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조계지 일대 탐방(11)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 ‘세창양행 사택’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은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맞아 맥아더 동상 제막식을 하고 붙여진 이름이니 자유공원의 제일가는 상징물은 맥아더 동상일 것이다. 그러나 맥아더 동상이 있던 송학동 1가 1번지 일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세창양행 사택’이 있던 곳이다.

인천각국공원 사진엽서. 능선 위에 세창양행 사택이, 그 아래 제물포구락부가 보인다.
인천각국공원 사진엽서. 능선 위에 세창양행 사택이, 그 아래 제물포구락부가 보인다.
웃터골 운동장 전경. 능선 위에 세창양행 사택이 보인다.(1932, 인천시 제공)
웃터골 운동장 전경. 능선 위에 세창양행 사택이 보인다.(1932, 인천시 제공)

세창양행(世昌洋行)은 독일 함부르크가 본사인 ‘마이어 상사(E. Meyer & Co.)'의 제물포 지점으로 1884년에 설립된 무역회사이다. 마이어 상사는 조선에 진출하기 전 이미 1873년 중국 톈진(天津), 1881년 홍콩에 지점을 설치해 동아시아 무역에 진출했으며 런던, 한코우(漢口), 고베(神戶) 등에도 지점을 설립했다.

세창양행은 인천해관을 설치한 총책임자인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권유로 조선에 진출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을 근대화시키기 위해 차관도입, 농업개혁, 독일산 조폐기계 납품과 기술자 초빙, 정부의 독일 기선 도입, 광산개발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는데 그 대부분을 세창양행이 대행했다.

‘세창양행 사택’은 세창양행을 설립하기 위해 1883년에 독일 함부르크에서 인천으로 온 발터(Walter), 뤼일리스(Luhrs), 라우텐크란즈(Rautnkrnz) 등 세 사람의 숙소로 지어진 사원 주택이다.

이 주택은 1883년 후반기 혹은 1884년 전반기에 건축됐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건평 173평(약 572㎡)이 조금 넘는 건물 1동과 화장실과 부엌으로 구성된 7평(약 23㎡) 정도 규모의 부속 건물로 이뤄졌다. 중국 대목(大木, 큰 건축물을 잘 짓는 목수)의 손으로 건축했다고 하는데, 최성연의 <開港과 洋館歷程(개항과 양관역정)>에 세창양행 사택의 구성약도가 자세히 실려 있다.

사진으로만 본 건물이기에 건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할 수가 없어 신태범의 <仁川 한世紀(인천 한 세기)>에 나오는 글로 대체한다.

“세창양행 사택은 수목이 우거진 동편 언덕배기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던 건평 170평이 넘는 화사한 크림색 건물이었다. 동쪽 끝에 사각형 망루를 세우고 남향 전면에는 아치형 네모기둥으로 장식한 테라스가 있어 단층 건물의 단조로운 선율, 그리고 빨간 서양기와가 건물의 담백한 색조를 깨고 미적 효과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세창양행 사택 모형(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세창양행 사택 모형(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인천 최초의 공공도서관 ‘인천부립 도서관’

1914년 4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모든 조계가 철폐되자 세창양행 사택에 거주하고 있던 파울 슈르바움은 1916년 이 집에서 추방된다. 이후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자 세창양행 사택은 적산가옥으로 분류돼 경매에 붙여진다.

인천부청이 1921년 11월에 매입해 ‘청광각(淸光閣)’으로 이름을 붙이고 1922년 1월 6일 ‘인천부립 도서관’을 설치한다. 이때 2층 전망대는 안전을 위해 철거해 단층집이 됐다.

1922년 9월 중순에 개관할 당시 도서는 대략 300여 부였으며 시민들에게 개방해 도서 대출과 열람이 가능했다. 1930년에 장서는 5351권이었고 등록자는 2만5349명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장서가 늘어나고 열람자도 급증하자 결국 1941년 신흥동 옛 인천지방법원 청사 자리로 이전했다. ‘인천부립 도서관’은 부산·대구·서울에 이어 국내 네 번째로, 인천에서는 처음으로 개관한 공공도서관이다.

청광각도서관이라 이름이 붙은 세창양행 사택 사진엽서.
청광각도서관이라 이름이 붙은 세창양행 사택 사진엽서.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 ‘인천박물관’

도서관을 이전하자 인천부는 이곳에 ‘향토관’을 건립하고 선사유적과 개화기 생산품 유물, 제물포해전 때 자폭한 러시아 군함 바리야크호에서 인양한 깃발과 일부 유물 등을 전시했다. 광복 후 1945년 10월 31일 임홍재(任鴻宰)민선 인천부윤(인천시장)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한 당시 27세인 이경성을 시장실로 불러 초대 인천박물관장으로 임명한다.

