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42)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일제 강점기에는 언론 탄압이 극심하던 시절로, 한국인이 발행하던 신문은 물론이고 일본인 발행 신문도 통폐합을 통해 총독부의 통제를 받던 시절이었다. 당시 인천에는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일제가 유화정책을 실시해 조선, 동아, 시대일보 3개의 한국어 신문이 창간됐다는 것은 이미 기술한 바 있다. 인천에는 독자적인 한국어 신문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서울에서 발간되던 이들 신문의 인천 지국이 설치돼 기자 7명이 취재활동을 했다.

동아일보의 초대 인천 지국장은 하상훈*이었다. 이후 서병훈, 이범진, 김헌식이 지국장을 맡았다. 초대 사회부 기자에는 이길용이 있었다. 이길용은 1936년에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동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베를린 올림픽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체육부장이었던 이길용은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가 영 못마땅했고, 이를 흐리게 처리할 방법을 궁리했다. 이길용 기자의 문의를 받은 이상범 화백은 흐리게 처리하는 것은 어려우니 아예 일장기를 지워버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이에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진을 사용해 신문을 발행했고,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정간 처분을 받았다. 사장 송진우를 위시해 14명이 신문사를 떠나야 했고, 이길용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다시는 신문기자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신문기자들이 어떤 태도와 기개를 가지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길용은 인천 우각리 출신으로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에 유학했다.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가 된 것은 1923년 6월이었다. 그는 기자로 재직하면서 인천제물포청년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맡았고, 인천영화학우회 간사 역할도 맡았다.평소 항일 정신이 두드러졌기에, 일본 경찰은 그에 대해 배일적 언동을 자행하고,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고취 선전할 우려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동아일보 인천지국의 경제부에는 이범진과 김헌식이 있었다. 객원 기자로 있었던 곽상훈은 광복 후에 동아일보 초대 인천지국장이 됐다. 하상훈의 뒤를 이어 2대 동아일보 인천지국장을 맡은 인물은 서병훈이다.

그는 하상훈, 이범진 등과 함께 국악동호회인 이우구락부를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계급과 파벌을 타파하는 것을 기치로 내세운 단체인 신정회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 이 단체의 창립 인사도 하상훈, 곽상훈, 고일 등으로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이 인천 사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8년 고려야구단이 동아일보 인천지국 앞에서 포즈를 잡고 있는 모습.(사진출처 인천야구 한 세기)
1928년 고려야구단이 동아일보 인천지국 앞에서 포즈를 잡고 있는 모습.(사진출처 인천야구 한 세기)

3대 동아일보 인천지국장은 영화학교를 졸업한 이범진이 맡았는데, 전임자인 서병훈과는 같은 교회를 다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많은 활동을 같이 했다. 이범진은 언변과 학술이 뛰어났고, 악기도 다루고 스포츠에도 뛰어난 재주꾼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뛰어난 언변을 가졌던 이범진은 서병훈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고, 이후 인천에서 치러지는 신식 결혼식의 주례를 거의 도맡아했다시피 했다는 사실이다. 신문 기자이며 문장가이자, 음악인이자 체육인이었던 그는, 다양한 사회 활동은 물론이고 결혼식 주례까지 맡는 전천후 지식인이자 활동가였다.

조선일보 초대 인천지국장은 박창한이었다. 그는 신문사 지국장을 하면서 미두 취인소 중매점의 장립(場立, 대리인으로서 미두 거래를 하는 직원)이기도 했다. 고일은 인천석금에서 박창한이 돈 욕심과 사업 욕심이 많은 호사가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조선일보 인천지국의 미두기자(경제부기자)는 최진하, 사회부에 김태현과 정수일이 있었고, 객원 기자로 백대진과 고일이 있었다.

박창한은 여러 운동 경기와 강연, 연극과 음악회를 주최하고, 노동총맹을 조직해 노동 운동에도 참여했으며, 보이스카우트 운동에도 가담하였으니, 대단한 활동가이자 야심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일보 인천지국장은 조종악이었고, 총무에는 이창의, 경제에 정수일, 사회에 고일이 기자로 있었다. 보천교 사건으로 발행인이 바뀌어서 한때 문장백, 전두영이 각각 경제와 사회부를 맡은 시절도 있었다. 인천에 지국을 두고 활동하던 이들 신문들은 이후 일제에 의해 폐간되면서 인천은 민족 언론의 암흑기를 맞게 된다.

당시 인천 주재 언론사 기자들은 단순히 취재 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애국지사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인천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로서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 활동을 했고, 일제에 저항하는 항일 운동도 전개해 고초를 받았다.

각각의 언론사는 인천지역 청년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조선일보는 '한용청년회'와 '노동조합'운동에 적극적이었고, 동아일보는 '제물포청년회'와 '신정회' 육성에 힘썼다. 시대일보는 '인천청년동맹'을 후원했다.

암울했던 식민지 치하에서 언론 기자들은 저항정신을 불태웠고,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온갖 탄압을 감수하며 직필을 휘둘렀다. 특히 인권유린과 민족차별에 항거하는 인천지역의 민족투쟁으로 평가받는 가등정미소 사건 동조 파업*은 언론의 끈질긴 취재와 보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듯 엄혹한 식민지 통치하에서 가혹한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던 언론인의 기개는 도대체 오늘날 어디로 실종됐는지, 심지어 ‘기레기’라는 비아냥의 대상이 된 것인지, 그저 안타까운 일이다.

*인천석금에는 초대지국장이 서병훈이라 기술돼 있고, 인천시사와 1920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 사고에는 초대지국장이 하상훈으로 기술돼 있다.

*가등정미소 여공에 대한 구타사건에 대한 언론보도로 촉발된 동조 파업은 인천 지역의 총파업으로 확산돼 민족 투쟁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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