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41)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한국 최초 극장 애관(愛館)극장은 영화관이 아니라 공연장으로 설립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895년 정치국(丁致國)이 인천 경동에 협률사(協律舍)를 설립한 것이 애관극장의 모태이다.

협률사는 1912년에 이름을 축항사(築港舍)로 변경했고, 추후 다시 애관으로 개명하고 연극과 영화 상설관으로 운영했다. 애관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한 것은 1923년 혹은 1924년부터로 알려져 있는데, 인천 최초는 아니었다.

1926년 애관극장을 인수한 김윤복은 극장을 신축하는데, 1927년 10월 14일자 매일신보에 의하면, 애관극장은 800석이 넘는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신축됐고, 공익 목적에는 무료로 대관해 준다고 밝히고 있다.

이 당시에 애관극장은 영화 상영을 했지만, 각종 연극과 악극 등도 공연했다. 따라서 애관은 영화 전용관은 아니었고 인천에서 최초로 영화를 상영한 곳도 아니었다.

인천에서 최초로 영화를 상영한 곳은 표관(瓢館)이다. 1914년 11월 3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인천 사정(寺町)에 신축 중이던 상설 활동사진관 표관은 지나간 (10월)30일에 비로소 전부를 준성하고 부내(府內)에 내외국 유지 신사 300여 명을 표관으로 초대해 성대한 개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31일부터 활동사진을 시작했는데 밤마다 대성황을 이뤘다”고 보도하고 있다. 따라서 표관은 1914년 10월 30일에 개관하고 31일부터 영화를 상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표관은 지금 외환은행 자리인 인천부 신정(新町) 18번지에 위치해 있었다. 인천여관을 운영하던 일본인 시미즈 슈조(淸水周藏)가 설립한 극장으로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영화를 상영했다.

표관은 설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의 대정관을 소유한 닛다연예부에 운영권을 넘겼고, 추후 대정관 소유주 닛다 고이치(新田耕市)가 소유권도 인수했고, 동생인 닛다 마타헤이(新田又平)가 경영을 맡았다.

애관극장 전경
애관극장 전경

표관은 애관극장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영화관으로 자리 잡았다. 객석 672석을 갖췄던 표관은 1937년 한해 관람객이 18만 2640명이었고 입장료 수입이 4만8132원에 달했다. 1937년 애관극장의 1년 관람객은 14만5000명, 입장료 수입은 4만3480원이었다. 표관은 해방 후 인천시에서 인수해 문화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운영했으나 한국전쟁 당시 소실됐다.

고일의 인천석금에 의하면 표관에선 평일 야간에 1회 영화를 상영했고, 주간 상영은 일요일에만 있었다. 영화 한편을 상영한 것이 아니라, 뉴스, 단편 희극, 극영화, 활극 등을 4~5시간에 걸쳐 연속으로 상영했다.

영화 상영 시작 전에 나팔수가 나팔을 30분 가량 불었고, 나팔 소리를 들은 관객들이 영화 상영이 임박했음을 알고 모여들었다. 초창기 상영했던 영화는 무성영화였기에 영화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변사가 무대에 올라와 인사를 한 후, 변사석에 자리잡고 영화 설명을 시작했다.

무성영화 시절 변사의 역할은 절대적이어서, 영화의 흥행여부가 변사의 자질에 좌우되기도 했다. 표관에서는 남녀변사가 배우처럼 대사를 했는데,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했던 변사 서상호는 일본인 부녀자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서상호의 동생인 서상필은 조선어 변사로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다.

1937년 인천부 신정 19번지에 일본인 미쯔이 토라오(三井寅男)가 새로운 영화관인 락우관(樂友館)을 설립했다. 위치는 표관 바로 맞은편이었다. 1938년에 이름을 인천동보영화극장(仁川東寶映畫劇場)으로 바꿨다.

이후 인천동보영화극장은 인천키네마(仁川キネマ)*로 개칭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미쯔이 토라오(三井寅男), 지배인은 와카야마(若山幸吉)였다. 객석은 370석이었다. 1937년 입장객은 2470명, 입장 수입은 916원이었다. 해방 후 적산 불하돼 동방극장이 됐다.

인천영화극장(仁川映畫劇場)은 1942년 7월 9일 개관한 인천의 문화영화 전용관이었다. 지금의 동인천역 앞쪽인 인천부 용강정 22번지에 위치해 있었다. 설립자는 인천지역 일본인 실업가인 아오시마(靑島鋪作)였다. 1942년 7월 2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정원 600명으로 뉴스와 문화영화 전문관이고 전국에서 7번째 신관이라고 밝히고 있다. 해방 후 적산 처리돼 인영(仁映)극장이 됐다.

일제 치하 인천에는 영화관과 더불어 영화제작사도 있었다. 인천혜성영화제작소는 1930년대에 설립돼 첫 번째 작품 마도를 제작했다. 1935년 12월 11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인천 혜성영화제작소에서 조선 명화 마도를 촬영하기 위해 김벽파, 한일송, 김연실 등 일행 10명이 대련을 향해 인천을 떠났는데 약 일주일 예정으로 대련을 무대로 촬영하리라는 바 일반의 기대되는 명화도 얼마 되지 아니하야 공연되라 한다.”고 전하고 있다.

한일송과 김연실 등은 당대 유명한 배우였고 해외 로케이션을 위해 중국 ‘대련’으로 출국했다는 것은 매우 야심차게 제작한 영화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인천이 당시 영화판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개항장이었던 인천은 근대와 일제 강점기 시절을 거치며 영화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지금도 인천은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래저래 영화와 인천은 각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다만 인천은 그 위상에 걸맞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로케이션 장소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레딧은 엉뚱한 도시로 가버리는 경우도 많다. 향후 개선돼야 할 부분이다.

*표관 자리에서 운영하다 1973년 문을 닫은 키네마 극장과 인천키네마 극장은 별개의 극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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