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24)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독립신문은 순 한글로 발행됐고 관보의 성격이 강했던 한성순보나 한성주보와 달리 민간 발행 신문이기에 기사의 형식과 내용도 큰 차이가 있었다. 소소한 사건 사고를 다루는 기사도 많았고 국제 정세와 인사 동정과 같은 정보도 전달했다. 당시의 생활상이 잘 나타나 있는 기사들이 많은데, 인천과 관련된 기사를 보면 당시 인천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1896년 5월 7일자 독립신문 기사에는 인천 해관 주사 박은호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내용은 박은호가 작년 10월에 첩을 얻었는데, 여자가 이전 사내와 가진 아이를 동짓날에 출산하자, 밤중에 아이를 내다 버렸다는 기사이다.

아이를 발견한 사람이 부모를 찾아서 데려왔는데, 박은호가 다시 아이를 내다 버렸고, 주창호라는 사람이 버려진 아이를 발견해서 기르다 부모를 찾아주려 데려왔는데, 박은호가 해관 선창에 아이를 또다시 내다 버려서 영종 사람이 데리고 갔다는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박은호 같은 사람은 경무서가 잡아가서 법률로 다스려야 한다고 적고 있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아무리 자기 아이가 아닐지라도 갓난아이를 몇 번씩이나 내다 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것은 사회적 분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파렴치한 사람은 늘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더구나 공무원 신분인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 더욱 큰 문제가 될 사건이었을 터이고, 법률로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강력한 의견을 신문이 밝히고 있다. 이는 곧 독립신문이 사회 계몽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발행한 신문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도진도서관 자료실에 보과중인 독립신문.(인천투데이 자료사진)
화도진도서관 자료실에 보과중인 독립신문.(인천투데이 자료사진)

인천 관리들의 도덕성을 지적하는 기사 뿐 아니라 관리의 실명을 밝히고 비리를 고발하는 기사를 독립신문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당시 관리들의 부패가 신문 지상에 자주 오르내릴 정도로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물포 전환국장 이호성이 전환국 돈 삼천여원을 개인적으로 유용했다는 기사도 있고, 인천부 참사관 임오준이 비리를 저지른 사람에게 뇌물을 많이 받고 첩의 말만을 듣고 일을 처리한다는 민원을 여러 신문사에 제보했다는 기사도 있다.

관리들의 비리와 횡포가 잦다보니 이런 행태에 대항하여 정치 결사체를 도모하는 일이 인천에서 있었다는 기사도 독립신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물포 사람 곽일이 백성들에게 통문을 보내, 개화된 나라에서는 백성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관리들이 부당하게 일을 처리하면 백성들이 시비를 걸 권리가 있는데 조선에서는 그렇지 못하니, 백성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하고, 자유당을 결성하니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통문을 돌렸다는 기사이다.

그러자 감리서에서 곽일을 잡아들여 문초했고, 배후에 최진한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자백을 받고 최진한을 잡아들였다는 내용이다.

정부 관리를 비판하고 조선 사회의 제도적 문제를 제기하고 아예 이에 대항하는 정당을 결성하려는 시도가 인천에서 있었고, 독립신문은 이 사실을 상세하게 보도했는데, 독립신문이 미국적 가치를 반영해 일반 국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적극 옹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인천이 정치적 운동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기사이다.

당시 인천에서 발행하던 일본 신문인 조선신보에 대한 비판 기사도 찾아볼 수 있다. 1896년 5월 16일자에는 ‘제물포에서 발행하는 일본신문 조선신보에서 조선 정부 대신을 말하되 성은 아니 쓰고 이름만 쓰니 그것은 다만 그 대신에게만 실례가 아니라 조선 정부에 실례니 남의 나라에 와서 사는 외국 사람이 그 나라 정부를 대하여 실례하는 것은 개화한 사람의 일이 아닌 줄로 우리는 생각하노라’라는 기사가 실렸다.

일본 신문의 무례함을 준엄하게 꾸짖는 기사이다. 남의 나라에 와서 사는 외국인이 무례를 저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니고 미개한 것이라는 꾸짖음인데,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조선에서 외국인들 특히 일본인들의 세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일본인들이 조선 땅에서 일본어 신문을 발행한다는 사실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고 그런 감정이 독립신문의 기사에 묻어나오고 있다.

철도 개설이 가져올 영향에 관한 견해를 상세하게 밝히는 기사도 있다. 독립신문이 갖고 있던 사회 계몽 철학을 잘 반영하는 기사이다. 외국 신문을 인용해 조선이 개화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인천과 서울 간 철도 개설이 가져올 긍정적 영향에 대한 주장을 싣고 있다.

기사 내용을 보면 조선 정부가 미국인과 계약을 맺고 서울 인천 간 철도를 개설하는데, 철도 건설에 동원돼 돈을 벌 조선인들이 수천 명이 될 것이고, 철도 개설 후에는 농민과 상인들에게 큰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 주장한다.

또한, 철도가 백성들의 인식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개화라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으나 개화의 실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철도가 개설돼 기차가 다니는 것을 직접 보게 되면 사람들이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해 선진 기술과 지식을 배우려는 욕구가 생겨날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독립신문에서는 인천의 외국인 인구 구성에 대한 기사도 찾아볼 수 있는데, 당시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현황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1896년 말, 인천에는 일본인 3503명 이었고, 미국인 15명, 프랑스인 7명, 영국인 6명, 독일인 18명, 이태리인 2명, 그리고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스인이 각 1명씩 거주하고 있었다.

기사는 외국인들의 숫자뿐 아니라 남녀 구성 성비도 상세히 밝혔는데, 인천 거주 외국인의 성별은 당연히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당시 인천의 외국인은 일본인이 절대 다수였고, 다양한 국적의 서양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그 숫자는 미미했다. 흥미로운 것은 인천 거주 외국인에 중국인이 포함돼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당시 조성된 차이나타운이 아직도 건재할 정도로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외국인 통계에서 빠진 것은, 당시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를 시사하고 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한 것이 1897년 10월 12일이었고, 그 이전에는 대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곧 당시 청국은 서양이나 일본과 같은 외국과는 다른 개념을 가진 관계였고 이런 측면이 기사의 내용에도 반영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문의 행간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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