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17)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근대의 시발점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학계의 일반적 학설에 따르면, 1876년을 근대가 시작된 시점으로 잡고 있다. 1876년은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해이다.

19세기 조선은 매우 어지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 당시 지배계급이 썩을 대로 썩어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있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이후 농민 항쟁이 전국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지러운 시점에 서구 열강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1875년 발생한 일본 군함 운요호 사건으로 결국 조선은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1876년 2월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개항을 하고 서구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을 근대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강화도조약에 이어 1882년 5월에는 제물포 화도진에서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83년 11월에는 영국·독일과 조약을 맺었고, 이어서 이탈리아·러시아와는 1884년에, 프랑스에는 1886년에 문호를 개방했다. 다른 서방 국가들인 오스트리아·벨기에·덴마크 등의 국가와도 조약을 맺었다.

일본에 의해 개항이 됐지만 서구 국가들이 차례로 조선에 진출했고, 당시 조선에 큰 영향을 미치던 청나라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개항과 서구 국가들과의 수교를 권장했다.

개항을 하고 난 이후부터 1910년까지를 개화기로 보는데, 이 시기 조선에는 근대 문물이 전해지고 이에 따라 과거 조보와는 차별화되는 근대식 개념의 언론이 태동하게 된다. 근대적 개념의 최초 신문인 한성순보는 1883년 창간됐는데, 최초의 신문이 창간된 배경에는 개화기 시대의 정세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한국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출처 문화재청)
한국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출처 문화재청)

외세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했기에 개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지만 당시 조선에도 개방을 주장하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김옥균·박영효 등과 더불어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등이 개화파를 이루는 인물들이었고, 김옥균·박영효·유길준·서광범·김윤식 등 양반 청년들은 박규수의 집을 근거지로 삼아 드나들며 개화사상을 흡수했다.

이들 개화파는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로 나뉘었는데, 급진개화파는 서구의 기술과 더불어 그들의 제도나 사상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면 온건개화파는 우리 고유의 사상은 지키고 서구의 앞선 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입장이었다.

이들 개화파의 대척점에는 위정척사파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서구 문물이 들어오는 것에 반발한 일종의 유교적 근본주의 운동이었다. 척사파는 당시 서구 세력이 조선에 진출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호응을 얻고 있었다.

개화파와 척사파의 갈등은 당시 열강들의 각축장이던 조선에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이 권력에 복귀하였지만 곧 청나라의 개입으로 인해 축출됐고, 다시 민씨 일가가 정권을 장악했다. 그 결과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입김이 강해지고, 개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급진개화파였던 박영효는 1882년 8월에 임오군란의 뒷수습을 위해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는데, 이때 박영효는 일본의 개화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와 친분을 쌓게 된다. 박영효는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유키치 밑에 있던 편집 기술자와 인쇄공을 데리고 왔다.

유길준은 1881년 일본 도쿄에 있는 경응의숙에 입학해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는데, 그는 경응의숙 설립자인 유키치의 집에서 기숙하며 유키치가 1882년 창간한 시사신보를 만드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1882년 말에 귀국한 유길준은 박영효를 보좌해 한성순보 창간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1883년 10월 31일 마침내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가 창간된다. 당시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다양한 생각들이 한성순보의 지면에 반영돼있다.

한성순보는 순한문으로 작성하였고 16.4cm × 22.3cm 규격의 총 24면 신문의 형태로 발행했다. 한성순보는 이전 조정에서 발행하던 조보의 성격을 이어받은 관보였기에 지금과 같은 전문 기자가 기사를 작성한 것은 아니었다. 정부기관인 박문국 소속의 관리가 기사를 쓰고 관공서에 배포된 신문이었다.

한성순보가 순 한문으로 제작된 것도 이런 관보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관리들과 귀족들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신문이었기에 정보의 독점을 위해 이들이 한글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비록 순 한문을 사용했지만 기사의 내용은 과거 조보에서 다루지 않았던 시사성 있는 내용이나,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소개하는 등, 나름 근대적 신문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은 그렇게 탄생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