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개항장 기행] 각국조계지 일대 탐방(9)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제물포구락부(濟物浦俱樂部)’의 설립과 이전

지금은 생소한 말이 된 구락부(俱樂部), 1970년대까지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많이 등장했던 말이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잘 모르고 중장년층에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구락부는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다. 일본어로는 ‘クラブ(쿠라부)’라고 하며, 이를 한자로 ‘俱樂部(구락부)’라고 적는다. 이는 영어 ‘club(클럽)’을 일본어로 음역한 단어이다.

결국 구락부는 취미나 친목, 오락 따위의 공통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조직한 모임이나 단체를 의미하는 말로, 젊은 사람들은 클럽이라는 외래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우리말로는 동호회(同好會) 또는 동아리 정도가 어울리는 말일 것 같다. 그렇다고 일제 잔재 용어라고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까닭은 ‘제물포구락부’가 이미 고유명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제물포구락부.
제물포구락부.

인천의 조선신보사 기자 아오야마 고헤이가 개항 초기 인천의 모습에 대하여 기록한 ‘인천사정(仁川事情, 1892)’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인천의 일본, 청나라, 서양 각국 사람들이 서로 의논하여 지난 메이지 24년(1891) 8월에 구락부 하나를 열고 제물구락부라 불렀다. 구락부는 인천항의 산수(山手, 산에 가까운 쪽)에 있는데 인천소학교 옆에 서양풍으로 색칠한 건물이다. 이곳에는 문화적인 오락기구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 인천 신사들의 유일한 오락장소로 손색이 없다. 회원은 서양인 6명, 중국인 4명, 일본인이 24명이다.”

이 기록을 볼 때 개항장 외국인들 최초의 사교모임인 ‘제물포구락부’는 1891년(고종 28) 8월에 만들어졌으며, 설립 당시 회원을 보면 일본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구에서 시지정문화재를 설명한 내용을 보면 중구 관동 1가 목조 단층건물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개항기 인천항 지도를 보면 일본영사관(현재 중구청) 오른쪽으로 산수전(山手田)이 표기돼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인천소학교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물포구락부 초창기 모습. 건물 정면 가운데 계단을 올라 정문이 있었다.(제물포구락부, 대불호텔전시관 제공)
제물포구락부 초창기 모습. 건물 정면 가운데 계단을 올라 정문이 있었다.(제물포구락부, 대불호텔전시관 제공)

인천이 개항되고 개항장이 급속도로 팽창했지만 1900년대 개항장 인구 1만 7천여 명 중 서구인들은 75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대부분 영사관 직원이나 세관 직원, 통역, 선교사, 의사, 상인 등 유력인사들이었으며, 각국조계 땅 14만평(약 46만2810㎡)은 모두 이들이 임차하고 있었다. 이에 1901년 6월에 지금의 위치에 건물을 따로 짓고 이전한다.

‘제물포구락부’는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 사바틴이 설계했는데 2층으로 된 벽돌조 건물로 지붕형태는 중앙은 급경사, 처마는 완경사이고 양철재로 구성했다. 그러나 건물을 도색해 벽돌조 건물인지 눈으로 식별할 수는 없다. 내부에 바와 테이블 등을 갖춘 사교실, 도서실, 당구대, 식당 등이 있었으며 실외에는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

‘제물포구락부’의 다양한 용도 변경

인천시립박물관 사용 시 제물포구락부.(인천역사자료관)
인천시립박물관 사용 시 제물포구락부.(인천역사자료관)
제물포구락부 현재 정문 모습.
제물포구락부 현재 정문 모습.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7호인 ‘(구)제물포구락부’는 현재까지 계속해서 건물 용도가 바뀌다 보니 건물의 내부와 외부 구조 역시 용도에 따라 바뀌었다. 건물이 지어진 초기에는 건물 정면 중앙에 정문이 있어 두 단의 계단참을 올라 정문으로 드나들게 했다. 정문의 계단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1950년대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될 때 사진을 보면 건물의 오른쪽으로 정문을 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건물의 왼쪽, 자유공원 광장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쯤에 정문을 만들었다. 이렇게 ‘제물포구락부’의 정문 하나도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바뀌었는데 내부 구조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이제 제물포구락부의 용도가 세월이 흐르며 어떻게 바뀌게 됐는지 알아보자.

