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조계지 일대 탐방(15)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전동(錢洞)’의 지명유래

동인천역에서 자유공원 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오른쪽으로 세 블록 가면 예전에 인천여고가 있던 자리가 나온다. 현재 이곳은 ‘동인천동 행복복지센터’와 ‘미추홀 문화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으로부터 제물포고등학교와 인천기상대 일대까지를 ‘전동(錢洞)’이라 해 돈 전(錢)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구한말에 이곳은 다소면(多所面) 선창리(船倉里)의 일부였다.

전동 일대 지도.
전동 일대 지도.
인천전환국이 있었던 동인천동 행복복지센터.
인천전환국이 있었던 동인천동 행복복지센터.

1892년 이곳에는 근대식화폐를 만드는 기관인 전환국(典圜局)이 설치됐다. 이후 1906년 지금의 학익동, 문학동, 관교동, 선학동 일대를 포괄하던 인천부(仁川府) 부내면(府內面)은 인천부 구읍면(舊邑面)으로 개칭되고, 부내면의 이름은 당시 다소면의 일부였던 개항장으로 넘어간다. 이때 부내면에 동이 몇 개 늘어나며 전환국이 있던 동네라고 ‘전동(典洞)’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에서 실시한 대규모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말미암아 이곳은 다시 일본식으로 산근정(山根町)이라 바뀌었다. 야마네(山根)는 러일전쟁 당시 병참부의 사령관을 맡고 있던 일본군 소장의 이름이다. 그는 러일전쟁이 끝난 뒤에 공병대를 이끌고 이곳 전환국 청사에 주둔했다. 이런 이유로 일본인들이 야마네(山根)의 이름을 따 동네 이름을 산근정(山根町)이라 지었다.

광복 뒤 1946년 다시 전동으로 바뀌었는데 한자는 이전에 사용됐던 전동(典洞)이 아닌 전동(錢洞)을 써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전환국의 전(典)자를 전(錢)자로 착각해서 썼거나, 전환국이 돈을 만드는 기관이었기에 돈 전(錢)자를 써서 ‘전동(錢洞)’이라고 사용했을 것 이라 추정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화폐

조선시대에 동전을 주조하기 위해 설치됐던 임시 관청으로 주전소(鑄錢所)가 있었다. 중앙의 관련 부서나 지방의 감영 등에 설치했는데 상설 관청이 아니었기에 그 연혁이나 직제 등의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4차례의 설치 상황이 나타나 있다. 세종 초 양근군(楊根郡, 지금의 양평군)에 주전소를 설치한 것부터 1807년(순조 7) 균역청(均役廳)에 주전소를 설치하고 30만 냥을 주조했다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조선 말 세도 정치로 만성적인 재정난과 개항 이후 개항에 필요한 비용, 해외사절단 파견비, 신식군대 창설비 등 재정수요가 계속 증폭돼 조선정부는 극심한 재정 압박을 받는다.

대동은전(대동1전, 2전, 3전) 앞면과 뒷면. 뒷면에는 호조(戶曹)에서 발행했다고 戶자를 새기고 흑, 청, 녹색 등 칠보로 덮었다.
대동은전(대동1전, 2전, 3전) 앞면과 뒷면. 뒷면에는 호조(戶曹)에서 발행했다고 戶자를 새기고 흑, 청, 녹색 등 칠보로 덮었다.
당오전. 앞면은 상평통보를 뒷면은 우좌 당오, 상하 전일을 압인기로 압인하여 제작됐다.(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제공)
당오전. 앞면은 상평통보를 뒷면은 우좌 당오, 상하 전일을 압인기로 압인하여 제작됐다.(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제공)

이에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1882년(고종 19) 7월 ‘대동은전(大東銀錢)’을 주조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은으로 만든 최초의 근대적 화폐이다. 그러나 대부분 해외로 유출되거나 재산 축적용으로 퇴장해 거의 유통되지 못했다. 또한 원료인 마제은의 가격 급등으로 1883년 6월 주조가 중단된다.

이에 보다 적극적인 통화개혁이 필요해 1883년 2월 구리로 만든 당오전을 발행했으나 필요한 만큼의 충분한 화폐를 발행하지 못해 조선정부는 새로운 화폐 주조를 계획한다.

1883년 7월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 국내외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군국기무(軍國機務)와 편민이국(便民利國)을 총괄하는 관청) 산하에 전환국(典圜局)을 설치하여 화폐 주조에 대한 사무를 맡도록 하고 서울에 경성전환국을 설치한다.

