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조계지 일대 탐방(13)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연오정’과 철거된 ‘자유의 여신상’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을 나와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 방향으로 난 길 야트막한 둔덕을 넘어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정자가 보인다. 정자 현판의 ‘연오정(然吾亭)’이라는 글씨는 인천이 낳은 당대 최고의 서예가이며 추사 이후 한국 근대 서예를 대표하는 검여 유희강 선생이 1960년 8월 15일 광복절에 쓴 글씨이다.

연오정.
연오정.
고 김정렬 인천시장이 쓴 편액.
고 김정렬 인천시장이 쓴 편액.

연오정은 육각형 지붕에 기와를 올렸으며 겹처마 형식을 띠고 있다. 인천의 초대 직선제 민선 시장이던 김정렬(金正烈), 그가 쓴 내부에 걸린 편액을 보면 연오정을 지은 유래가 적혀있다. 연오(然吾)는 조용묵(曺容黙)의 아호로 다른 이름으로 조훈(曺勳)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1893년 계사년에 강화도에서 태어났으며 항일투쟁을 한 애국지사라 적혀있다. 그리고 인술(仁術)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는 노년을 인천에서 보내며 아침저녁으로 자유공원을 산책했다고 한다. 1959년 그가 임종하자 평소 그의 유지를 받들고 추모하기 위해 한의사였던 아들 조길 형제가 1960년 8월 22일 정자를 건립했다. 건립 당시 주변에는 특별한 건축물도 없었고 나무들도 크게 자란 것이 없어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멋진 장소였다.

그러나 60여 년이 지난 현재 나무들에 사방이 가로막혀 바다가 조망되지 않아 정자를 세울 당시의 풍광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이곳에 왜 정자를 세웠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겠지만, 항상 그늘을 드리우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자유공원에 놀러온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다만 인터넷에서 연오정을 검색하면 함경남도 단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훈(趙勳, 1886~1938) 선생을 기려 건립했다는 글들이 있는데 이는 동명이인에서 오는 착각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조금 길 위쪽으로 예전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었다. 1976년 인천 중앙라이온스클럽과 일본 도쿄(東京) 서신정라이온스클럽의 자매결연을 기념하기 위해 뉴욕 자유의 여신상을 모방해 세운 것인데 하얗게 칠을 한 조악한 동상이었다.

결국 부끄러운 역사의 상징물을 철거하자는 시민들의 여론이 비등해지고, 각종 시위나 집회 때 대학생들이 오물이나 페인트를 던져 훼손되자 1997년 중구가 철거했다. 사람들은 이 동상을 일컬어 ‘아이스크림 먹는 소녀’라 비아냥대기도 했다.

황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석정루’

석정루.
석정루.
석정루에서 바라본 인천항 내항과 월미도.
석정루에서 바라본 인천항 내항과 월미도.

‘연오정’에서 일직선으로 쭉 뻗은 서쪽 마루턱에 2층으로 된 팔각정이 있다. 1966년 6월 23일 58평(약 191.74m²)의 너른 터에 자리를 잡고 준공식을 거행한 ‘석정루(石汀樓)’이다. 삼화조선(三和造船)을 경영해 큰돈을 벌었던 이후선(李厚善) 씨가 30여 년간 자유공원을 산책하며 건강을 지켜온 데 대한 보은으로 지어서 인천시에 기증했다고 한다.

자유공원에 올라본 사람치고 ‘맥아더 동상’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지 않은 사람이 없듯이 이곳 ‘석정루’에 오르지 않은 사람도 거의 없을 것 같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2층에 올라서면 자유공원에서 가장 폭넓고 멋지게 인천 앞바다의 풍광을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올라 추억 하나 정도는 만들고 간다.

지금은 고층아파트와 건물들이 너무 많이 들어서 산과 섬의 등성이만 희끗 보이지만 왼쪽으로 문학산, 청량산, 송도 석산으로부터 송도신도시, 그리고 하버파크호텔 왼쪽으로 아스라이 영흥도가 보이고 인천대교와 오른쪽 바로 앞에는 용유도와 월미도가, 그리고 영종도와 물치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물론 인천항 내항의 모습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어느 때에 오르던 사계절 모두 풍광이 아름답지만 내항까지 제대로 보고 싶으면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이나 초봄에 가야 거치는 것 없이 풍광을 즐길 수 있다.

이후선씨는 월미도에서 태어났기에 월미도가 바로 보이는 이곳에 누각의 위치를 정했고, 누각의 이름도 주변 사람들의 강권으로 자신의 아호를 따 ‘석정루(石汀樓)’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석정루’라 쓴 현판은 인천 강화 출신으로 1967년 신동아 4월호에 검여 유희강 선생과 함께 ‘대한민국 10대 서예가’로 선정된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 선생의 작품이다. 현판 반대쪽 바다를 향해서는 시인 최승렬(崔承烈) 선생이 지은 ‘기림’이라는 시가 현액(縣額, 그림이나 글자를 판에 새기거나 액자에 넣어 문 위나 벽에 달아 놓은 것)으로 걸려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기상 관측소인 ‘인천측후소’

인천관측소 사진엽서.
인천관측소 사진엽서.
1928년 만들어진 콘크리트 계단.
1928년 만들어진 콘크리트 계단.