그는 박물관장이 됐지만 1946년 4월 1일을 개관일로 정했기에 건물을 보수하는 동시에 전시할 유물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향토관에 전시됐던 유물을 기본으로 해서 국립박물관에서 문화재급 유물 19점, 민속박물관에서 민속품 60점 등을 임대했다.

더불어 박물관 건립을 적극 도와준 훔펠 중위의 후원으로 일본인들이 세관창고에 맡긴 다수의 유물을 문화재 반출 금지를 내세워 거둬들였다.

이외에도 서울 공덕동에 살고 있던 골동품상 장석구 씨에게 도자기 19점과 현금 등을 지원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부평의 일본조병창에 일본인들이 무기를 만들기 위해 중국과 전국 사찰에서 끌어다 모은 각종 불상과 종들 가운데 눈에 띄는 것들을 미군 트럭을 빌려 박물관으로 가져왔다.

이렇게 해서 모은 전시물 364점으로 어느 정도 박물관의 규모를 갖추게 됐다. 이런 노력으로 ‘인천박물관’은 예정대로 4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으로 정식 개관한다.

인천 공립박물관 당시 부평 일본조병창에서 가져온 송대 철제범종(출처 최성연 개항과 양관역정).
인천 공립박물관 당시 부평 일본조병창에서 가져온 송대 철제범종(출처 최성연 개항과 양관역정).

1947년에는 ‘인천박물관’의 이름으로 ‘경주고적조사단’을 구성해 현지조사를 마치고 사진 등을 곁들여 ‘경주고적조사보고전’을 열기도 했다. 1949년에는 인천 내 역사 문화유산을 문학산·청량산·선미도·주안·석남동·계양산·서곶으로 나눠 고적조사를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사한 내용을 ‘인천고적조사보고’에 실었다.

이후 ‘인천박물관’은 한국전쟁으로 1950년 6월 27일부터 무기한 휴관을 했다. 그때 관장과 관원들이 북한군들의 눈을 피해 많은 유물을 포장해 방공호로 옮겨 숨겼으며, 1·4후퇴 땐 주요 유물을 기차 편으로 부산에 가져가 국립박물관 임시 사무실에 보관했다.

이에 300여 점의 유물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사격으로 건물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때 계양산성에 있다가 ‘인천박물관’으로 옮겨놨던 중심성사적비가 파괴됐으며, ‘세창양행 사택’의 남은 석재들이 인천제일교회 뒤쪽 언덕에 무더기로 쌓여있었는데 헐값에 팔려 사라졌다는 것이다.

결국 ‘인천박물관’은 한국전쟁 당시 2년 10개월 동안 휴관 후 개관 7주년이 되는 1953년 4월 1일 제물포구락부로 이전해 복관했다. 이후 1990년 5월 4일 박물관이 협소하고 노후한 관계로 청량산 자락 옥련동에 새로 건물을 짓고 이전해 개관했다. 그리고 1995년 1월 1일 ‘인천광역시립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맥아더동상’을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으로

과거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앞(M경기도멀티미디어, 1969.07).
과거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앞(M경기도멀티미디어, 1969.07).

‘맥아더동상’은 1957년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례국무회의에서 국민성금을 모아 동상을 건립하라는 이승만의 지시로 내무부가 주관하고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세웠다.

‘맥아더동상’의 건립 장소는 원래 인천상륙작전 장소였던 월미도였으나 당시 월미도가 미군의 중요한 군사기지로 사용되고 있어 만국공원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이후 공원의 이름도 ‘자유공원’이라 바꿨다.

‘맥아더동상’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친일 조각가 김경승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제자들을 시켜서 만들었다는 증언도 있다. 김경승의 대표작으로 통영 남망산 공원과 부산 용두산 공원의 ‘이순신장군동상’, 남산의 ‘안중근의사상’과 ‘김구선생상’, 덕수궁에 있다가 홍릉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야외 뜰로 옮긴 ‘세종대왕상’, 수유동의 국립4·19민주묘지에 새워진 ‘4월혁명기념탑’ 등이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위인과 애국지사의 동상이 친일파 조각가의 손에 의해 빚어졌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의 아이러니일 것 같다. 그는 동상 제작의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지배를 미화하고 침략전쟁을 독려한 대표적인 친일 예술가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을 철거해야 한다는 논란이 각 지역에서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다.

