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35)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잡지는 신문과 더불어 근대의 매스미디어를 형성한 주요 매체였다. 신문이 상대적으로 짧은 발행주기를 갖고 발행된 것과 비교해 잡지는 발행 주기가 길고 내용도 신문에 비해 풍부하고 분량도 많은 인쇄매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초창기 인쇄물은 신문과 잡지의 경계가 모호했고, 두 매체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문헌에 따라서 잡지와 신문을 분류하는데 있어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에 입각해 내용에 있어 다양한 주제를 포괄해 편집한 것을 잡지로 정의한다면, 1731년 영국에서 발행된 ‘젠틀맨스 매거진 The Gentleman's Magazine’이 최초의 잡지이다.

이 잡지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평론을 모아서 발행했는데, 잡다한 것을 모았다는 의미로 이 잡지 이름에 사용된 영어 단어 매거진(magazine)은 이후 잡지를 뜻하는 일반 명사가 됐다.

젠틀맨스 매거진은 시사·시·전기·음악은 물론 삽화와 요약물도 내용에 포함했고, 기존의 신문과 확연히 구별되는 잡지의 성격을 보여줬다. 최초의 잡지로 인정된 이유이다. 이후 비슷한 시기에 유럽 각국과 미국에서 다양한 종류의 잡지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1906년 발간한 가뎡(정)잡지.(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1906년 발간한 가뎡(정)잡지.(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초창기 잡지는 소수의 상류층 사람들을 대상으로 발행됐기에 가격도 비쌌고 광고도 없었다. 19세기 초반에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 잡지가 출현했으나 소수였고,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며 대중을 겨냥한 잡지의 발행부수가 늘어나며 광고 수익이 발생했고 이에 따라 잡지 가격도 하락했다. 이후 본격적인 대중 잡지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잡지는 개화기에 서구 문물이 도입되며 발행되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정세가 변화하는 것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잡지가 발행됐다. 그러나 개화기에는 현대적 의미의 잡지라고 분류할 간행물은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국 최초의 잡지로 1892년 1월 영국인 선교사 올링거(Ohlinger, F.) 부부가 발행한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를 꼽는 문헌이 많다. 그러나 이 잡지는 선교를 위해 영문으로 발행한 간행물이었기에 엄밀한 의미로 한국 최초의 잡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한국에서 최초로 발행된 잡지 형태의 인쇄물로서 의미를 갖고 있고, 한국 최초의 잡지로 기술하고 있는 기존 문헌이 많으나 엄격한 기준으로 봤을 때 잡지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선교사들이 선교를 위해 발행한 영문 간행물은 이후에도 여럿이 발행됐다. 1900년에 ‘트렌섹션 오브 더 코리아 브렌치 오브 더 아시아틱 소사이어티(Transaction of the Korea Branch of the Asiatic Society)’가 발간됐으며, 1901년에는 헐버트(Halbert, H. B.)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를, 1904년에는 ‘코리아 미션필드(Korea Mission Field)’가 계속 발행됐다.

비록 한글은 아니고 선교 목적의 영문 간행물이었지만, 이들 잡지 형태의 영문 간행물들은 한국의 잡지 발행에도 영향을 미쳤다. 잡지 내용의 구성이나, 잡지의 방향성에도 영향을 줬고, 또한 이들 영문 간행물들이 한글 잡지 발행의 필요성을 자극했다는 측면도 있다.

코리안 리포지토리는 종교적 내용 이외에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이나 문화에 관한 내용도 다루었기에 그 당시 여러 상황을 기록한 기록물로서 가치를 갖고 있다.

한글로 발행된 최초의 잡지 형태 간행물은, 1896년 11월 30일 독립협회에서 발행한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이다. 이 간행물은 A5판형 크기에 30면 정도의 분량으로 월 2회 발행했다.

그러나 그리 오래 발행하지는 못했고, 1897년 8월에 폐간했다. 독립협회에서 발행한 잡지답게 외세를 배척하고 자주독립을 표방했고 민주주의에 의한 민권사상을 강조했다.

잡지의 성격으로 보면 일반적인 잡지의 정의에 부합한다기보다는 독립협회의 기관지 같은 성격으로 주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여론의 선도지로서의 역할이 강조됐다. 비슷한 성격으로 특정 단체에서 발행한 잡지로 대표적인 것은 1906년 7월 대한자강협회에서 발행한 ‘대한자강회월보’와, 같은 해 12월에 서우학회에서 발간한 ‘서우’가 있다. 이들 잡지도 대중들의 계몽을 목적으로 발행된 것이라 일반적인 잡지의 성격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학 잡지인 ‘수리학잡지(數理學雜誌)’는 1905년 12월에 창간돼 과학, 수학, 그리고 신문명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1906년 11월에는 최초의 아동지 ‘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가 창간돼 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계몽교양지 역할을 했고, 같은 해 6월에는 ‘가뎡잡지(家庭雜誌)’가 창간돼 여성들의 계몽에 앞장섰다.

가뎡잡지는 단재 신채호가 발해하고 편집인으로 주시경과 장지연이 참여했으며, 당시 대부분의 잡지가 국한문 혼용이었던 것에 비해 순 한글을 사용했다.

한국의 잡지 역사에서 위의 간행물들을 잡지로 다루고 있지만, 그러나 이들 잡지는 엄밀한 의미에서 잡지라고 보기 어렵다. 다양한 주제의 종합적인 내용을 다뤘던 젠틀맨스 매거진을 세계 최초 잡지로 규정한 정의에 입각해 본다면 상기한 잡지들은 잡지 형태의 정기 간행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국 최초의 잡지는 최남선이 1908년 11월 1일에 발행한 ‘소년’이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정설이다. 소년은 체계가 잡힌 편집과 종합적인 내용으로 볼 때 이전에 발행된 잡지와 달리 근대적 모양을 갖춘 종합 잡지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로 인정된다. 소년의 창간일을 지금도 "잡지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이때 최남선의 나이가 19세였으니 소년이 소년을 발행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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