이렇게 출발한 경성전환국은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는 한편 독일인 기술자 3명을 초빙하고 독일로부터 기계를 구입하여 금·은·동화 등 14종의 신식 화폐를 주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조기술의 부족과 재료 조달이 어려워 시험적 주조에 그치고 만다. 결국 조선정부는 신식 화폐주조사업이 부진한 가운데 전환국으로 하여금 당오전 주조사업을 전관토록 했으나 이것마저 통화 혼란만 야기했다.

인천전환국

인천 전환국.(인천시 제공)
인천 전환국.(인천시 제공)

결국 경성전환국의 신식 화폐 발행사업이 중도에 좌절되자 조선정부는 상평통보 발행과 관련한 협조를 구하기 위해 1891년 전환국 방판(幇辦, 실무를 담당한 관직) 직위에 있던 안경수를 일본 오사카(大阪)로 파견한다.

안경수는 오사카에서 지인인 임유조를 만나 오사카제동회사(大阪製銅會社) 사장 마스다 노부유키(增田信之)를 소개받는다. 마스다는 상평통보 주조를 위한 자금은 지원하기 어렵고, 신식화폐를 발행하면 자금을 빌려주겠다는 말에 조선정부와 협의해 일본화폐와 형태, 중량, 품질이 동일한 화폐를 주조하기로 했다.

마스다는 신설되는 전환국 자체를 담보로 하는 동시에 공장 운영의 감독과 작업에 필요한 자재(은, 동판 등) 공급을 마스다에게 일임하는 조건으로 일본 정부의 기증금 2만 700여 원과 마스다의 개인투자금 25만원을 대부받기로 했다.

이 결과 1892년 일본과 교통이 편리하며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조건을 가진 현재의 위치에 ‘인천전환국’을 설치하게 된다. 당시 일본의 영향력이 서울보다는 인천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인들의 입김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인천전환국’ 건축공사는 1892년 5월에 6만원의 예산으로 건축공사를 시작해 같은 해 11월에 준공된다. 건물은 3개동이 요철형으로 배치돼 중앙의 정원을 중심으로 정면과 좌우에 한 채씩 배치됐다.

정면 중앙의 건물에는 사무실, 화폐조사실, 검인실 등이, 동쪽건물에는 기계실과 기관실 등을, 서쪽 건물에는 창고, 조각소, 감찰소 등의 공간을 설치했다. 이 3동의 건물 외에도 순검 숙직실, 철공장 등 총 5개의 벽돌건물이 있었다. 또한 유치장, 관사, 직공관사 등 3개의 목조 건물이 배치되었고 부속시설로 굴뚝과 우물이 2개 있었다.

인천 전환국 제조 화폐.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5량 은화, 1량 은화, 2돈5푼 백동화, 5푼 적동화, 1푼 황동화 동전들.(인천개항박물관 전시)
인천 전환국 제조 화폐.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5량 은화, 1량 은화, 2돈5푼 백동화, 5푼 적동화, 1푼 황동화 동전들.(인천개항박물관 전시)

이때 주조된 화폐의 재료는 주로 은과 동이 쓰였는데 닷량(五兩) 은화, 한량(一兩) 은화, 두돈오푼(二戔五分) 백동화, 오푼(五分) 적동화, 한푼(一分) 황동화 등 다섯 종류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신식기계를 비치했다 하더라도 기술과 설비의 미비로 겨우 은전과 동전을 프레스(눌러서 찍음)할 뿐, 아직 금속을 용해 혹은 압연(롤러에 돌려서 펴는 것)하는 단계는 되지 못했다.

이렇게 일본의 자본과 기술로 세워진 전환국은 이후 일본의 간섭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우리 정부의 고급관원과 파견된 일본 정부 관원과의 계속된 알력으로 1893년 3월 계약을 파기하기에 이르렀고, 조선정부는 그때까지 투자된 마스다의 돈을 돌려주게 된다.

그 후 1898년 인천 전환국은 고종의 명에 의해 용산으로 이전이 공포된다. 용산 전환국이 준공되고 경인철도가 완공돼 화물운송이 편리해지자 1900년 7월 화차에 모든 설비와 기계를 싣고 서울의 ‘용산전환국’으로 이전한다.

‘인천전환국’은 1904년 러일전쟁 당시에는 일본의 철도감부가 사용했으며, 이후 일본인소학교 분교장으로도 사용됐다. 그리고 1908년 4월 재봉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인천여자실과학교로 개교했다가, 1913년 인천공립고등여학교로 다시 문을 열었다.

