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38)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영화는 여러 매체 중에서 영상을 기반으로 하는 매체로, 처음 등장한 이래 현재까지 주요한 매체로 기능하고 있다.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상영한 ‘기차의 도착’이 최초의 영화로 인정받고 있다. 이후 영화는 예술적 가치와 오락적 가치를 동시에 갖는 매체로 특히 대중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중요한 매체로 발전했다.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는 카메라와 같은 테크놀로지는 물론이고, 감독·배우·미술가·음악가 그리고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는 제작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관여하고 있다. 영화를 촬영하는 스튜디오도 필요하고 영화를 상영하는 물리적 장소인 영화관도 필요하다.

여러 산업이 관여하는 복합적인 매체가 영화이다. 영화는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고 있으며, 예술을 넘어서는 사회 문화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또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고 사회적 언어이다.

이렇듯 다양한 면모를 갖고 있는 영화가 처음 한국에서 상영된 시점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남아있는 기록으로 추정하면 1903년경에 영화가 상영됐다고 보인다.

한국 최초 극장인 애관극장의 옛 모습.
한국 최초 극장인 애관극장의 옛 모습.

1903년 6월 23일자의 <황성신문(皇城新聞)>에는 ‘동대문 내 전기회사가 기계창(器械廠)에서 시술(施術)하는 활동사진은 매일 하오 8시부터 10시까지 설행(設行)되는데 대한 및 구미 각국의 도시, 각종 극장의 절승(絶勝)한 광경이 구비하외다. 허입료금(許入料金:입장요금) 동화 10전(銅貨十錢)’이라는 광고가 실려 있다.

안종화의 <한국영화측면비사>는 영화가 영미연초회사에서 공개되기 전에 서울 정동에 있는 독일 여성이 경영하는 손탁호텔에서 상영된 적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기에, 영화가 일반에게 공개되기 훨씬 이전에 왕실이나 외교관들의 모임에서 상영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효인은 <한국영화역사 강의 1>에서 최초의 영화 상영에 관한 설로 1897년, 1903년, 1904년, 1905년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프랑스에서 최초의 영화가 상영된 것이 1895년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영화는 비교적 빠른 시간에 한국에 소개됐다고 볼 수 있다.

영화를 관람하는 장소인 영화관은 1906년 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가 동대문 안에 활동사진관람소를 만들어 미국영화를 상영한 것을 시초로 보고 있다. 한미전기회사는 영화 상영 수입이 목적이 아니라, 전차 승객을 늘리기 위하여 초기의 미국영화를 수입해 상영한 것이었다.

이후 상설 영화관으로 광무대(光武臺), 장안사(長安社), 단성사(團成社),연흥사(演興社) 등이 설립됐다.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관으로는 어성좌(御成座), 경성좌(京城座), 개성좌(開城座), 고등연예관(高等演藝館), 대정관(大正館), 황금연예관(黃金演藝館) 등이 있었다. 이 영화관들은 무성영화를 수입해 상영했고, 영화를 해설해주는 변사가 등장했다.

초창기 영화관에선 외국에서 수입한 영화를 상영했고, 영화관도 대부분 일본 자본으로 설립됐다. 따라서 한국 영화 산업은 시작부터 외국자본과 침략자의 자본에 의지하는 왜곡된 구조를 갖고 출발했다.

한국에서 제작된 최초의 영화는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김도산의 ‘의리적 구투’이다. 10월 27일은 영화의 날로 제정돼 있다. ‘의리적 구투’는 엄밀하게 말하면 지금과 같은 영화는 아니고 연극과 영화가 결합한 형태의 키노드라마(Kino-Drama)이다. 키노드라마는 연극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장면들을 무대 위 스크린에 투사해 연극의 배경으로 활용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으로 알려진 인천의 애관극장은 영화관으로 설립된 것이 아니라 공연장으로 설립됐다. 1895년 정치국(丁致國)이 인천 경동에 협률사(協律舍)를 설립한 것이 애관극장의 모태이다. 협률사는 청일전쟁 기간 중 건축한 단층 창고를 연극장으로 사용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공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애관극장 전경
애관극장 전경

인천 협률사는 1902년 서울 정동에서 개관한 협률사(協律社)보다 7년 앞섰고, 이인직(李人稙)이 종로 새문안교회터에 개설했던 원각사(圓覺寺)보다 13년 앞서서 개관했다. 문화도시로서의 인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당시 인천이 여러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도시였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협률사는 1912년에 이름을 ‘축항사(築港舍)’로 변경했다. 애관(愛館)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21년으로, 1927년 10월 10일에는 건물을 신축했다. 애관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한 것은 1924년부터로, 이후 인천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자리매김했고, 대부분의 영화관이 멀티플렉스 체인으로 탈바꿈한 현재까지 인천의 원도심을 지키며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초창기 영화관에서는 영화만 상영한 것은 아니었고, 공연이나 강연 또는 집회 장소로도 사용됐다. 공연장으로 출발한 애관극장은 영화 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 활동이 이루어졌던 문화 공간이었다. 따라서 인천의 문화 예술은 애관극장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경영난을 겪고 있는 애관극장을 인천시에서 매입해 보존하고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하니, 인천 문화의 상징적 존재인 애관극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고, 인천 시민들에게 문화도시를 상징하는 존재로 영원히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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