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개항장 기행] 청국조계지 차이나타운(5)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청국조계’의 어제와 오늘

인천거류지지도.(1898 新撰仁川事情, 신찬인천사정)
인천거류지지도.(1898 新撰仁川事情, 신찬인천사정)

조선 정부와 청나라는 1884년 4월에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을 체결한다. 이에 청국인만 거주할 수 있으며 치외법권지대인 청국전관조계(淸國專管租界)가 설치됐다.

청국조계는 선린동과 항동, 그리고 북성동 일부 약 5000평을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세관 부지 위의 경사가 급한 언덕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도로와 시가지 조성이 쉽지 않았다.

당시 청국조계에는 큰길을 여섯 개 만들었는데 지금도 그 길이 그대로 남아있다. 가로로 길게 세 개의 길과 이 길에서 세로로 갈라져 나온 길 세 개가 그것이다. 가로길 중 가장 위에 있는 길이 청국조계 뒷길을 의미하는 계후가(界後街)이다. 이 길은 화교중산학교 뒷문이 있는 길인데 지금은 길 양쪽에 ‘삼국지벽화거리’를 꾸몄다.

중국의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인 나관중의 ‘삼국지’ 정식 명칭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후한(後漢) 말에서부터 서진(西晉) 초까지의 역사를 토대로 지은 장편 소설이다. 이 중 명장면 80여 개를 타일벽화에 그려 설명을 해놨다.

계후가(界後街)에 있는 삼국지벽화거리.
계후가(界後街)에 있는 삼국지벽화거리.

비용 수억 원이 들어간 삼국지벽화와 가로등을 세울 때 예산 낭비라는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됐다. 관우상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도 있으니 기념으로 한 장 찍고 구경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가로길 중 가운데 길은 ‘중국인은 영원하라’는 의미를 지닌 영화가(永華街)이다. 당시에 이곳은 청국영사관과 화교소학교, 중화회관이 있던 곳으로 행정의 중심지였다. 가장 아랫길은 중국인들이 모여 산다는 의미로 췌화가(萃華街)라 불렸는데, 이곳은 가장 번화한 거리로 포목점, 잡화점, 이발소, 양복점들이 있었다.

서횡가(西橫街)는 짜장면박물관(공화춘) 뒷길로 북성동 행정복지센터로 이어진 길이고, 중횡가(中橫街)는 현재 차이나타운의 중심거리로 중국요리점 풍미와 대창반점이 마주 보고 있는 길이다. 그리고 동횡가(東橫街)는 일본조계와 경계가 되는 길로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을 올라서면 삼국지벽화거리가 있는 계후가(界後街)와 만난다.

‘청국영사관’

개항 당시 청국영사관.(인천광역시사)
개항 당시 청국영사관.(인천광역시사)

과거 행정 중심지였던 영화가(永華街) 언덕에는 ‘청국영사관’이 있었다. 청국영사관은 1884년 4월에 청국조계조약이 이뤄지고 그해 10월에 설치됐다. 초대 영사로 쟈원옌(賈文燕, 가문연)이 부임했는데, 영사관을 청국이사서, 청국이사부 혹은 청관이라고 불렀다.

청국영사관 안에는 약 466㎡(141평)의 본청 외에 전보국과 청국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순포청(경찰서) 등이 있었으며, 신포동에 분청을 뒀다.

이곳은 청일전쟁(1894~95)으로 일시 폐쇄됐다가, 1898년 다시 문을 열고 자국의 거류민을 보호하는 일을 했는데,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과 중국의 관계가 악화되고 영사관도 폐쇄됐다. 그 후 건물이 소실된 뒤 1934년에 화교학교가 들어섰다.

당시 청국영사관은 1층 건물이었는데, 밖은 벽돌로 담장을 쌓았다. 담장 중앙에는 돌계단을 만들어 건물로 들어가게 만들었고, 대문을 달지 않았지만 양쪽에 기둥과 사모지붕 형식의 주두를 올려 문을 표시했다.

건물이 소실된 후 이 주두 2개는 화교학교 입구 오른쪽 길에 박혀있었으나 현재는 어디다 보관했는지 보이지 않는다. 계단 위 중문으로 추정되는 출입구는 4개의 사각기둥 위에 아치 3개를 올렸다. 그런데 좌우 아치에는 쇠창살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출입은 중앙부만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인천화교소·중산중고등학교’

1955년 재건한 복흥당 건물(화교소학교).
1955년 재건한 복흥당 건물(화교소학교).

1902년에 개교한 ‘인천화교소학교’는 한국 최초의 화교학교로, 올해 개교 120주년을 맞이한다. 개교 당시에 특별히 건물을 지은 것이 아니기에 중화회관(현 화교협회) 동쪽 건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청국영사관이 언제 소실됐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934년 영사관 자리에 ‘인천화교소학교’ 건물을 신축해 1층은 교실, 2층은 강당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 1954년 1월 17일 춘절 연극 공연을 연습하고 화로의 불을 제대로 끄지 않아 많은 자료와 도서들이 건물과 함께 소실됐다. 1955년에 복흥당(復興堂)이란 이름으로 소학교 건물을 재건한다.

1957년에는 중등부를 설립해 ‘한국인천화교중산중학’이라 이름 지었다. 중산(中山)은 중국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쑨원(孫文, 손문)의 호로 중화민국을 세웠다.