1910년 8월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제령 제2호로써 ‘인천 제물포, 진남포, 목포, 군산, 마산포 및 성진의 각국 거류지와 인천, 부산 및 원산의 청나라 거류지의 행정은 경찰에 관한 사항 이외에는 당분간 종전의 예에 따른다’고 공표해 경찰권을 제한하고, 1914년 4월에 조선총독부는 새로운 지방행정제도의 실시와 함께 기존의 모든 조계를 모두 철폐했다.

인천의 조계들 또한 이때 사라지게 됐다. 이에 1910년 이후 많은 외국인들이 인천을 떠났다.

결국 제물포구락부는 1913년경 일본제국 재향군인회 인천연합회에 이관돼 사무실로 사용됐다. 이때는 ‘정방각(精芳閣)’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1934년부터는 일본부인회,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미군 장교클럽, 1947년부터는 대한부인회 인천지회,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는 대대본부 등으로 사용했다.

1952년 5월 지방자치법 실시로 새로이 선출 구성된 인천시의회가 의사당 없이 지내던 차에 1952년 7월부터 잠정적으로 이곳을 사용키로 했다.

동년 9월 12일 역시 신설된 인천시 교육청사로 일부 공용해서 사용하던 중, 1953년 2월 시의회, 3월 인천시 교육청이 인천시청 내 건물로 옮겨간 후 1953년 4월 1일 인천시립박물관을 개관했다. 이후 1990년에 인천시립박물관이 청량산 밑에 있는 옥련동으로 신축 이전한 후 인천문화원과 중구문화원으로 사용됐다.

중구문화원 사용 당시 제물포구락부. 건물 오른쪽에 새로 사무실이 지어져 있었다.(2007)
중구문화원 사용 당시 제물포구락부. 건물 오른쪽에 새로 사무실이 지어져 있었다.(2007)
제물포구락부 내부 모습.
제물포구락부 내부 모습.
새로 공개된 1층 석벽 공간.
새로 공개된 1층 석벽 공간.

‘제물포구락부’ 내부가 현재의 모습과 유사하게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2007년 6월에 리모델링을 거쳐 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다시 열었을 때부터이다. 그러다 2019년 12월 인천시의 문화재활용정책 제1호 사업으로 추진돼 2020년부터 ‘제물포구락부’는 옛 모습을 재현했다고 하지만 과거의 내부모습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중국의 상하이구락부를 참조해 만들어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예전부터 독특한 양관 건물로 이국적인 정취와 주변 자연 경관도 잘 어우러져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인기 드라마로 SBS ‘피아노(2001~2002)’, MBC ‘가화만사성(2016)’, tvN ‘도깨비(2016~2017)’등이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그리고 2020년 8월 16일부터 그동안 창고로 사용돼 공개하지 않았던 1층의 석벽 공간을 전시장과 음악감상실로 꾸며 일반에 공개했다.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전시실로만 사용되고 있으나 곧 공연, 강좌 등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란다.

이렇게 좋은 석벽구조의 공간이 감춰져 있는 줄 몰랐었는데, 전시장 등으로 공개하고 있으니 전시회도 구경하고 공개된 석벽의 포근한 정취도 느낄 수 있다면 일석이조일 것 같다. 이왕이면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즐거움을 누려보시기를.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유공원 플라타너스’

자유공원 플라타너스.
자유공원 플라타너스.