철도감부로 사용됐던 인천 전환국.(인천도시역사관 전시)
철도감부로 사용됐던 인천 전환국.(인천도시역사관 전시)

1926년에는 벽돌조 2층 규모의 교사를 신축하면서 결국 전환국 건물들은 헐려 사라졌다. 광복 후에는 인천여자고등학교로 변경됐고 1998년 인천여고가 연수동으로 이전하자 이곳에 ‘동인천동 행정복지센터’와 ‘미추홀 문화회관’이 들어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인천여고로 사용됐을 때 건물 안쪽으로 연못이 있어 물이 빠지면 전환국에 사용됐던 몇 개의 석재를 볼 수 있었다. 동인천동 행정복지센터로 바뀐 후 연못은 주차장으로, 뒤에 있던 교사는 헐어내고 ‘인천시 중구 치매안심센터’를 신축했다. 연못에 있던 석재 몇 개를 ‘동인천동 행정복지센터’ 앞 화단으로 옮겼는데 이번에 다시 사진을 찍으러 갔더니 안타깝게도 어디로 옮겼는지 보이지 않는다.

현재 건물 맞은편으로 ‘舊跡 韓國時代造弊所之地(구적 한국시대조폐소지지)’라 쓴 비와 전환국지 표지석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인천전환국’에서 발행한 닷량 은화 모형이, 왼쪽으로는 ‘인천여자고등학교 옛 터’ 표지석이 서있어 이곳의 변화를 전해줄 뿐이다.

‘舊跡 韓國時代造弊所之地(구적 한국시대조폐소지지)’ 비와 전환국지 표지석.
‘舊跡 韓國時代造弊所之地(구적 한국시대조폐소지지)’ 비와 전환국지 표지석.

‘동인천 삼치거리’와 ‘화평동 냉면거리’

‘동인천동 행정복지센터’ 앞으로 1980년대부터 ‘동인천 삼치거리’가 조성돼 현재 10여 개의 식당이 성업 중이다. 예전에는 용동마루턱으로 올라가는 길을 중심으로 좌우 골목길에 가정집들 몇 곳에서 삼치집을 운영했다. 싼 가격과 인근 양조장에서 빚은 막걸리 맛에 사람들이 몰렸는데,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는 마당에 자리를 펴고 먹었던 추억이 있다. 그 당시에는 연탄구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나 둘 삼치집들이 사라지다 30여 년 전 ‘인하의 집’이 이곳으로 옮겨온 후 계속해서 식당들이 늘었다. 이에 중구에서는 2002년 이 골목을 삼치구이거리로 지정하며 30여 개의 식당이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노릇노릇 구워 낸 큼지막한 삼치구이에 막걸리 한잔 곁들이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이야기가 술술 쏟아져 나온다. 삼치 이외의 안주도 집집마다 워낙 다양해 값싸고 푸짐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동인천 삼치거리.
동인천 삼치거리.

‘동인천동 행정복지센터’를 나와 화평사거리 방향으로 철로 밑 굴다리를 지나면 왼쪽으로 ‘화평동 냉면거리’가 나온다. 인천의 대표적인 냉면은 평양식, 백령도식 그리고 화평동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세숫대야 냉면’ 등이 있다.

이곳 화평동 냉면거리는 1970년대에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1980년대 초반에 본격적인 냉면거리가 조성됐다. 1997년 동구에서 음식특화거리로 조성하며 주차장도 새로 만들며 전국적으로 방송도 많이 탄 곳이다.

이곳에 있는 가게들도 처음에는 일반 냉면과 같은 양으로 판매를 했는데, 주변 만석동 일대 노동자들이 주 고객이라 양이 차지 않아 냉면 사리를 더 달라는 요구가 계속되자 아예 냉면그릇을 크게 만들어 푸짐하게 담아줬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이 엄청 큰 냉면그릇을 보고 ‘세숫대야 냉면’이라고 부르게 됐다. 정말 큰 그릇에 푸짐한 양을 내준다. 30대 때 왜 그렇게 많이 가서 먹었는지. 달짝지근하며 그리 맵지 않은 양념장과 가격에 비해 배가 빵빵해질 정도로 푸짐한 양의 냉면을 내줬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입맛이 변한다고 하는데 어느 날부턴가 육고기를 좋아하는 식성에서 해산물로 변하더니, 냉면도 함흥냉면이나 비빔냉면에서 점점 깔끔하고 심심한 맛이 더 당기기 시작했다.

요즘은 주로 평양냉면이나 백령도냉면 중 물냉면을 먹으러 가는데 가끔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며 화평동 세숫대야 냉면도 먹으러 가봐야 하겠다. 이번에 사위와 둘이서 화평동 냉면을 먹으러 갔다 왔는데 주차장도 잘 조성돼있어 다음에는 가족들과 점심 나들이로 와야겠다.

화평동 냉면거리.
화평동 냉면거리.
화평동 물냉면과 비빔냉면, 감자찐만두.
화평동 물냉면과 비빔냉면, 감자찐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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