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22)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1888년 7월 14일, 박문국의 폐지와 함께 한성주보가 폐간된 이후, 1896년 4월 독립신문이 창간되기 전까지 상당기간 조선에는 자체적인 신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만든 일본어 신문은 발행되고 있었다.

1890년 1월 28일, 인천에서는 일본인 사노세이지가 인천경성격주상보(仁川京城隔週商報)를 창간했다. 제호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인천과 한성의 상업 관련 소식을 전해주는 신문으로 격주로 발행했다. 물론 일본인을 대상으로 일본어로 발행한 신문이었다. 인천경성격주상보는 1891년 8월 15일 마지막 호를 발행했고, 이후에 조선순보와 조선신보로 제호를 바꿔 발행했다.

조선신보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호외를 발행한 신문이었다. 조선신보의 호외는 청일전쟁의 임박을 가장 먼저 보도했다. 요즘으로 보면 단독 특종을 한 것이다.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 상인들을 위해 발행한 신문이 당시 조선의 정세를 분석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인천이 한반도 정세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인이 발행했지만, 한글로 발행한 신문도 이 시기에 창간됐는데, 1895년 2월 17일에 창간한 한성신보이다. 국한문과 일본어로 격일간 신문으로 발행한 한성신보는 일본 외무성의 지원으로 창간됐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발행된 신문이었다.

따라서, 한성신보는 조선인들에게 일제 침략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성격이 강했는데 조선인 독자들을 겨냥한 다양한 기사와 읽을거리를 제공했다. 그러한 프로파간다 전략의 일환으로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신문들 중 최초로 연재소설을 게재했다. 이 땅에 등장한 최초의 호외와 최초의 신문 연재소설이 모두 일본계 신문에 실렸다는 것은 매우 씁쓸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한성신보는 명성황후의 시해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1896년 2월 18일자에서는 아관파천을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하는 등, 조선에서 일본의 침략 야욕을 옹호하고 정당화 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은 조선에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구축했고 일본이 한글로 발행한 한성신보는 정치적 선전 도구였다.

일본이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자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는 일본을 견제하고 나섰다. 이들 3국 간섭으로 일본의 입지가 약화되고 내각에서 친일파가 축출되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을미사변에 동원된 일본 낭인들은 한성신보가 고용한 사람들이었다. 한성신보가 단순한 신문이 아니었고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이었다는 것을 잘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을미사변으로 친일 내각이 다시 들어서고 을미개혁이 시작됐는데,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해 일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민심을 자극해 전국적인 항쟁이 일어나게 됐다.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자 러시아는 친러파들과 공모해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오게 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친일파 내각이 무너지고 박정양을 중심으로 하는 정동파 내각이 집권하게 됐다. 정동파는 미국과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정치 세력으로 당시 이들 서구권 국가들의 외교공관이 정동에 몰려있어서 붙게 된 명칭이다.

독립신문.(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독립신문.(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이렇게 극심한 혼란이 거듭되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한성신보가 조선의 정치에 깊숙하게 개입하고 을미사변을 주도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조선 정부에서는 어떤 형식으로건 이에 대응할 필요를 느끼게 됐다. 곧 한성신보에 대응할 신문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이런 정세 속에서 1896년 4월 7일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됐다.

독립신문은 서재필이 창간했는데, 서재필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그는 일본과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했는데, 아관파천 이후 한성신보의 선전에 대응할 필요를 느낀 정부는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도록 적극 후원했다.

독립신문은 정동파 내각 관료들이 나서서 도왔는데, 기자들이 관청에 자유롭게 출입해 취재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고, 각급 학교와 관청이 독립신문을 구독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독립신문은 여러 측면에서 조선의 신문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무엇보다 순한글판으로 발행했고, 제호에 가로쓰기를 사용한 최초의 신문이었다. 모든 문서가 세로쓰기였던 시절에 비록 제호만이라도 가로쓰기를 사용했다는 것은 신문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한글 전용을 시도한 첫 사례로 기존의 한문 체제를 붕괴시키고 한글문화가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해 근대문학의 출발점을 마련했다는 주장도 있다. 여러 측면에서 한반도 신문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신문이 독립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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