제물포구락부에서 남부교육지원청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다 공원 정면을 바라보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게 가지를 옆으로 펼친 나무가 한 그루 보인다. ‘자유공원 플라타너스.’ 잎이 크고 그늘이 넉넉해 예전에는 도심지의 가로수나 교정에 많이 심어졌다. 성장 속도가 빠를 뿐만 아니라 대기오염에도 강하고 대기오염물질을 많이 흡수하는 장점 때문에 가로수로 적격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어린잎에서 날리는 털이 알레르기를 일으키거나 간판을 가린다고 가지가 잘려나가더니, 뿌리가 주변 시멘트나 아스팔트, 보도블록을 망가뜨리는 단점 등으로 얼마 전부터 거의 심지 않게 됐다. 특히, 뿌리가 약해 태풍에 잘 쓰러진다고 알려져 요즘은 다른 나무들로 교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도 뿌리가 마음대로 뻗어나갈 수 없는 도로에 심어졌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도심의 가로수로 무더운 여름 그늘을 제공하던 플라타너스도 이제는 그늘막이 대신하고 있다.

이곳 플라타너스는 1884년 각국조계가 조성될 때 심어진 것이라 한다. 이곳 외에도 그 당시 존스턴 별장과 세창양행 사택, 러시아영사관 등에 정원수로 심어졌으며, 각국공원(현재 자유공원)에도 많이 심은 것으로 보아 조경목적으로 식재했음을 알 수 있다.

원산지가 북아메리카인 플라타너스는 개항 후 미국이나 영국에서 제물포항(인천항)을 통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자료가 없어 정확히 어떤 경로로 들어와 심어졌는지 알 수 없다.

이곳에 137년 동안 자리를 잡아 우람하게 자신을 키운 플라타너스,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쳐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사건과 사람들의 생활을 지켜본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이다. 갑자기 교과서에도 실려 학교에 다닐 때 한 번은 읊조렸을 김현승의 ‘플라타너스’ 시구가 생각난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 플라타너스 /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자유공원 플라타너스 근경.
자유공원 플라타너스 근경.

이곳 그늘에 앉아 있으면 그동안 플라타너스를 스쳐지나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나눴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소곤소곤 들려줄 것도 같다. 아니, 어쩌면 살아가면서 겪었던 플라타너스와 관련된 자신만의 추억 하나 정도는 떠오르지 않을까.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교사 앞에도 큰 플라타너스 두 그루와 그 밑에 긴 의자가 있었다. 고3 때 분위기가 좋은 이곳에 앉아 친구와 인생에 대해, 자유롭게 사는 것에 대해 밤늦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아마 자유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친구가 며칠 지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고 전화가 없던 시절이어서 연락마저 끊겼다.

‘혹시 의미 없이 던진 내 말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가슴앓이를 했다. 그러다 2년 뒤에 연락이 돼 만났더니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이미 결혼을 했단다.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뒀다고 하며 지금 삶이 행복하다고 한다. 죄책감이 순간 사라진 날이었다.

나무 아래 표지판을 보니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플라타너스나무로서 개항기 공원역사를 증언하는 역사적, 문학적 가치에 의미를 두어 2015년 6월 29일 보호수로 지정했다고 한다.

나무 높이는 30.5m, 가슴 높이 둘레가 4.7m로 어른 두 명이 양팔로 감싸지 못할 정도로 굵다. 거기다 맨 밑의 가지들은 양쪽으로 뻗은 길이가 어림잡아 20m가 훨씬 넘어 가까이에서는 사진 한 장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장대하다.

자유공원 플라타너스.
자유공원 플라타너스.

개항장에 있던 플라타너스들은 대부분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동상 건립,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건설 등으로 유실됐다고 한다. 그리고 4~5그루의 오래된 플라타너스가 더 있었지만 1987년에 바다 경관을 막는다는 이유로 잘려나갔다 한다.

다행히 이곳 플라타너스는 바다를 조망하는 위치와 관계가 없어 벌목의 위기를 넘겼으며 상처 하나 없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재 이곳 플라타너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나무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에 인천시는 자유공원 플라타너스를 올 하반기 시 등록문화재로 등록한 이후 천연기념물 신청 절차에 나서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자유공원에 가게 되면 반드시 들러 얼마나 큰 나무인지, 가지를 어디까지 벌렸는지 직접 확인하고 감탄 한 번 해보길 권한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