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26)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개항을 하고 각국조계가 설치된 인천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일본인들이 신문을 창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인천에서 창간하고 서울로 옮겨간 신문도 여럿 있었다. 1903년에는 상업지 성격의 인천상보가 창간해 발행하다가 1908년 서울로 옮겨가서 조선일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발행했다.

1904년 3월 10일에는 인천에서 조선어로 발행된 신문인 대한일보가 창간했다. 신문의 발행인 겸 편집인은 하기야 카츠오(萩谷추夫)였다. 대한일보는 조선신보사에서 발행한 것으로 돼 있는데, 일어로 발간하던 조선신보가 조선인 독자들을 타깃으로 발행한 조선어판 신문으로 추측된다.

대한일보는 짧은 기간 동안 인천에서 발행하다가 같은 해 12월에 서울로 이전해 서울에서 발행했고 인천과의 인연은 끊어졌다. 그러나 대한일보 설립자인 하기야 카츠오는 ‘조선타임즈’가 인천에서 창간되자 대한일보를 양도하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대한일보는 1910년 4월에는 제호를 조선일보로 바꿔 발행하다 일제의 언론 통합정책에 따라 한일합방 이후 경성일보에 흡수 통합됐다.

‘조선타임즈’는 조선신보가 문을 닫기 전인 1907년 5월, 일군의 기자들이 조선신보를 퇴사하고 창간한 신문이다. 조선신보의 폐간사에서 나타났듯이, 경영을 맡았던 나까무라의 사망이후 내부 갈등이 심했던 것이 이들 기자들이 퇴사하고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게 된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신보는 1908년 11월 20일 폐간하며 조선타임즈와 합병했고, 폐간 열흘 후 1908년 12월 1일 새롭게 조선신문이 창간됐다. 하기야 카츠오는 두 신문이 합병해 창간한 조선신문의 발행인 겸 사장으로 취임했다.

조선신보 3000호 특집호(1908. 11. 9.)
조선신보 3000호 특집호(1908. 11. 9.)

따라서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신문은 사실상 조선신보를 계승한 것인데, 제호를 바꾸고 지령을 1호로 발행했기에 새롭게 창간한 신문으로 간주하고 있다. 비록 제호와 지령이 바뀌었으나, 사실상 인천경성격주상보가 조선순보, 조선신보, 그리고 조선신문으로 이어지며 지속적으로 발간된 인천의 신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조선신문의 창간사를 보면 이런 정황이 명확하다. 한때 2만 명을 헤아리던 인천 거주 일본인의 수가 불경기로 인해 1만명으로 줄고 서로 간에 갈등을 빚고 있는데, 이런 폐해를 해소하기 위해 창간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이런 배경 하에서 조선타임즈와 조선신보가 폐간되고 곧 이어 조선신문이 탄생하게 된 기반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새로운 신문으로 창간했으나 그 뿌리가 기존 신문에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조선신문은 창간 이후 발전을 거듭해 서울에서 발행되던 경성일보와 함께 한반도 최대 신문으로 발돋움했다. 1910년 발행부수는 8529부로, 1만9494부의 경성일보 다음으로 많은 발행부수를 가지고 있었다. 창간 당시 직원은 43명이었고 편집국·영업부·인쇄공장이 있었으며 경성지사와 용산지국을 두고 있었다.

인천 거주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지 성격의 인천경성격주상보에 뿌리를 둔 조선신문은 일본이 한반도와 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 따라서 신문의 규모가 커졌고, 아시아 각국에 지국을 설치하고 운영할 정도로 한반도를 대표하는 신문으로 성장했다.

사세가 확장됨에 따라 도쿄·오사카·교토 등 일본 본토의 주요 도시 뿐 아니라 중국의 베이징·하얼빈과 대만 등 당시 일본의 세력이 미치던 여러 지역에 지사와 지국을 설치했다.

조선신문은 창간 당시 4면을 발행했으나, 곧 지면을 늘려가서 1915년에 6면, 1918년에는 8면으로 증면해 발행했다. 1919년에는 조간 4면, 석간 4면으로 개편해 발행했다. 1911년 10월에는 일본어와 한글 총 10면을 발행하기도 했다.

증면을 하면서 활자 크기가 줄어들었고 기사와 광고의 수는 늘어났다. 1910년의 경우 한 면에 1만3056자를 게재할 수 있었고 총 5만2224자 분량의 기사와 광고를 게재할 수 있었다.

조선신문이 발전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당시 인천이 갖고 있던 도시로서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인천에서 출범하고 인천에 뿌리를 굳건하게 내리고 있던 신문이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권역까지 사세를 확장했던 것은, 그만큼 당시 인천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시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물론 일본인들 중심으로, 조계지 무역항으로서 그런 역할이 가능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아픈 기억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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