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19)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는 당시 인천에 관한 다양한 소식을 전했다. 관보의 성격이 강했던 매체였던 만큼, 인천과 관련한 정무적인 정보와 더불어 인천을 드나든 여러 외국 국가의 선박 및 인천과 관련된 다양한 조약 등 의미 있고 상세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개항장으로서 인천이 얼마나 분주한 도시였는지 잘 묘사하고 있으며, 인천에서 매우 다양한 일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1883년 11월 10일자 한성순보에는 독일의 전권대신 자페(Eduard Zappe)와 영국의 전권대신 파크스(Harry Parkes)가 인천에 도착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11월 30일자에는 영국 공사 파크스(Pakres)가 영사 아스톤(Aston, W.G.)과 통역관 등을 데리고 제물포에 도착해 중국 천진으로 출항했다는 기사도 볼 수 있다. 독일 공사 자페가 제물포를 떠났고, 영국 영사 아스톤과 함께 독일 군함에 승선하여 일본을 방문한다는 기사도 있다.

이외에 미국·네덜란드·덴마크·오스트리아·러시아·이태리 등 여러 국가의 선박과 사람들이 제물포를 무대로 빈번하게 드나들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인천이 개항장으로서 역할을 활발하게 수행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국적과 더불어 이름까지 상세하게 실려 있어서 인천을 드나들었던 외국인들의 면모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또한 1883년 11월 한달간 영국·일본·중국 등의 상선이 총 17회 입출항했다는 기록이 입출항 날자와 더불어 선박의 종류까지 기사로 실려있다. 한성순보의 기사는 매우 상세하게 이런 출입국 사항을 보도하고 있어서 당시 바쁘게 돌아가던 개항장 인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려보는데 필요한 충실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1897년 개항 초기 제물포의 모습 (사진제공·인천항만공사).
1897년 개항 초기 제물포의 모습 (사진제공·인천항만공사).

한성순보는 당시 인천으로 수입된 화물의 종류와 관세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수입품의 관세는 종류에 따라 5%에서 30%까지 다양했다. 약재에는 5%의 관세가, 향료에는 20%의 관세를 매겼다. 금속과 금속으로 만든 기구에는 5%의 관세가 붙었고, 음식물도 5%의 관세가 부과됐다. 와인과 맥주에는 10%의 관세가 부과됐다고 하니, 이미 1883년 당시에 와인과 맥주가 수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양주에는 종류에 따라 25%~30%의 관세가 부과됐는데, 주종에 따라 관세율이 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1883년 개항 당시의 기사에서 술의 종류에 따라 세율을 달리했다는 것을 보면 다양한 종류의 주류가 조선에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각품이나 보석류에는 30%의 관세가 부과됐는데, 예나 지금이나 사치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외에도 각종 직물과 문방구, 소다수와 같은 음료수, 과일 씨, 가구, 의복, 모자, 양말, 실내 장식물 등의 품목이 상세하게 기술됐는데,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상품이 수입됐다.

면세 품목도 상세하게 기술됐는데, 서적이나 여행에 필요한 용품, 의료기구, 학술 용품 등은 면세로 규정하고 있다. 음란물이나 아편과 같은 마약은 수입 금지 품목으로 명시하고 있고, 영사관을 거쳐 조선 관리의 허가를 받으면 반입할 수는 있으나 판매하지는 못하도록 적시하고 있다.

당시 기사를 보면 인천항을 통한 화물의 세관업무가 상당히 짜임새 있고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18세가 말의 조선에 매우 다양한 외국 상품이 수입됐고, 이런 상품에 부과하는 관세율이나 규칙이 지금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련됐다는 것을 한성순보의 기사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인천이 개항하고 난 이후, 다른 개항장과의 관계도 한성순보를 통해 조망해 볼 수 있다. 1884년 5월 2일자 신문에 원산항의 일본 영사가 본국에 보고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인천이 개항하고 난 이후, 원산의 역할이 급격하게 축소되어 존폐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무역에 종사하던 큰 규모의 상인들은 대부분 경기도와 평안도 상인들이었는데, 인천 개항 이후 이들 상인들이 인천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원산의 무역 규모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반 토막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천은 지리적 이점으로 개항하자마자 가장 중요한 무역항으로 성장했다. 인천 주재 관리가 인천이 향후 10년 이내에 조선의 가장 번성한 항구가 될 것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기사도 한성순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천의 역할과 위상은 이미 개항 당시에 정해져 있었다고 보겠다.

작은 어촌이었던 인천이 개항장으로 역할을 시작하면서 1883년에서 1884년까지 불과 일 년 남짓한 기간에 국제적 항구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한성순보의 기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비록 관보의 성격이 짙은 신문이었고, 짧은 기간 동안 발행된 신문이었지만, 개항 당시 인천의 모습과 발전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한성순보는 인천에 있어서 매우 의미있는 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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