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40)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한국의 방송은 1927년 2월 16일 첫 전파를 내보낸 경성방송국(JODK)을 시초로 보고 있다. 경성방송은 방송 주파수 690khz를 할당받아서 방송을 시작했다.

1924년 12월 17일 조선일보에서 무선전화 방송 공개 실험을 했는데, 이것을 한국 방송의 시초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경성방송국은 조선총독부에서 설립한 것으로 일제에 의한 방송이었기에 한국인에 의한 첫 방송이던 조선일보의 방송 실험을 한국 방송의 기원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인데, 일리 있는 주장이다.

1926년에는 민간단체에서 방송국을 설립하려고 창립준비위원회까지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총독부가 한국인에 의한 방송 설립을 허가하지 않았고, 총독부 산하에 방송국을 직접 설립한 것이 경성방송국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더욱이 조선일보의 방송을 한국의 최초 방송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경성방송국이 송출한 라디오 방송은 대중적으로 자리 잡는데 시간이 걸렸는데, 일반 서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비싼 비용 때문이었다. 당시 라디오 수신기의 가격은 만만치 않았고, 수신기를 구입하려면 체신국의 허가를 받고 등록을 해야 가능했으며, 라디오 청취료로 월 2원을 부담해야했다. 당시 쌀 10kg 가격이 3원 20전이었으니, 청취료 부담은 일반 서민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가격이었다.

더구나 초창기 라디오 수신기를 소유한 가구는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방송도 일본어 위주로 편성되었기에 한국인이 라디오 방송을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라디오 보급이 지체되자 경성방송국은 경영난을 겪게 됐고, 결국 청취료를 인하하고 한국어 방송을 따로 송출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했다.

라디오 수신기의 보급은 1929년에 가까스로 1만대를 달성했다. 1935년 9월 2일 부산방송국이 개국했고, 이후 평양, 함흥, 이리, 대구, 대전, 광주, 강릉, 마산 등지에 지방방송국이 개설됐다.

한국 최초 극장인 애관극장의 옛 모습.
한국 최초 극장인 애관극장의 옛 모습.

라디오 방송 초기에는 유명한 배우, 만담가, 가수, 문인 등 사회 명사들이 출연해 다양한 입담으로 청취자들에게 어필했고, 특히 음악 방송이 인기를 끌었다. 우리 고유의 가락인 판소리나 궁중 아악도 라디오 전파를 타고 인기를 얻었다. 정동에 위치했던 경성방송국에선 덕수궁의 왕궁아악부로 방송장비를 가지고 와서 아악 연주를 중계했다.

아나운서 두 명이 파견돼 아악 연주를 중계했는데, 경성방송국 소속 아나운서는 대부분 덕수궁에서 아악이 연주되던 건물인 일소당을 거쳐갔다고 한다. 당시에는 녹음 장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기에 생방송으로 진행됐고, 그런 방송 여건 상 음악 연주 실황 중계가 자주 편성돼 방송될 수 있었다. 우리 고유 가락이 방송에 중계될 수 있던 이유이기도 했다.

라디오 극이라고 불린 드라마도 방송했는데, 상록수의 작가인 심훈이 방송국 연출부에 있었고, 우리 정서가 반영된 라디오 극을 제작 방송했다. 당시 방송한 ‘춘향전’은 5회로 구성한 드라마로, 최초의 연속 방송극이다.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드라마를 연출하고 출연했던 사람들은 주로 ‘조선극우회’나 ‘극예술연구회’ 등의 연극 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

1933년 4월 26일부터 시작된 라디오 한국어 방송은 청취자 숫자를 크게 늘리는 데 기여했다. 1934년에 라디오 청취자가 3만명을 넘어섰고, 라디오 청취하는 한국인의 비율이 40%까지 증가했다.

1939년 4월 1일에 라디오 청취료를 1원에서 75전으로 인하했고, 이에 따라 라디오 청취자 숫자는 16만7000여명으로 늘었다. 1940년에 청취자 수는 20만명을 넘겼고, 1943년 라디오 수신기 숫자는 28만5000여대로 증가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1940년에 폐간된 이후 정보 전달 수단으로서 라디오의 중요성이 매우 높아졌고, 일제는 라디오 방송을 선전 수단으로 적극 사용했다.

라디오방송에 라디오 극이 시작하던 시기는 활동사진으로 불렸던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활동사진이 영화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은 1921년부터이고 이후 영화는 보편적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최초의 극영화는 ‘국경’으로, 1923년 1월 13일에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일본인이 제작한 ‘국경’은 한국인을 비하하는 내용으로 인해 상영 하루만에 종영했다.

따라서 한국 최초의 극영화는 1923년 4월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서’로 인정하고 있다. 월하의 맹서는 한국인이 감독한 영화지만, 조선총독부가 윤백남에게 제작을 맡긴 영화로 저축을 장려하는 내용의 계몽 선전 영화였다. 4월 8일에 총독부 관리와 일간 신문 기자들 등이 참석한 시사회를 열었고 이후 전국 각지에서 무료로 상영됐다.

1923년 12월에는 일본인이 감독한 영화 ‘춘향전’이 개봉했고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춘향전의 성공에 힘입어 극영화 제작이 활발해졌다. 1924년에는 ‘장화홍련전’이 개봉했다. 이 영화는 제작진과 출연진이 모두 한국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영화였다.

이후 일련의 영화들이 계속 제작됐고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은 11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는데,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관객 수를 기록했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무성영화 시대 한국 영화 최고의 문제작이었다.

아리랑 이전의 영화가 전설이나 문학작품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것에 비해 아리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름, 소작인, 일제 하수인, 지식인, 성희롱 희생자인 여성 등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런 등장인물들은 관객들이 동질성을 느끼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도록 했고, 이런 요인들로 인해 아리랑은 흥행에 크게 성공했고, 이전에 제작된 영화들과 차별화됐다.

아리랑의 성공으로 영화 제작은 더욱 활발해졌고, 1929년 총 영화 관객은 407만명을 기록했다. 이후 영화관은 국내 곳곳에 꾸준히 증가했고 1932년에는 국내에 영화상영관 79개가 있었다. 당시 상영했던 영화의 32.3%는 일본 영화였고, 한국 영화는 4.1%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할리우드 등 외국 영화였다.

1940년 이후에는 일제의 제국주의 선전 영화만이 제작됐고, 일제는 영화를 선전 수단으로 적극 이용했다. 내선일체와 전쟁 수행을 위해 필요한 내용의 선전 영화가 제작돼 주로 상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관객 수는 꾸준히 증가해 1942년에 영화 관람객은 2762만명에 달했다.

암울했던 일제 식민 치하에서 대중들은 탄압을 받고 있던 언론 이외에 영화 등 다양한 매체로 정보를 얻고 설움을 달랬다. 비록 라디오 극이나 영화가 일제의 프로파간다(선전) 수단으로 이용됐지만, 이들 매체를 통해 문화를 소비하는 대중의 숫자는 꾸준히 증가했고 대중문화도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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