‘석정루’를 나와 왼쪽으로 난 산책로인 숲길(벚꽃길)을 따라 공원을 돌면 ‘인천기상대’로 길이 연결된다.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야욕을 품은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1904년 2월 8일 여순항에 있던 러시아의 극동함대, 2월 9일에는 제물포항에 있던 러시아 전함 2척을 공격한다.

선전포고는 2월 10일 이뤄지며, 이렇게 일본이 발발한 러일전쟁은 1905년 가을까지 이어진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본은 군사적으로 전쟁에 필요한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기상정보가 절실히 필요했다.

이에 일본은 일본중앙기상대 안에 한국과 만주 등지에 임시관측소를 설치하게 하고 3월 7일부터 부산, 팔구포(八口浦), 인천, 용암포, 원산에 임시관측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만주지역으로까지 확대했다. 인천에는 1900년 현재의 중구청 뒷길 송학동 길가에 있던 수진여관에 처음 기상관측소를 개설했다고 전해지지만 그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 후 1904년 4월 현재의 위치에 관측소 건물을 신축하며 통감부관측소로 기상관측 업무를 시작했고, 1905년 1월에는 이곳 응봉산 북쪽 봉우리 정상 3만평(약 9만9174m²) 부지에 69평(약 228m²) 규모의 목조 2층 건물인 ‘인천관측소’가 들어섰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근대과학을 기초로 한 기상관측의 출발이라고 한다.

물론 근대적인 기상관측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해관 총세무사 묄렌도르프는 1883년 6월 16일 인천에 우리나라 개항장 최초로 ‘인천해관(현재 인천세관)’을 창설하고, 개항장인 인천, 원산, 부산의 해관에서 선박의 안전운항을 위해 기상관측을 하게 지시했다.

1883년 9월 1일 인천을 필두로 원산에선 10월 1일, 부산에선 1884년 1월 1일부터 해양 기상관측 자료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이고 체계적인 기상관측을 시작한 것은 ‘인천측후소’로 평가한다.

1923년에 지어졌다는 창고건물(2007년 촬영).
1923년에 지어졌다는 창고건물(2007년 촬영).

1907년 3월 통감부관측소 관제를 제정하며 인천임시관측소는 통감부관측소로, 다른 관측소는 그 지소로 편입됐다. 그래서 인천은 ‘인천측후소’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이외의 지역은 ‘지소’라고 불렸다. 당시 통감부관측소인 ‘인천측후소’는 국내 지역 13곳의 측후소는 물론 만주, 대련, 천진, 청도, 제남측후소까지 통괄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인천측후소’는 조선총독부 산하 기구가 됐으며, 이후 국내에 세워진 간이기상관측소 또는 우량관측소 약 300곳의 기상관측사업도 모두 ‘인천측후소’가 총괄했다.

1912년에는 조선총독부관측소로 확대 개편되면서 지금의 중앙기상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며, 주로 기상에 관한 기록, 정보 분석, 자료 수립 외에도 우리나라 주변 해역, 동북해, 태평양, 일본 주변 해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해역에 대한 해양관측도 실시했다.

또한 일본의 중앙기상대와 런던의 그리니치천문대와도 기상정보를 주고받았으며, 1910년 4월에는 이 관측소에서 헬리 혜성을 관측하기도 했다고 한다. 1915년부터는 월미도에 기상 신호를 게양하기도 했다. 그리고 1923년에는 빨간 벽돌로 된 창고를 지었는데 이 건물만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다. 1939년 7월에는 조선중앙기상대로 명칭이 바뀌고 이때부터 일반을 상대로 기상관측 일기예보를 시작했다고 한다.

광복 후 1945년에는 국립중앙관상대로 이름을 변경하며 계속해서 우리나라 기상 관측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나, 1948년 국립중앙관상대 조직을 서울로 이전한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때 포격으로 중요 건물과 기상 관측 시설 및 문헌들이 소실돼 기상 업무를 수행하기 어려워지자 1953년에는 중앙기상대의 업무마저 서울로 이전했다. 이후 인천은 지역 측후소로 그 기능이 축소됐다가 1992년 다시 ‘인천기상대’로 명칭이 바뀐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3년 철거된 인천기상대 건물.
2013년 철거된 인천기상대 건물.
인천관측소 사진엽서.
인천기상대 2층에 올라가 찍은 기상관측 장비들(2007년 촬영).
인천기상대 잔디밭에 있던 석재들(2007년 촬영).
인천기상대 잔디밭에 있던 석재들(2007년 촬영).

안타까운 것은 2013년 신청사를 건립하며 2층이 원통형 모양으로 건축된 ‘인천기상대’ 청사 건물이 정확한 관측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철거된 사실이다. 천문대를 설치했다는 내용과 1910년에 헬리 혜성을 관측했다는 기록, 1930년대에 찍은 사진에 있는 건물 등을 살펴볼 때 철거된 청사 건물이 천문대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상대 측에서는 1960년대와 1980년대 증·개축을 했기에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고 하며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그냥 철거했다. 다행히 2007년에 ‘인천기상대’에 들어가 찍은 청사와 창고, 석재들 사진이 있어 올려본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들은 그대로 남겨야 하는 것 아닌지. 인천 사람들에게는 추억의 한 장면이었을 원통형 건물이 하루아침에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이 황당한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누군가 참으로 편하게 일을 한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정말 이 건물이 관측에 방해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관리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인천관측소 사진엽서.
2013년 새로 준공된 인천기상대 건물.
새롭게 조성된 현재 기상관측 장비들.
새롭게 조성된 현재 기상관측 장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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