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25)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1888년 한성주보가 폐간되고 1896년 4월 독립신문이 창간되기 전까지 한반도에는 일본인이 발간한 일본어 신문만이 있었고, 그 중심에 인천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50명만 모여도 신문을 발행했다고 할 정도로 신문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1889년 말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165가구에 1360명이었으니 신문 발행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오가와 유조의 ‘신찬 인천사정’에는 신문이 여론을 대표하고 사회를 지도하고, 무서운 세력으로 세상 풍조까지 지배한다고 적고 있다. 신문 산업의 활성화 여부가 문화 수준을 나타내며 문명과 야만을 나타내는 표지임을 적시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의 상당수가 활동하고 있던 인천에서 일본인을 대상으로 신문이 발간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인천 최초의 신문인 인천경성격주상보는 1890년 1월 28일에 제물상보사(濟物商報社)가 창간했다. 일본인 사노세이지가 발행한 이 신문은, 제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천과 한성(서울)의 상업관련 소식을 전해주는 신문으로 격주로 발행했다.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대다수가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순수한 상업지를 표방했다.

인천경성격주상보의 발간사를 보면 “대저 상보 발행의 주된 뜻은 암흑 같은 조선 무역에 한 줄기 새로운 빛을 비추어주려는 것이다. 따라서 주로 인천과 경성의 상업 현황 및 무역을 보도하고, 나아가 조선의 국내 정세와 민정 등을 보도하여, 감히 신문의 본분을 다하고자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상업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표방하고 있다.

인천경성격주상보는 1년 반 동안 44호를 발행하고 1891년 8월 15일에 휴간했다. 휴간의 이유는 무역이 왕성해지고 교류가 활발해져서 상업신문의 성격을 유지하는 것이 적절치 않고 지면 확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서 1891년 9월 1일에 제호를 조선순보로 바꾸어 제1호를 발간했다. 상보가 격주 발행이었던 것에 비해 조선순보는 발행주기를 10일로 단축하여 월 3회 발행했다.

조선신보 3000호 특집호(1908. 11. 9.)
조선신보 3000호 특집호(1908. 11. 9.)

조선순보는 1892년 4월 5일에 제호를 조선신보로 바꾸고 재 창간했다. 조선신보는 인천경성격주상보와 조선순보의 발행 부수를 합산해 제63호로 시작했다. 이후 조선신보는 기존 10일의 발행 간격을 더욱 줄여 매주 토요일에 주간지로 발행했다.

조선신보는 청일전쟁 발발 가능성을 보도한 조선 최초의 호외를 발간한 신문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이후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정세가 혼란스럽게 되자 1894년 7월말 181호를 끝으로 휴간했다. ‘신찬 인천사정’은 조선신보가 동양에서 가장 많은 횟수를 발행하고 휴간에 들어간 신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청일전쟁 과정에서 인천은 전쟁특수를 누리며 인구가 증가하고 무역 등 여러 측면에서 크게 발전했다. 이에 따라서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인들 사이에서 신문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다. 더구나 일본 정부는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조선의 일본 신문에 보조금을 지급하며 적극 육성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4년 12월에는 인천에서 다니가키 등이 신조선사(新朝鮮社)를 설립해 ‘신조선’ 신문을 창간했다. 신조선은 격일로 발간했고 지면을 대폭 확장하는 등 의욕을 보였으나 과격하고 선정적인 성격으로 창간한지 9개월만인 1895년 9월 휴간했다. 신조선은 다시 발행되지 못했고, 휴간이 곧 폐간이 됐다.

조선신보와 신조선의 휴간으로 인천 신문의 공백이 생기자, 오사카아사히신문의 통신원이자 조선신보의 주주였던 아오야마 요시에(靑山好惠)는 1895년 10월 25일 조선신보를 재간했다. 아오야마는 또한 인천 소재 활판인쇄소인 인천활자소의 주주이기도 했다.

아오야마는 인천의 일본 신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었으나 1896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이후 무역상이었던 나카무라 타다요시(中村充吉)가 1897년 3월에 조선신보를 인수해 경영에 나섰다. 당시 조선신보는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매월 50원의 보조금을 수령했다.

나카무라가 인수한 조선신보는 1900년대에 들어서며 격일간에서 일간신문으로 전환했고 지면도 확장해 평일 6~8면을 발행했다. 당시 인천은 물론 국내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 중 하나로 발전했다.

1908년 4월 18일에는 휴간일 없이 연중무휴 발행을 시도했다. 당시 조선에서 유일하게 연중무휴로 발행하는 신문이라는 점을 내세웠으나, 11월 20일 3009호를 끝으로 폐간하게 된다.

조선신보가 폐간하게 된 것은 1905년 나카무라가 사망한 이후 내부 갈등을 빚은 것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폐간사에 보면 오랜 기간 내부 분규를 겪은 것을 폐간의 원인으로 짚고 있다.

조선신보가 인천에서 창간해 당시 조선에서 가장 유력한 신문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당시 인천이 조선에서 서울 못지않게 중요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요 무역항이라는 지리적 위치로 근대 문물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여 발전했다는 점과, 당시 일본 상인들의 주요 무대로 각종 정보가 모이는 도시라는 특성도 한몫을 했다.

또한 수도 서울의 지근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지정학적 위치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러니 이래저래 인천은 서울과 애증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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