 토목공법을 알 수 있는 문화재로서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돼있지만, 수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된 ‘홍예문’ 공사는 이후 산의 정기가 끊어진데 대한 응봉산 신령의 노여움 때문인지, 아니면 그때 희생당한 한국인 노동자들의 원혼 때문인지는 몰라도 1950~60년대에는 많은 사람들의 자살 장소로 이용돼 가끔씩 신문지상에 올랐다.

지금이야 아무 생각 없이 ‘홍예문’을 지나다니지만 실제로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수탈하기 위해 만든 도로의 현장이며,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피땀이 스며든 통곡의 문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현재 홍예문 모습. 홍예문 안은 차량 1대가 겨우 지나가기에 맞은편에서 오는 차는 통과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현재 홍예문 모습. 홍예문 안은 차량 1대가 겨우 지나가기에 맞은편에서 오는 차는 통과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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