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13)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커뮤니케이션 즉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한반도의 매체를 살펴보면, 오래 전부터 다양한 형태의 매체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반도 매체의 역사적 궤적은 전체 인류 역사에서 살펴본 매체의 역사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천의 매체는 그런 맥락에서 한반도 매체의 역사와 같은 흐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매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간략하게 짚어보는 것은 곧 인천 매체의 발달과정을 살펴보는 과정이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사용된 매체의 한 종류로 역사적 의미가 있고 지금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통신 수단으로 ‘봉수’를 꼽을 수 있다. 흔히 ‘봉화’로 지칭되지만 불과 함께 연기도 사용됐기에 봉수가 정확한 명칭이다. 봉수는 한반도만의 특징적인 매체는 아니지만 한반도에서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됐고 중요한 통신 수단으로서 기능했다는 측면에서 의미있는 매체이다.

봉수는 여러 문명권에서 사용됐지만, 남겨진 기록으로 보면 기원전 중국 주나라에서 최초로 사용됐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안장왕(재위 519~531)때 봉화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따라서 삼국시대에 한반도에서 봉수를 군사적 목적의 통신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봉수는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통신 수단은 아니다. 국가에 위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군사적 목적을 가진 통신 수단이다. 봉수는 그 성격상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도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강화망산봉수(출처 강화군 홈페이지).
강화망산봉수(출처 강화군 홈페이지).

밤에는 불을 피우는 봉화로 메시지를 전달했고, 불빛이 잘 보이지 않는 낮에는 연기를 피워서 신호를 전달했다. 4개나 5개의 불이나 연기의 숫자로 간단하고 제한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삼국시대부터 사용된 봉수는 왜구의 침략에 골머리를 앓던 고려 때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을 사용해 신호를 전달했고, 위급의 정도에 따라 평상시에는 한 개, 경계 태세인 이급에는 두 개, 교전을 준비하는 삼급에는 세 개, 전투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사급에는 네 개의 봉수를 사용했다.

고려의 봉수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됐다.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난 이후에는 지금의 남산인 목멱산을 중심으로 하는 봉수체계가 정립됐다. 국내에 총 5개의 핵심 봉수로를 설정해 운용했고, 봉수대가 전국에 703개가 있었다고 하니 당시 웬만큼 높은 산봉우리에는 대부분 봉수대가 설치돼 있었다고 보면 된다.

세종은 고려의 봉수체계를 5개로 세분화해 정비했는데, 평상시에는 한 개, 바다에 적군이 나타나면 두 개, 적군이 해안 가까이 진입하면 세 개, 아군의 전함과 교전이 시작되면 네 개, 그리고 적군이 상륙하면 다섯 개의 순으로 세분화했다.

국내 각지에서 올라온 봉수는 초저녁쯤에는 최종 목적지인 남산에 도착했다. 남산에서는 봉수가 올라온 상황을 분석해 매일 새벽 승정원에 보고했고, 밤에 급한 봉화가 전달되면 승정원 관리는 한밤중에도 즉시 임금을 깨워서 보고했다. 그만큼 국가의 안위와 관련한 중요한 통신 시설이 봉수였다.

메시지를 빠르게 전달할 수단이 제한적이던 시기에 봉수는 비교적 빠르게 급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최상의 통신 수단이었다. 최적의 조건이 갖춰진다면 이론적으로 부산에서 남산까지 봉수가 전달되는 시간은 2시간 남짓이지만, 통상 봉수가 시작된 지 12시간 가량 경과한 초저녁에 국내 각지의 봉수가 남산에 도착했다. 이 속도도 당시에는 매우 빠른 속도였다.

봉수는 이렇듯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된 통신 수단이었고, 외적의 침입 등 위급한 상황을 빠른 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알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현실은 항상 이상적으로 운영된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는 봉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선조는 잠시 봉수 운영을 중단하고 파발을 이용하기도 했다. 봉수가 효율적인 통신 수단인 것은 틀림없지만, 여러 가지 변수로 인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위급한 상황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평화로운 시기가 오래 지속되면 아무래도 봉수를 올리는 봉수꾼이 타성에 젖어 정작 위기 시 제대로 신호를 보내지 못하는 부작용이 생겨났다.

높은 산꼭대기에 위치한 봉수대에서 매일 신호를 보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문제도 많았다. 기상 상황에 따라 불이나 연기로 신호를 보내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고, 그런 경우에는 봉수꾼이 직접 뛰어가서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다. 매서운 기후를 견뎌야했고 험한 산을 오르내려야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봉수꾼은 당시 가장 험한 3D(Difficult, Dirty, Dangerous) 직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 안보와 관련된 중요한 직종이다 보니 처벌도 엄해서 적군이 침략했을 때 봉수를 제대로 올리지 않은 경우 사형에 처했다. 따라서 모두들 기피하는 직종이었지만, 안보적 측면을 고려해야 하기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업도 아니었다. 결국 유배를 간 몰락한 양반이 봉수꾼을 맡기도 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군사 통신 수단으로 존재했던 봉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제한적이던 시절에 국가의 안보를 담당한 중요한 통신 수단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봉수 체계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봉수꾼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는데 통신 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결국 메시지의 질과 효용성을 결정하는 것은 메시지를 만들고 전달하는 사람이니, 결국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봉수가 역사적 사실로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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