1995년 지방자치 단체장을 선거로 뽑는 민선 지방자치시대가 개막되기 전까지 인천의 대표적인 공원은 ‘자유공원’이었다. 그래서 인천 사람치고 맥아더 동상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지 않은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결혼식 야외촬영, 소풍, 가족 나들이,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 등으로 유명했기에 아무 생각 없이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하지만 2002년 6월 13일 미군 장갑차에 의해 여중생 두 명이 압사 사고를 당하자 반미감정이 고조되며 시민단체들이 ‘맥아더동상’ 주변에서 철거와 이전을 주장하며 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이에 동상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 병력을 자유공원에 상주시키자 국내의 보수단체와 진보단체들의 이목이 모아지고 본격적인 보혁 갈등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현재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앞.
현재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앞.

결국 2005년 7월 17일 제헌절에 인천 시민단체들이 자유공원에서 동상 철거를 주장하자 동상을 수호하자는 단체와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며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그리고 9월 11일 자유공원에서 진보단체 회원 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미군강점 60년 청산 주한미군철수 국민대회'가 열렸다.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이 맥아더 동상 철거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격렬한 충돌이 벌어져 국내의 큰 이슈가 됐다.

이때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에서 맥아더동상 철거와 관련 향토사를 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전화가 왔었다. 대규모로 집회를 여는 것이기에 피난민이 많은 인천에서 철거를 강하게 밀어붙이면 당연히 반대급부로 강력한 반발이 있을 것이고, 그 결과 이념의 충돌로 철거가 더 어려울 수 있으니 인천상륙작전기념관으로 이전하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철거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물리적 충돌까지 일어나자 전투경찰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으며, 동상을 수호하고자 하는 단체가 자율순찰대를 구성해 각목을 들고 돌아다니며 동상을 지켜 위화감을 조성하기도 했다. 또 동상 앞에 하얀색을 칠한 철제구조물을 설치하고 화려한 화단으로 치장하며 의도적으로 길을 좁혀 다수의 군중이 모이기 힘들게 만들었다.

2018년에는 ‘평화협정운동본부’라는 단체에서 2차례에 걸쳐 ‘맥아더동상’에서 화형식 퍼포먼스를 벌이고 동상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아직도 산발적이지만 ‘맥아더동상’을 철거하자는 집회와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으며, 올해 9월에는 많은 단체들이 연합해 동상 이전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지속적인 운동으로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맥아더동상’의 수난이 지속될 것으로 예견된다.

전투경찰이 지키고 있는 맥아더동상. 동상이 황동빛인 것은 2006년 세척을 한 까닭이다.(2007년 촬영)
전투경찰이 지키고 있는 맥아더동상. 동상이 황동빛인 것은 2006년 세척을 한 까닭이다.(2007년 촬영)

1990년부터 향토사를 공부하며 당시에 ‘인천향토교육연구회’ 회원들과 자유공원의 ‘맥아더동상’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 인천 내항은 우리나라의 독보적인 국제항으로 화물의 교역만이 아니라 그만큼 수많은 외국인들이 들락거리는데, 그들이 자유공원에 올라와서 마주하는 외국인(맥아더) 동상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언제까지 인천을 상징하는 동상으로 이곳에 자리매김을 해야 하는지.

많은 논의 끝에 미추홀을 건국한 비류나 ‘인천감리서’와 ‘인천분감’에서 감옥살이를 했던 김구 선생님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 1997년 10월 ‘백범 김구 선생 동상건립 인천시민추진위원회’가 주축이 돼 모금한 시민성금 7억 원으로 김구 선생 동상이 제작됐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그 동상은 인천대공원의 축구 경기장 앞에 세워졌다.

이제 이념의 대립과 증오는 멈춰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사격으로 사라진 ‘인천박물관(세창양행 사택)’, 마당에 전시됐던 이양선(異樣船, 조선 후기에 등장한 서양의 배)을 막고자 주민의 마음을 모아 세워진 ‘중심성 사적비’마저 폭격으로 산산이 부서졌는데, 그 자리에 폭격의 주체를 기리는 동상이 선다는 것 자체가 희극은 아닌지.

더군다나 친일파 조각가 김경승의 ‘맥아더동상’은 더 이상 인천을 상징하는 인물일 수는 없을 것이다.

1984년에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청량산 자락인 연수구 옥련동에 거대한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을 지었다. 당연히 그 주인공인 ‘맥아더동상’은 이곳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이념 논쟁으로는 끌고 가 우리끼리 서로 증오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집이 지어졌음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풍찬노숙하며 갈등의 주체가 된 모습이 가엾지 않은 것인지.

뒷벽의 부조는 인천상륙작전 모습이 아니라 태평양전쟁 당시 필리핀 레이테섬 탈환 작전 모습임. 현재 철거 여부를 검토 중이다.
뒷벽의 부조는 인천상륙작전 모습이 아니라 태평양전쟁 당시 필리핀 레이테섬 탈환 작전 모습임. 현재 철거 여부를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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