1964년에는 고등부가, 2000년에는 유치원이 설립되고 2002년에는 인천시교육청으로부터 각종학교로 인가됐다. 예전에는 화교학교에 쉽게 들어갈 수 있게 개방됐는데, 요즘은 관광객들이 너무 많이 찾아 수업에 방해가 되므로 평상시에 문을 닫아 관광객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계단으로 된 정문을 올라서면 맞은편에 1978년에 재건된 중산중고등학교 건물이 보인다. 건물의 화단에 향나무들이 서있고 그 가운데에 청국영사관지 표지석이 있다.

1978년 재건된 중산중고등학교 건물.
1978년 재건된 중산중고등학교 건물.

오른쪽 철망에 쓴 글자가 눈길을 끈다. ‘愛國 愛人 愛己(애국 애인 애기)’, ‘나라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며 자신을 사랑하라’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학교 교육은 애국과 애족,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라는 피상적인 구호만 강조하는데 자신을 사랑해야만 남도 국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운동장은 시멘트로 바닥을 덮고 그 위에 초록색을 칠했으며, 하얀 페인트로 농구장 2면을 그려놓았다. 운동장 너머에 있는 건물이 1955년에 재건한 복흥당으로 화교소학교(초등)이다.

건물 상부에 ‘禮 義 廉 恥(예 의 염 치)’가 쓰여 있다. 예절과 의리와 청렴과 부끄러움을 알자는 말이 왜 이렇게 정겹게 들리는지.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기본 도리가 적힌 학교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날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다. 특히 부끄러움을 잃어가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학생들을 교육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복흥당 오른쪽으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이곳 계단과 축대 일부에 청국 영사관에서 나온 돌들이 사용됐다고 들었다. 이곳에는 영사관에 사용됐던 돌로 된 주두(柱枓, 기둥머리를 장식하며 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도록 짜인 기둥의 맨 윗부분)도 볼 수 있다. 계단을 다 내려가면 화교소학부속유치원의 놀이터가 나온다.

‘인천화교협회’와 ‘회의청’

인천화교협회 건물.
인천화교협회 건물.

인천화교협회 건물은 화교중산학교 정문 계단 바로 옆에 붙어있다. ‘인천화교협회’는 1887년 ‘중화회관’에서 시작한 한국 최초의 화교자치조직으로 ‘중화상무총회’, ‘중화총상회경’, ‘화상상회’, ‘중화상회’, ‘남한화교자치인천구청’, ‘화교자치회’ 등 수많은 이름을 거쳐 1960년 현재의 ‘인천화교협회’로 명칭을 바꿨다.

초창기에는 말 그대로 화교 상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자치 역할을 주로 맡아 인천화교와 관련된 모든 민사와 형사사건을 모두 협회에서 주관해 해결했다. 그러나 지금은 출생·사망신고를 비롯한 각종 민원을 처리하는 주민센터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인천문화재단에서 발행한 ‘114년의 기억, 한국인천화교중산중소학 1902-2015’에 중화회관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있다. 중산중학교에서 4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친 부극정 선생이 1962년 영사부 사비서와 나가윤 박사 부임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보면 중화회관은 석조주택이었다. 가운데 문은 양쪽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주두를 올렸으며, 그 위로 홍예를 올렸다. 언제 이 건물이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현재 화교협회 건물은 1978년 재건한 중산중고등학교 건물과 같은 형태인 것을 보아, 1970년대 중반 이후에 철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앞에는 옥돌로 만든 계단 난간이 있고, 그 아래 ‘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해내존지기 천애약비린)’이란 붉은색 글귀가 적혀있다. 당나라 시인인 왕발(王勃)이 지은 ‘送杜少府之任蜀州(송두소부지임촉주, 촉주로 부임해 가는 두소부를 보내며)’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라 안에 마음이 통하는 벗이 있으면, 하늘 끝에 있어도 가까운 이웃과 같다’라는 뜻이다. 나라를 떠나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의 심정을 절절하게 드러낸 구절인 것 같다.

청국영사관 부속건물이던 ‘회의청(會義廳)’.
청국영사관 부속건물이던 ‘회의청(會義廳)’.

인천화교협회 건물을 통과해 뒤로 나가면 청국영사관 부속건물이던 ‘회의청(會義廳)’이 있다. 청나라 초대 영사로 부임한 쟈원옌(價文然)이 1910년에 건립했는데, 목구조 건물로 흙벽 위에 회칠로 마감된 전면 벽체와 벽돌로 마감된 측벽과 개구부, 창호 형태는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회의청 건물 정면에는 쟈원옌이 건립 당시 직접 쓴 ‘萬國衣冠(만국의관, 세계 각국의 사신들)’과 1922년 ‘조선인중화총상회’가 설치한 ‘樂善好施(낙선호시, 선행을 즐기고 베풀기를 좋아하다)’ 현판 2개가 걸려있다.

회의청은 1970년대 이후로 40년 넘게 빈 건물로 방치됐으나 2018년에 복원 기념식을 개최했다. 올해 6월까지 화교 역사문화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며, 화교들의 이주 역사와 문화가 담긴 포토존, 축소 모형, 디지털 콘텐츠 등을 구축한 뒤 민간에 개방할 예정이다.

거의 140여 년에 걸쳐 인천에 뿌리를 내린 화교들의 역사와 문화를 ‘회의청’에서 만나볼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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